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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유재현 온더로드> 시리즈의 4번째 책으로, 저자가 10년 동안 다녔던 아시아 국가들을 다시 돌아다니며 그들이 당면한 현재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는 책이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민주주의를 대신한 파시스트적 독재와 공포정치가 판치는 아시아의 정치를 고발하고 있는 저자 유재현은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헐벗고, 가난해지는 아시아 민중들을 현장에서 만나고 있다. 국가와 자본에 밀려서 난민이 되어 가는 아시아 대중의 삶은, 세계화되는 신자유주의에 발맞추어 날로 궁핍해지고 있는데, 저자 유재현은 이 책을 통해 그렇게 민주화 속에서 난민화되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사진과 글로써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자본에 복무하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그 속에 대중은 없다!
-민주화라는이름아래난민화를겪고있는아시아에대한가장솔직한보고서!
세계를 거칠게 나누는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사용했던 때는 이미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앞에 그 둘은 세계를 명명하는 하나의 이름이 된다. 민주주의는 대중이 아닌 자본에 복무하고, 대중을 대의한 정치에는 대중이 사라진 지 오래며, 공산당마저 일당독재를 일삼으면서 자본의 비역한 악취를 내뿜는다. 국가라는 이름을 내세워 아시아는, 아시아 인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통제하고, 그 삶의 내용까지 결정지어 버렸다. 그 결과 아시아는 현재진행형으로 난민을 양산하고 대중을 삶에서 추방하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발을 맞추고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등 아시아 10개국을 돌아다니며 아시아 인민의 삶과 정치의 현장을 발로 뛰며 쓴 저자 유재현은 이 책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재의 자리를 대신한 민주주의와 선거함은 결국 아시아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음을, 그리고 아시아 인민들은 그 민주화의 이름 속에 그저 난민화되고 있을 뿐임을 고발하고 있다.
아시아의 오늘, 무엇이 바뀌었나?
-민주화를 독재로 착각한 아시아의 모순적 현실
32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로 일관했던 독재자이자, 100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인을 죽인 도륙자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前) 대통령의 ‘죽음’으로 아시아의 ‘오늘’을 시작하고 있는 이 책은 민주화를 독재로 착각한 아시아의 모순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다. 살인자에 다름 아닌 수하르토의 죽음 앞에 슬퍼하며 조기게양까지 실시한 인도네시아 현 대통령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는, 그렇지 않아도 살기 팍팍한 인도네시아인들을 수하르토라는 죽은 개에게까지 물려뜯기게 하고 있다. 1998년 민주화시위로 내쫓긴 수하르토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금 ‘과보다 공이 컸던’ 인물로 부각되는 오늘 인도네시아의 현실은, 한국의 지난 죄 많았던 대통령들이 사면을 받고 다시 멀쩡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조금의 부족함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국이거나 인도네시아거나, 혹은 필리핀이거나 태국이거나, 이 같은 사실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이며, 이로써 보건대 대중에 대한 조롱마저도 ‘세계화’되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아시아의 오늘’인 셈이다. 그리고 조롱당한 대중은 죽은 개에게 물리면서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1998년 인도네시아인들은 32년의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한 번의 기회를 가졌다. 32년 만의 기회였다. 그 뒤 10년이 지났지만 무엇이 청산되었는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수하르토의 족벌은 여전히 천문학적인 부를 움켜쥐고 있고, 수하르토 시대에 권력을 향유했던 정치, 관료와 자본은 같은 이름이거나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의 목을 조르는 빈곤과 부정, 부패 또한 별일 없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말하자면 수하르토의 신질서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숨통을 조르고 있다.”(본문 26쪽)
-독립 이후, 신 식민지적으로 재편된 아시아의 현재
1957년, 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독립한 나라 중 하나인 말레이시아는 중국인들이 대거 참여한 말라야공산당의 투쟁을 통해 마침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은 이미 영국이 말라야연방을 통해서 공산당을 포함한 좌익을 배제하는 반공 기틀을 확고히 다진 후의 일이었다. 독립 후 반공 우익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암노(UMNO)가 영국의 지원 아래 정권을 장악했고, 그 가운데 소수계(중국계, 이슬람계) 우대정책은 무시되며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이 보존되고 널리 부흥되었다. 최근의 미미한 선거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암노의 장기집권 피로현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암노는 오랫동안 인종적 갈등을 분할통치의 기제로 활용하며 독재 권력을 유지?강화시켜 왔다. 그렇게 암노의 뒤를 지키고 있던 영국의 신 식민지적 재편은 간편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와 부미푸트라의 말레이시아」, 73쪽).
식민지 시대의 새로운 막이 열린 것은 비단 말레이시아뿐이 아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성 대통령, 아로요(Gloria Macapagal-Arroyo)는 부정선거 의혹으로 광범위한 퇴진요구를 받게 되자 미국과 군부의 의존도를 한껏 끌어올려 잔혹한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있다. 2006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편승한 아로요는 암살과 납치, 불법체포, 고문 등의 군사독재 스타일의 테러정치를 통해 ‘킬링머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필리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다(「테러의 필리핀」, 107쪽).
인구의 80%인 6천 9백만 명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해야 하는 빈곤층에 속하며 그 중 60%가 1달러 이하로 살아야 하는 절대빈곤층인 필리핀의 오늘을 극악한 봉건적 지배체제의 온존 탓으로 돌리고 있는 저자는, 역시나 필리핀의 봉건적 대지주 계급에게 식민종주국인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마닐라 만 최고의 해변부지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대사관이다. 이렇게 아시아를 말하는 데에 미국과 유럽을 빼고서는 이야기가 불가능한 현실, 그것이 바로 아시아의 오늘이다. 식민지 시대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삶’의 반대말, ‘자본’과 ‘국가’
-필리핀의 빈민촌은 서울과 다른가
이름조차 낯선 아시아 지역들에서 벌어진 일들을 따라가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익숙함과 조우하게 된다. 아시아에서 급속히 현재진행중인 대중의 추방과 난민화, 그것은 바로 한국의 모습이었고, 세계화의 수순이었다. 농사를 하며 살아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개발업체 때문에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고 또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된 필리핀 파야타 빈민촌의 사람들은(「약속의 땅 그리고 혁명」, 본문 95쪽) 개발과 자본의 논리에 밀려 집을 빼앗기는 용산 철거촌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돈 몇 푼 쥐어주고 살던 곳에서 떠나라는 통보를 받은 빈민촌 사람들은 평택 대추리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삶과, 삶의 태도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돈을 뿌리친다. “매립 후에 개발한다더군요. 주택단지나 골프장 따위를 짓겠지요. 그 작자들은 또 돈을 벌겠지요. 하지만 우린 1만 9천 페소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요. 그리고 여긴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던 곳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쓰레기 산 아래, 판잣집에서 살아가던 이는 이렇게 되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이냐고. 이건 대가를 지불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임을 자본가는 모르고 있다. 한국에서 대추리의 농민들에게 보상금을 쥐어주었던 정부와 자본가처럼 말이다.
1만 9천 페소, 우리 돈으로 치자면 60만 원에 불과한 보상금을 쥐어주고 사는 곳을 떠나라고 말하는 자본가에 대항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더라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은 필리핀의 빈민들. 한국의 2천년대와 끔찍하게 닮아 있는 필리핀 파야타 빈민촌 사람들은 자본에 농락당하고, 삶에서 추방당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비교적 민주화를 빨리 이뤄냈다고 믿고, 그들보다 선진적이라고 믿지만, 철거촌이 밀려나가는 지금의 서울을 보면서 필리핀의 빈민촌과 큰 차이를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내용을 스스로 구성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 자본에 밀려, 국가폭력에 밀려 그들은 난민이 되어 가고 있다.
-군부―국가―자본 : 욕망의 폐쇄회로
2008년 5월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휩쓸었다(「양곤 강변에서」, 219쪽). 10만 명의 사망자와 1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을 발생시킨 이 끔찍한 자연재해는 미얀마를 초토화시킨 후에야 끝이 났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잃었고, 어떤 이들은 집을 잃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생계수단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실감 속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정부는 해외구호의 통로조차 봉쇄했다. 사실상 헌법도 없이 17년 동안 무법적으로 통치 중인 미얀마 군정은 이즈음 보기 드문 말종의 군부독재정권이다. 이들은 아름드리 나무가 뽑혀나가고 집이 물에 떠내려 갈 정도의 참혹한 재해 이후에도 정치적인 논리를 들이대며 국제원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먹을 것도 입을 옷도 잠잘 곳도 없었다. 정부가 지어 놓은 몇 채 되지 않는 이재민 캠프는 그야말로 전시용에 지나지 않았다. 구호품이 들어오면 군인들이 모두 압수하기에 바빴고, 그 압수된 구호물품 중 이재민들에게 돌아갈 몫은 물론 없었다. 피해지역의 길가에 간간히 보이던 경찰의 임무는 이재민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출입을 통제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고, 구호가 아닌 질서유지에 있었다. 미얀마를 위협하는 세력은 서방이 아니라 미얀마 최고의 엘리트 그룹인 군정, 바로 그들이었다.
삶을 위협하는 국가와 군부, 그리고 자본의 결탁은 미얀마 대중의 그 어떤 민주화 시도도 용납하지 않고 민중의 삶을 배제하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데 온전히 사용되었는데, 그 폐쇄된 욕망회로의 시초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1997년, 미얀마의 인권유린을 이유로 미국이 경제봉쇄를 선언한 후 서방은 미얀마 군정을 약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이 말하는 미얀마의 인권은 자신들의 ‘이익’일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미얀마는 자신들의 글로벌 자본에 문을 열고 마음껏 이윤을 챙기도록 허락하는 미얀마이며, 인권이나 인도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시장개방을 가로막고 있는 미얀마 군정의 붕괴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호주머니를 챙기기에 바쁜 말종의 미얀마 군정과, 역시 말종의 서방 제국주의 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미얀마의 민중일 뿐이다.
발로 뛰며 쓴 아시아 현장보고서!
저자 유재현은 늘 현장에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했고, 사건 속에 있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가장 큰 피해지역인 미얀마의 이라와디 삼각주에도 있었고, 240년 동안 히말라야 왕국을 통치하던 네팔의 왕정이 붕괴될 적에도, 태국의 총리가 새롭게 선출될 적에도, 그가 국왕의 발등에 입을 맞출 적에도 있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글로 인해, 태국대사의 경고를 받고, 입국금지를 당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시아의 눈먼 이들에게 그들의 무성의와 패배주의를 경고한다. “당신들의 대사가 외국에서까지 태국과 태국인들을 모독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구차한 전근대적 추태에 대해 책임져야 할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신들이다”라고.
이 책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저자 유재현이 반 년 동안 써 내려간 아시아의 뒤집힌 민주화에 대한 기록이지만, 사실 그가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를 돌아다니고, 살핀 과거의 기록이기도 하다. 누구도 알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아시아의 현실을 들추어 내는 유재현의 날카로움은, 그가 10년 동안 지켜본 아시아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자 슬픔이고, 또한 분노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10년이 담겨 있는 ‘아시아의 지금, 여기’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따라서 여행의 기록이기도, 역사의 기록이기도, 현재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보고서가 힘을 갖는 이유는 유재현이 그 보고서를 손과 머리가 아닌 발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을 야경이 아름다운 쇼핑의 천국이 아닌 거대한 난민캠프로 볼 수 있는 것도,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가초)를 티베트의 비폭력 독립투사가 아니라 신권정치를 바탕으로 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유재현이 그렇게 아시아를 발로 쓰며, 현장에서 현실로 아시아를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아시아의 오늘’을 살펴보며 10개국을 돌아다녔던 여행 속에서 저자는 마닐라와 사이공, 프놈펜, 방콕과 카트만두, 양곤, 홍콩에 도착했을 때 어디에서 떠나 어디론가 도착했다는 느낌 대신 세계화란 포악한 힘에 강제된 기시감에 시달렸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그가 느낀 것은,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난민화하는 아시아의 공동운명에 대한 참담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운명은 너무나도 자주 촛불을 들어야 하는 한국의 우리와도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아시아의 국경은 그렇게 부서지면서 우린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 또는 더 나은 미래를 찾아 갈구하며 헤매는 부초이거나 난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에 복무하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그 속에 대중은 없다!
-민주화라는이름아래난민화를겪고있는아시아에대한가장솔직한보고서!
세계를 거칠게 나누는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사용했던 때는 이미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앞에 그 둘은 세계를 명명하는 하나의 이름이 된다. 민주주의는 대중이 아닌 자본에 복무하고, 대중을 대의한 정치에는 대중이 사라진 지 오래며, 공산당마저 일당독재를 일삼으면서 자본의 비역한 악취를 내뿜는다. 국가라는 이름을 내세워 아시아는, 아시아 인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통제하고, 그 삶의 내용까지 결정지어 버렸다. 그 결과 아시아는 현재진행형으로 난민을 양산하고 대중을 삶에서 추방하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발을 맞추고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등 아시아 10개국을 돌아다니며 아시아 인민의 삶과 정치의 현장을 발로 뛰며 쓴 저자 유재현은 이 책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재의 자리를 대신한 민주주의와 선거함은 결국 아시아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음을, 그리고 아시아 인민들은 그 민주화의 이름 속에 그저 난민화되고 있을 뿐임을 고발하고 있다.
아시아의 오늘, 무엇이 바뀌었나?
-민주화를 독재로 착각한 아시아의 모순적 현실
32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로 일관했던 독재자이자, 100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인을 죽인 도륙자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前) 대통령의 ‘죽음’으로 아시아의 ‘오늘’을 시작하고 있는 이 책은 민주화를 독재로 착각한 아시아의 모순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다. 살인자에 다름 아닌 수하르토의 죽음 앞에 슬퍼하며 조기게양까지 실시한 인도네시아 현 대통령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는, 그렇지 않아도 살기 팍팍한 인도네시아인들을 수하르토라는 죽은 개에게까지 물려뜯기게 하고 있다. 1998년 민주화시위로 내쫓긴 수하르토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금 ‘과보다 공이 컸던’ 인물로 부각되는 오늘 인도네시아의 현실은, 한국의 지난 죄 많았던 대통령들이 사면을 받고 다시 멀쩡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조금의 부족함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국이거나 인도네시아거나, 혹은 필리핀이거나 태국이거나, 이 같은 사실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이며, 이로써 보건대 대중에 대한 조롱마저도 ‘세계화’되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아시아의 오늘’인 셈이다. 그리고 조롱당한 대중은 죽은 개에게 물리면서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1998년 인도네시아인들은 32년의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한 번의 기회를 가졌다. 32년 만의 기회였다. 그 뒤 10년이 지났지만 무엇이 청산되었는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수하르토의 족벌은 여전히 천문학적인 부를 움켜쥐고 있고, 수하르토 시대에 권력을 향유했던 정치, 관료와 자본은 같은 이름이거나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의 목을 조르는 빈곤과 부정, 부패 또한 별일 없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말하자면 수하르토의 신질서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숨통을 조르고 있다.”(본문 26쪽)
-독립 이후, 신 식민지적으로 재편된 아시아의 현재
1957년, 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독립한 나라 중 하나인 말레이시아는 중국인들이 대거 참여한 말라야공산당의 투쟁을 통해 마침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은 이미 영국이 말라야연방을 통해서 공산당을 포함한 좌익을 배제하는 반공 기틀을 확고히 다진 후의 일이었다. 독립 후 반공 우익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암노(UMNO)가 영국의 지원 아래 정권을 장악했고, 그 가운데 소수계(중국계, 이슬람계) 우대정책은 무시되며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이 보존되고 널리 부흥되었다. 최근의 미미한 선거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암노의 장기집권 피로현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암노는 오랫동안 인종적 갈등을 분할통치의 기제로 활용하며 독재 권력을 유지?강화시켜 왔다. 그렇게 암노의 뒤를 지키고 있던 영국의 신 식민지적 재편은 간편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와 부미푸트라의 말레이시아」, 73쪽).
식민지 시대의 새로운 막이 열린 것은 비단 말레이시아뿐이 아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성 대통령, 아로요(Gloria Macapagal-Arroyo)는 부정선거 의혹으로 광범위한 퇴진요구를 받게 되자 미국과 군부의 의존도를 한껏 끌어올려 잔혹한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있다. 2006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편승한 아로요는 암살과 납치, 불법체포, 고문 등의 군사독재 스타일의 테러정치를 통해 ‘킬링머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필리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다(「테러의 필리핀」, 107쪽).
인구의 80%인 6천 9백만 명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해야 하는 빈곤층에 속하며 그 중 60%가 1달러 이하로 살아야 하는 절대빈곤층인 필리핀의 오늘을 극악한 봉건적 지배체제의 온존 탓으로 돌리고 있는 저자는, 역시나 필리핀의 봉건적 대지주 계급에게 식민종주국인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마닐라 만 최고의 해변부지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대사관이다. 이렇게 아시아를 말하는 데에 미국과 유럽을 빼고서는 이야기가 불가능한 현실, 그것이 바로 아시아의 오늘이다. 식민지 시대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삶’의 반대말, ‘자본’과 ‘국가’
-필리핀의 빈민촌은 서울과 다른가
이름조차 낯선 아시아 지역들에서 벌어진 일들을 따라가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익숙함과 조우하게 된다. 아시아에서 급속히 현재진행중인 대중의 추방과 난민화, 그것은 바로 한국의 모습이었고, 세계화의 수순이었다. 농사를 하며 살아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개발업체 때문에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고 또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된 필리핀 파야타 빈민촌의 사람들은(「약속의 땅 그리고 혁명」, 본문 95쪽) 개발과 자본의 논리에 밀려 집을 빼앗기는 용산 철거촌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돈 몇 푼 쥐어주고 살던 곳에서 떠나라는 통보를 받은 빈민촌 사람들은 평택 대추리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삶과, 삶의 태도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돈을 뿌리친다. “매립 후에 개발한다더군요. 주택단지나 골프장 따위를 짓겠지요. 그 작자들은 또 돈을 벌겠지요. 하지만 우린 1만 9천 페소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요. 그리고 여긴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던 곳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쓰레기 산 아래, 판잣집에서 살아가던 이는 이렇게 되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이냐고. 이건 대가를 지불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임을 자본가는 모르고 있다. 한국에서 대추리의 농민들에게 보상금을 쥐어주었던 정부와 자본가처럼 말이다.
1만 9천 페소, 우리 돈으로 치자면 60만 원에 불과한 보상금을 쥐어주고 사는 곳을 떠나라고 말하는 자본가에 대항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더라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은 필리핀의 빈민들. 한국의 2천년대와 끔찍하게 닮아 있는 필리핀 파야타 빈민촌 사람들은 자본에 농락당하고, 삶에서 추방당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비교적 민주화를 빨리 이뤄냈다고 믿고, 그들보다 선진적이라고 믿지만, 철거촌이 밀려나가는 지금의 서울을 보면서 필리핀의 빈민촌과 큰 차이를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내용을 스스로 구성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 자본에 밀려, 국가폭력에 밀려 그들은 난민이 되어 가고 있다.
-군부―국가―자본 : 욕망의 폐쇄회로
2008년 5월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휩쓸었다(「양곤 강변에서」, 219쪽). 10만 명의 사망자와 1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을 발생시킨 이 끔찍한 자연재해는 미얀마를 초토화시킨 후에야 끝이 났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잃었고, 어떤 이들은 집을 잃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생계수단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실감 속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정부는 해외구호의 통로조차 봉쇄했다. 사실상 헌법도 없이 17년 동안 무법적으로 통치 중인 미얀마 군정은 이즈음 보기 드문 말종의 군부독재정권이다. 이들은 아름드리 나무가 뽑혀나가고 집이 물에 떠내려 갈 정도의 참혹한 재해 이후에도 정치적인 논리를 들이대며 국제원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먹을 것도 입을 옷도 잠잘 곳도 없었다. 정부가 지어 놓은 몇 채 되지 않는 이재민 캠프는 그야말로 전시용에 지나지 않았다. 구호품이 들어오면 군인들이 모두 압수하기에 바빴고, 그 압수된 구호물품 중 이재민들에게 돌아갈 몫은 물론 없었다. 피해지역의 길가에 간간히 보이던 경찰의 임무는 이재민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출입을 통제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고, 구호가 아닌 질서유지에 있었다. 미얀마를 위협하는 세력은 서방이 아니라 미얀마 최고의 엘리트 그룹인 군정, 바로 그들이었다.
삶을 위협하는 국가와 군부, 그리고 자본의 결탁은 미얀마 대중의 그 어떤 민주화 시도도 용납하지 않고 민중의 삶을 배제하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데 온전히 사용되었는데, 그 폐쇄된 욕망회로의 시초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1997년, 미얀마의 인권유린을 이유로 미국이 경제봉쇄를 선언한 후 서방은 미얀마 군정을 약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이 말하는 미얀마의 인권은 자신들의 ‘이익’일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미얀마는 자신들의 글로벌 자본에 문을 열고 마음껏 이윤을 챙기도록 허락하는 미얀마이며, 인권이나 인도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시장개방을 가로막고 있는 미얀마 군정의 붕괴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호주머니를 챙기기에 바쁜 말종의 미얀마 군정과, 역시 말종의 서방 제국주의 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미얀마의 민중일 뿐이다.
발로 뛰며 쓴 아시아 현장보고서!
저자 유재현은 늘 현장에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했고, 사건 속에 있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가장 큰 피해지역인 미얀마의 이라와디 삼각주에도 있었고, 240년 동안 히말라야 왕국을 통치하던 네팔의 왕정이 붕괴될 적에도, 태국의 총리가 새롭게 선출될 적에도, 그가 국왕의 발등에 입을 맞출 적에도 있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글로 인해, 태국대사의 경고를 받고, 입국금지를 당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시아의 눈먼 이들에게 그들의 무성의와 패배주의를 경고한다. “당신들의 대사가 외국에서까지 태국과 태국인들을 모독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구차한 전근대적 추태에 대해 책임져야 할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신들이다”라고.
이 책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저자 유재현이 반 년 동안 써 내려간 아시아의 뒤집힌 민주화에 대한 기록이지만, 사실 그가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를 돌아다니고, 살핀 과거의 기록이기도 하다. 누구도 알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아시아의 현실을 들추어 내는 유재현의 날카로움은, 그가 10년 동안 지켜본 아시아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자 슬픔이고, 또한 분노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10년이 담겨 있는 ‘아시아의 지금, 여기’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따라서 여행의 기록이기도, 역사의 기록이기도, 현재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보고서가 힘을 갖는 이유는 유재현이 그 보고서를 손과 머리가 아닌 발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을 야경이 아름다운 쇼핑의 천국이 아닌 거대한 난민캠프로 볼 수 있는 것도,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가초)를 티베트의 비폭력 독립투사가 아니라 신권정치를 바탕으로 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유재현이 그렇게 아시아를 발로 쓰며, 현장에서 현실로 아시아를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아시아의 오늘’을 살펴보며 10개국을 돌아다녔던 여행 속에서 저자는 마닐라와 사이공, 프놈펜, 방콕과 카트만두, 양곤, 홍콩에 도착했을 때 어디에서 떠나 어디론가 도착했다는 느낌 대신 세계화란 포악한 힘에 강제된 기시감에 시달렸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그가 느낀 것은,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난민화하는 아시아의 공동운명에 대한 참담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운명은 너무나도 자주 촛불을 들어야 하는 한국의 우리와도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아시아의 국경은 그렇게 부서지면서 우린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 또는 더 나은 미래를 찾아 갈구하며 헤매는 부초이거나 난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목차
머리말
1_ 독재를 넘어서
왕이 되고 싶었던 독재자
수카르노와 반둥의 꿈, 아시아의 꿈
노동과 섹스의 섬
인종학살의 그늘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와 부미푸트라의 말레이시아
2_ 부서진 약속의 땅
약속의 땅 그리고 혁명
테러의 필리핀
인터뷰: 중부 루손 신인민군 최고정치위원
대사관과 코코넛 사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세부와 쿠바
3_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똑같다면
두 도시 이야기: 사이공과 프놈펜
후일담과 전쟁을 뛰어넘어: 남한과 베트남문학의 오늘과 내일
당렉산의 우울한 총성
4_ 왕과 군부는 절대 웃지 않는다
왕과 군부 그리고 자본
왕과 쿠데타의 방콕
양곤 강변에서
5_ 문제는 민주주의야
21세기 최초의 실험
샹그리라의 신권과 시장사회주의
팍섹과 까울링씽차이씽 그리고 오늘의 홍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