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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대한민국!”,“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국민 모두가 열광에 도취되어 있던 한일월드컵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이 벌어지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상에서는 북한 해군의 선제 기습공격으로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 고속정 1척이 침몰하는 국가적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토록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은 김대중 정부의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 시행으로 결코 북한의 도발이 없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과, 이에 근거한 수동적인 작전예규와 교전규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의 대북 감청정보를 담당한 5679정보부대가 6월 13일과 6월 27일 북한 8전대사령부와 북한 경비정 간에 교신한 도발정보(SI : Special Intelligence 통신감청 정보)를 감청하고 국방정보본부에 북한의 도발이 임박한 징후를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는‘발포(fire)??라는 도발용어가 무려 5회나 언급되었고 공격무기까지 거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 군 수뇌부는 예하부대에 내려 보내는 블랙북에 결정적인 도발징후 SI를 삭제한 채 전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던 것도 대북감청부대는‘의도적 침범’이라 보고했으나, 군 수뇌부가 이를 예하부대에 단순침범으로 왜곡·조작 전파함으로써 예상되는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왜 정보를 왜곡·조작 전파함으로써 이처럼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게 하였던가. 이 불행한 국가적 사건의 중심에 선 제5679정보부대장 한철용 육군소장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필마단기로 몸을 던졌으나,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은 집권당 국회의원들과 군부에 의해 군 체제에 대한 도전과 항명으로 매도되어 끝내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후 강제 전역을 당해 군에서 내쳐진다. 그러나 그에게 내린 정직 1개월의 부당한 중징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1심에서는 패소하였지만, 마침내 항소심에서 승소하여 명예를 회복하는 한편,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그때로부터 8년, 저자는 국가적 대참사인 이 사건이 피해만 큰 아픔으로 남아 있을 뿐, 사건의 진상이나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도 규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흐지부지 묻혀가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다시 한 번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민들 앞에 고발하는 고발자의 입장에서 필을 들었다. 저자는 제2연평해전의 발발 상황에서부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속기록,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 행정법원 1심과 항소심의 재판 판결문과 각 언론의 관련 기사 및 각종 정보 자료를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제시, 입증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제 국민이 배심원이 되어 내려 줄 진정한 판단만 남았다.
아울러 본 저서를 통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준전시 상황, 특히 서해상에서의 북한의 도발이 계속 자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이 국민들 앞에 소상히 밝혀짐으로써 북한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저자 인터뷰 기사>
■ 월간조선(2010년 4월호, 오동용 기자)
지난 3월 6일, 서울 송파구에서 만난 한철용 예비역 소장(이하 한철용 장군으로 표기)은 <진실은 하나,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 불의에 저항한 ‘별’(팔복원)>이란 책을 탈고(脫稿)중이었다. 그가 국감에서 “진실은 하나”라고 했던 ‘연평해전 비망록(備忘錄)’이 3월 말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산고(産苦)를 겪고 있었다. 2002년 10월 4일 국감이 끝날 무렵, 장영달(張永達) 국방위원장이 장성(將星)으로서 그의 행태에 대해 주의를 주자, 한철용 장군은 “정의와 진실이 불의에 위협받으면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받아쳤었다.
―책을 쓴 계기는.
“2005년 국방부를 상대로 한 정직처분 취소소송에 이기면서 결심을 했어요. 그때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죠. 늦둥이 외동딸(13세)이 자라 아빠가 왜 갑자기 전역을 했는지 궁금해 할 것도 같았고요. 준비만 해 오다가 8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어요, 허허.”
그는 “군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는 반역(反逆)적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라며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킨 연평해전 영웅(英雄)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장군은 정보부서에서 잔뼈가 굵었다. 제주 출신인 그는 1군단 정보참모, 연합사 정보운영실장, 육군본부 정보처장, 8사단장, 국정원 국방보좌관 등 주요 정보보직을 두루 섭렵했다. ‘노총각’으로 지내다 48세 때인 1994년 열 살 아래인 추순삼(秋順三) 국방부 여군발전단장(대령)과 결혼, 전군(全軍)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부부장교로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제2연평해전 직후인 2002년 7월 10일, 기무사령부 조사 직후 ‘정보지원 미흡’을 이유로 정보본부장, 해군작전사령관 등과 함께 국방부로부터 징계(경고)를 받았다. 그날 밤 그는 장관 측근에게 전화해 “전역하겠으며 경고장을 받으러 가지 않겠다”고 통보하는 등 크게 반발했다.
“2002년 6월 13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결정적 징후’를 보고했는데도 정보본부에선 장관 등 수뇌부 지시로 묵살했습니다. 기무사가 특별조사를 벌인다기에 ‘진상이 밝혀져 장관이나 정보본부가 어렵게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정보본부와 똑같이 경고를 받아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무사가 특수정보 기관을 조사한 것은 창설 46년 만에 처음으로, 다분히 표적수사였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무사 지적사항을 봐도 정작 문제가 컸던 정보본부에 비해 우리 부대가 훨씬 많았어요.”
한철용 전 5679부대장이 서해교전 전후 군 수뇌부의 이상징후 보고 묵살 내막과 자신의 폭탄선언 배경 등을 정리한 비망록 내용.
그는 7월 중순 기무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바로잡아 줄 것을 요구했으나 기무사는 ‘무반응’이었다. 그는 7월 22일 육군에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그의 전역지원서는 곧 반려됐으나, 일부 군 지휘부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분노는 10월 4일 국회 ‘폭탄선언’으로 터졌다.
―기밀을 누설하고 군 내 위계질서를 파괴했다는 일각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진실을 알릴 것입니다. 당시 국감장에서 블랙북을 증거로 들어올렸을 뿐, 내용은 누설하지 않았어요. 이는 법원 판결에서도 명백히 가려졌습니다.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군 수뇌부를 묵과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연평해전의 본질이 국방부 수뇌부의 북한 도발정보 묵살인데, 일부 언론과 여당(민주당)은 비밀도 아닌 ‘블랙북’를 들어 보인 것과 5679부대의 존재 노출 등 보안문제를 부각시켜 본질을 호도(糊塗)했습니다.”
―국가의 중요 군사정보 업무를 맡은 부대장이 공개적으로 국방위 국정감사를 받는 것이 국익(國益)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까요.
“그 때문에 군 수뇌부에 ‘나를 국회 증언대에 세우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제2연평해전의 책임을 실무자들에게 떠넘기고자 했던 그들은 끝내 나를 나가게 했습니다.”
한 장군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증언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국회 증언 다음날 부대장 직위에서 보직해임됐고, ‘정직 1개월’이란 ‘부상(副賞)’도 함께 받았다. 군 수뇌부는 2002년 10월 31일 그를 강제로 전역시켰다.
■ 동아일보(2006.6.29, 윤상호 기자)
―서해교전 4주년을 맞이하는 심경은….
“무고한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교전 이후 NLL 사수 의지가 더 공고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북측은 어떻게든 NLL 문제를 확대시키겠다는 전술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NLL을 북한에 양보해선 안 된다.”
―북한이 지난달 장성급 군사회담을 결렬시키면서까지 NLL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최종 목표는 서해5도를 넘보는 것이다. 유사시 아군의 북한 상륙작전을 위한 발판인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북한으로선 ‘목에 가시’다. 서해 5도만 아니면 서울 등 수도권을 쉽게 공략할 수 있다고 보고 그 사전작업으로 NLL 무력화를 고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앞으로 서해상에서 또 다른 돌출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교전 발발직전 감청한 북한군 교신내용 중 ‘8자’,‘15자’가 결정적 도발징후라고 주장했는데….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그 확신은 변함이 없다. 1990년대 중반 미국 국가안전국(NSA) 요원들은 대북감청을 하다 훈련이 아닌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향해 ‘공격’, ‘사격’이라는 용어가 포착되면 미 국방장관에게 곧바로 보고했다. 정보 임무를 수행하면서 국군을 향해 ‘사격’, ‘공격’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기습공격을 예상하고 대북감시임무에 만전을 기했다.”
―기밀을 누설하고 군내 위계질서를 파괴했다는 일각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진실을 알릴 것이며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 국감장에서 블랙북을 흔들었을 뿐 내용은 누설하지 않았다. 이는 법원 판결에서도 명백히 가려졌다.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군 수뇌부의 행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전역 직후 국방부를 상대로 정직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낸 한 씨는 2004년 10월 1심에서 패소했지만 지난해 1월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의 대북 감청정보를 담당한 5679정보부대가 6월 13일과 6월 27일 북한 8전대사령부와 북한 경비정 간에 교신한 도발정보(SI : Special Intelligence 통신감청 정보)를 감청하고 국방정보본부에 북한의 도발이 임박한 징후를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는‘발포(fire)??라는 도발용어가 무려 5회나 언급되었고 공격무기까지 거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 군 수뇌부는 예하부대에 내려 보내는 블랙북에 결정적인 도발징후 SI를 삭제한 채 전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던 것도 대북감청부대는‘의도적 침범’이라 보고했으나, 군 수뇌부가 이를 예하부대에 단순침범으로 왜곡·조작 전파함으로써 예상되는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왜 정보를 왜곡·조작 전파함으로써 이처럼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게 하였던가. 이 불행한 국가적 사건의 중심에 선 제5679정보부대장 한철용 육군소장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필마단기로 몸을 던졌으나,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은 집권당 국회의원들과 군부에 의해 군 체제에 대한 도전과 항명으로 매도되어 끝내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후 강제 전역을 당해 군에서 내쳐진다. 그러나 그에게 내린 정직 1개월의 부당한 중징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1심에서는 패소하였지만, 마침내 항소심에서 승소하여 명예를 회복하는 한편,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그때로부터 8년, 저자는 국가적 대참사인 이 사건이 피해만 큰 아픔으로 남아 있을 뿐, 사건의 진상이나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도 규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흐지부지 묻혀가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다시 한 번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민들 앞에 고발하는 고발자의 입장에서 필을 들었다. 저자는 제2연평해전의 발발 상황에서부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속기록,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 행정법원 1심과 항소심의 재판 판결문과 각 언론의 관련 기사 및 각종 정보 자료를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제시, 입증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제 국민이 배심원이 되어 내려 줄 진정한 판단만 남았다.
아울러 본 저서를 통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준전시 상황, 특히 서해상에서의 북한의 도발이 계속 자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이 국민들 앞에 소상히 밝혀짐으로써 북한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저자 인터뷰 기사>
■ 월간조선(2010년 4월호, 오동용 기자)
지난 3월 6일, 서울 송파구에서 만난 한철용 예비역 소장(이하 한철용 장군으로 표기)은 <진실은 하나,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 불의에 저항한 ‘별’(팔복원)>이란 책을 탈고(脫稿)중이었다. 그가 국감에서 “진실은 하나”라고 했던 ‘연평해전 비망록(備忘錄)’이 3월 말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산고(産苦)를 겪고 있었다. 2002년 10월 4일 국감이 끝날 무렵, 장영달(張永達) 국방위원장이 장성(將星)으로서 그의 행태에 대해 주의를 주자, 한철용 장군은 “정의와 진실이 불의에 위협받으면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받아쳤었다.
―책을 쓴 계기는.
“2005년 국방부를 상대로 한 정직처분 취소소송에 이기면서 결심을 했어요. 그때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죠. 늦둥이 외동딸(13세)이 자라 아빠가 왜 갑자기 전역을 했는지 궁금해 할 것도 같았고요. 준비만 해 오다가 8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어요, 허허.”
그는 “군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는 반역(反逆)적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라며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킨 연평해전 영웅(英雄)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장군은 정보부서에서 잔뼈가 굵었다. 제주 출신인 그는 1군단 정보참모, 연합사 정보운영실장, 육군본부 정보처장, 8사단장, 국정원 국방보좌관 등 주요 정보보직을 두루 섭렵했다. ‘노총각’으로 지내다 48세 때인 1994년 열 살 아래인 추순삼(秋順三) 국방부 여군발전단장(대령)과 결혼, 전군(全軍)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부부장교로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제2연평해전 직후인 2002년 7월 10일, 기무사령부 조사 직후 ‘정보지원 미흡’을 이유로 정보본부장, 해군작전사령관 등과 함께 국방부로부터 징계(경고)를 받았다. 그날 밤 그는 장관 측근에게 전화해 “전역하겠으며 경고장을 받으러 가지 않겠다”고 통보하는 등 크게 반발했다.
“2002년 6월 13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결정적 징후’를 보고했는데도 정보본부에선 장관 등 수뇌부 지시로 묵살했습니다. 기무사가 특별조사를 벌인다기에 ‘진상이 밝혀져 장관이나 정보본부가 어렵게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정보본부와 똑같이 경고를 받아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무사가 특수정보 기관을 조사한 것은 창설 46년 만에 처음으로, 다분히 표적수사였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무사 지적사항을 봐도 정작 문제가 컸던 정보본부에 비해 우리 부대가 훨씬 많았어요.”
한철용 전 5679부대장이 서해교전 전후 군 수뇌부의 이상징후 보고 묵살 내막과 자신의 폭탄선언 배경 등을 정리한 비망록 내용.
그는 7월 중순 기무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바로잡아 줄 것을 요구했으나 기무사는 ‘무반응’이었다. 그는 7월 22일 육군에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그의 전역지원서는 곧 반려됐으나, 일부 군 지휘부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분노는 10월 4일 국회 ‘폭탄선언’으로 터졌다.
―기밀을 누설하고 군 내 위계질서를 파괴했다는 일각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진실을 알릴 것입니다. 당시 국감장에서 블랙북을 증거로 들어올렸을 뿐, 내용은 누설하지 않았어요. 이는 법원 판결에서도 명백히 가려졌습니다.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군 수뇌부를 묵과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연평해전의 본질이 국방부 수뇌부의 북한 도발정보 묵살인데, 일부 언론과 여당(민주당)은 비밀도 아닌 ‘블랙북’를 들어 보인 것과 5679부대의 존재 노출 등 보안문제를 부각시켜 본질을 호도(糊塗)했습니다.”
―국가의 중요 군사정보 업무를 맡은 부대장이 공개적으로 국방위 국정감사를 받는 것이 국익(國益)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까요.
“그 때문에 군 수뇌부에 ‘나를 국회 증언대에 세우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제2연평해전의 책임을 실무자들에게 떠넘기고자 했던 그들은 끝내 나를 나가게 했습니다.”
한 장군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증언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국회 증언 다음날 부대장 직위에서 보직해임됐고, ‘정직 1개월’이란 ‘부상(副賞)’도 함께 받았다. 군 수뇌부는 2002년 10월 31일 그를 강제로 전역시켰다.
■ 동아일보(2006.6.29, 윤상호 기자)
―서해교전 4주년을 맞이하는 심경은….
“무고한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교전 이후 NLL 사수 의지가 더 공고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북측은 어떻게든 NLL 문제를 확대시키겠다는 전술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NLL을 북한에 양보해선 안 된다.”
―북한이 지난달 장성급 군사회담을 결렬시키면서까지 NLL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최종 목표는 서해5도를 넘보는 것이다. 유사시 아군의 북한 상륙작전을 위한 발판인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북한으로선 ‘목에 가시’다. 서해 5도만 아니면 서울 등 수도권을 쉽게 공략할 수 있다고 보고 그 사전작업으로 NLL 무력화를 고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앞으로 서해상에서 또 다른 돌출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교전 발발직전 감청한 북한군 교신내용 중 ‘8자’,‘15자’가 결정적 도발징후라고 주장했는데….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그 확신은 변함이 없다. 1990년대 중반 미국 국가안전국(NSA) 요원들은 대북감청을 하다 훈련이 아닌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향해 ‘공격’, ‘사격’이라는 용어가 포착되면 미 국방장관에게 곧바로 보고했다. 정보 임무를 수행하면서 국군을 향해 ‘사격’, ‘공격’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기습공격을 예상하고 대북감시임무에 만전을 기했다.”
―기밀을 누설하고 군내 위계질서를 파괴했다는 일각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진실을 알릴 것이며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 국감장에서 블랙북을 흔들었을 뿐 내용은 누설하지 않았다. 이는 법원 판결에서도 명백히 가려졌다.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군 수뇌부의 행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전역 직후 국방부를 상대로 정직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낸 한 씨는 2004년 10월 1심에서 패소했지만 지난해 1월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목차
제1장 제2연평해전 상황
해전 발발 개요_37
시간대별 해전 상황_39
제2장 말단 전투는 승리, 상부 작전(지휘)은 실패
해군 장병, 악전고투 속에 투혼 발휘_45
대북 송금이 포탄 되어 날아와!_48
확전 방지 집착으로 상부 작전(지휘) 실패_50
‘국민의 정부’, 해군을 정신적으로 무장 해제시켰다_56
제3장 우리 영웅들의 쓸쓸한 영결식과 유가족 이야기
우리 영웅들의 초라하고 쓸쓸한 영결식_61
중상 입은 두 영웅 문병_64
전사자 유가족을 슬프게 했던 일_67
제4장 제2연평해전 관련 정보지원 이상무
징계 불복, 전역 천명_71
전격적인 장관 교체, 사필귀정_75
정보본부장에게 도발 특이징후(‘SI 14자’) 심각성 보고_77
제5장 대북 군사위협 안이한 인식 팽배
대북 경계심 극도 이완_81
‘사진 찍듯이’ 수집보고, 사용 여부는 국방부의 권한·책임_85
6월 5차례 NLL 침범_88
제6장 한미 정보장군단 제2연평해전 관련 회의
정보본부, 우발적·경비정 단독 행위 주장_93
미군 측의 반대로 북한군 8전대 개입 결론 도출_95
8전대에서 순안비행장에 착륙한 헬기 2대의 정체는?_97
제7장 정보본부장의 조사음모와 기무사령관의 표적조사
군단 배포용 종합정보보고서에는 핵심 SI만 수록이 원칙_101
기무사사령관의 표적조사_108
국가안보와 부대 명예를 위한 정당방위_111
기무사령관에게 보낸 서한_114
제8장 언론, ‘북한 도발정보 묵살 의혹’ 처음으로 제기_117
제9장 전역지원서 제출과 정보 묵살 국감증언 이유
국방부장관, 정보보고 잘한 부하에게 책임 전가_123
진도보물탐사 특검조사, 국감증언의 간접적인 원인_129
제10장 국회 국방위 국감장에서 도발정보 묵살 공개
언론과 여·야당 의원 5679부대 매도 발언_137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 불발, 국방위에서 공개_142
국회 국방위 확인국정감사 속기록과 나의 반박_145
구속 기도 및 부대장 전격 해임_170
주객이 전도된 국가안보와 보안 문제_175
제11장 개인과 제도권의 치열한 공방
정보수정 경위서 공개_183
여·야 정치 공방_187
국방부, 5679부대 6·27 ‘단순침범’ 보고 비난공격_195
제12장 ‘양비론’의 국방부 특별조사단 발표
국방부 특별조사단 발표 내용_199
실망스러운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조사결과_204
언론 매체의 반응_206
나 5679부대장의 주장이 과장되었다고?_210
특조단 조사결과 국회 국방위 보고 국회 속기록_216
국방부장관의 도발정보 묵살 책임_238
국방부장관, 3월 NLL 관심 지대·6월 NLL 도발정보 방치_244
제13장 6·27 ‘의도적 침범’가능성 추가보고
국방부 파견단장, ‘의도적인 침범’ 추가보고_247
일간신문의 대조적인 보도_252
특조단, 6·27 ‘의도적 침범’ 추가보고 인정할 수 없다고?_255
쟁점은 ‘SI’ 삭제가 ‘단순침범’ 왜곡 판단보다 더 큰 문제_263
제14장 결정적인 도발 특이징후 SI의 실체
‘사격’·‘공격’등 도발용어는 조기경보의 핵심_271
6·13 북한군의 ‘발포(fire)’ 도발용어 수집 보고_279
북한군, 6월 27일 ‘발포(fire)’란 도발용어 3회 언급_285
이병태 전 국방부장관, ’94년 SI 관련 긴급 분석회의 소집_291
이적행위 및 살인방조_293
천용택 의원, SI 내용 공개되면 허탈할 것이라고?_297
제15장 표적징계 및 미국훈장 수여 제동
표적징계_303
항고(국방부) 기각_310
국방부, 미국훈장 수여 제동_313
육군참모총장님께 드리는 글월(제2연평해전 관련)_317
육군참모총장의 누리꾼 질의에 대한 답변_321
정치인과 연계되었다고? 나는 정치군인이 아니다_330
제16장 강제 전역과 고군분투
정부 모 기관원의 미행과 기자들의 끈질긴 인터뷰 요청_335
전역식도 없이 전역_337
나 때문에 부하 진급 탈락 가슴 아파_339
나의 어린 딸아이, 내가 좌절 못하게 잡아줘_341
탄천변 산책로는 나의 산책과 사색의 코스_344
제17장 국회 국감증언, 진급 불만 때문이라고?
연좌제로 소령 진급 두번 누락_347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급 청원 편지 쓰다_351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소령 진급_355
남이 나 대신 아파 주지 않는다_358
연좌제 피해자에 대한 단상_361
제18장 고등법원 항소 2심 승소
고등법원 항소 2심 승소_365
제19장 도발정보 묵살 관련자들이 영웅으로 둔갑_373
제20장 김 전 장관을 이적행위로 고발할 용의 없는지?_377
제21장 제2연평해전 관련 이상한 현상들의 시현_383
제22장 정보사, 항공사진 전송장비(KCITS) 차단 사건_391
제23장 까페 글 모음
김대중 정권, 북한과 내통해 무력도발 은폐 기도_399
이순신 장군을 못살게 굴었던 선조임금과 서해교전의 김대중_402
서해교전의 산 증인-한철용 소장을 기억합시다 _403
제24장 모교에 동상 세우고, NLL에 수호함으로 부활
선진국, 모교에 전사자 이름 새겨 추모_405
1번 ‘윤영하함’과 2~5번함, NLL 수호함으로 부활_410
■ “이제 독자들이 판단해 주세요”_413
■ 글을 마치면서_419
■ 참고문헌_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