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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 주에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 속에서
써 내려간 정치적 유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2005년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포스트워 1945-2005》를 씀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상아탑에 안주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불의를 목격할 때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본래적인 의미의 지식인이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고, 부시의 방어 전쟁은 그에게 정치가들의 부도덕성을 넘어 사회의 타락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이 정점에 달해 있던 2008년, 토니 주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그의 육신은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고, 의료 장비의 도움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주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육신은 “한 주에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이었다. 주트의 마지막 저서《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처럼 특수한 상황 속에서 쓰였다.
예고된 죽음을 기다리는 한 지식인의 정치적 유언의 성격을 지닌 이 책에서, 토니 주트는 단호한 어조로 규제받지 않은 자유 시장과 효율성을 기치로 내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온갖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 격차에 격렬한 분노와 슬픔을 터뜨린다. 주트는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다시 한 번 정치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삶은 어떤 종류의 국가에서 가능한가?
왜 우리는 다시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토니 주트는 만연한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극복할 대안을 찾기 위해 20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1914년 이전에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복지 국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탄생했다. 시장은 규제의 대상이 되었고,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서구의 복지 국가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번영, 평등의 확산을 가져오며 파시즘을 불러온 원동력이었던 중산층의 공포와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복지 국가를 버리고 다시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1960년대에 이르러 유럽 중산층의 가처분 소득은 1914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는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할 만큼 나이 든 자들이 보기에는 천지개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사태를 다르게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복지 국가와 그 제도들은 과거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삶의 조건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복지는 지루한 일상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변화는 좌파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시절의 개혁가들은 모두 ‘정의’, ‘기회 균등’, 혹은 ‘경제 안정’ 같은 목적을 공유했고, 이러한 목적은 공동의 노력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사회정의는 더 이상 젊은 급진주의자 세대, 이른바 ‘신좌파’를 사로잡지 못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각자의 권리와 필요였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강조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이러한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를 불러왔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감정은 확실히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신좌파의 나르시시즘은 보수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했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우파의 부활에 힘입어 공적 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패러다임이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공동선이었다면, 새로운 세계관은 마거릿 대처의 저 악명 높은 명언으로 요약되었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다.”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제 정부 자체가 문제였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불러온 자들은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미권 경제학자들이었다. 하지만 토니 주트는 무엇보다 이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자들의 사고를 분석한다. 그들은 나치의 지배를 피해 중부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일단의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조지프 슘페터, 칼 포퍼, 피터 드러커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가 파국에 이른 상황을 분석하면서, 집단적인 공포의 폭발을 촉발한 불안정한 삶의 해소를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과 사회 보장 국가의 건설을 역설했던 케인스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국가에 지나친 권력을 부여하고, 국가가 시민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도록 내버려둔 결과 파시즘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전후 복지 국가들의 대성공은 이들의 견해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복지 국가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 나치가 남긴 교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이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한 유산을 상기하라!
미국과 영국은 세계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였다. 이 두 나라는 규제 완화와 최소 국가, 감세를 바탕으로 사적 개인의 이익 추구를 미덕으로 추켜세우며 지난 30년 동안 복지 법안과 경제 관리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 왔다. 하지만 토니 주트가 구체적인 통계를 통해 보여 주는 신자유주의가 남긴 유산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지난 30년간 미국과 영국에서 불평등은 유럽 대륙 국가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심화되었고, 세대 간 계층 이동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사적 이익의 추구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도그마를 공공 정책에 가장 열심히 반영했던 이들 나라들에서는 이웃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이 두 나라에서는 유아 사망률, 기대수명, 범죄율, 재소자 비율, 정신질환, 실업, 비만, 영양실조, 십대 임신, 불법 약물 복용, 경제적 불안정, 개인 부채, 불안 등 사회 병리학적 현상들 또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났다. 놀랍게도 엄청난 국부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선진국인 미국은 소득 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지표인 지니 계수에서 중국과 거의 비슷한 수치를 드러냈다. 더구나 미국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미국인들의 기대 수명은 보스니아보다 낮고 알바니아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영국의 사례는 빈부 격차가 극심할 경우 전체 국부는 삶의 질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여 준다. 토니 주트는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목표들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목표는 바로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또한 주트는 젊은이들에게 부도덕한 정치가들과 정치의 타락상에 실망하더라도 정치를 포기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비록 도덕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린피스, 인권의 감시자, 국경 없는 의사회 등 비정부 기구에서 벌이는 활동은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트는 말한다. 대의민주주의는 정치라는 무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트에 따르면, 경제 성장을 충분히 이루어 낸 다음에야 국가가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에 나설 수 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가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과거를 무턱대고 미화하는 것보다 혹은 과거를 무조건 끔찍한 시절로 폄훼하는 것보다 더 나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다.” 과거는 미래보다 더 밝은 빛 아래 놓여 있다. 토니 주트가 무엇보다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은 전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되었던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이 그들에게 일종의 안내인 역할을 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비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유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오직 이리저리 해석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토니 주트가 사회에 남긴 마지막 전언이다.
써 내려간 정치적 유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2005년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포스트워 1945-2005》를 씀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상아탑에 안주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불의를 목격할 때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본래적인 의미의 지식인이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고, 부시의 방어 전쟁은 그에게 정치가들의 부도덕성을 넘어 사회의 타락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이 정점에 달해 있던 2008년, 토니 주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그의 육신은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고, 의료 장비의 도움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주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육신은 “한 주에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이었다. 주트의 마지막 저서《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처럼 특수한 상황 속에서 쓰였다.
예고된 죽음을 기다리는 한 지식인의 정치적 유언의 성격을 지닌 이 책에서, 토니 주트는 단호한 어조로 규제받지 않은 자유 시장과 효율성을 기치로 내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온갖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 격차에 격렬한 분노와 슬픔을 터뜨린다. 주트는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다시 한 번 정치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삶은 어떤 종류의 국가에서 가능한가?
왜 우리는 다시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토니 주트는 만연한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극복할 대안을 찾기 위해 20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1914년 이전에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복지 국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탄생했다. 시장은 규제의 대상이 되었고,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서구의 복지 국가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번영, 평등의 확산을 가져오며 파시즘을 불러온 원동력이었던 중산층의 공포와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복지 국가를 버리고 다시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1960년대에 이르러 유럽 중산층의 가처분 소득은 1914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는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할 만큼 나이 든 자들이 보기에는 천지개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사태를 다르게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복지 국가와 그 제도들은 과거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삶의 조건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복지는 지루한 일상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변화는 좌파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시절의 개혁가들은 모두 ‘정의’, ‘기회 균등’, 혹은 ‘경제 안정’ 같은 목적을 공유했고, 이러한 목적은 공동의 노력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사회정의는 더 이상 젊은 급진주의자 세대, 이른바 ‘신좌파’를 사로잡지 못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각자의 권리와 필요였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강조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이러한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를 불러왔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감정은 확실히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신좌파의 나르시시즘은 보수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했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우파의 부활에 힘입어 공적 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패러다임이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공동선이었다면, 새로운 세계관은 마거릿 대처의 저 악명 높은 명언으로 요약되었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다.”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제 정부 자체가 문제였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불러온 자들은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미권 경제학자들이었다. 하지만 토니 주트는 무엇보다 이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자들의 사고를 분석한다. 그들은 나치의 지배를 피해 중부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일단의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조지프 슘페터, 칼 포퍼, 피터 드러커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가 파국에 이른 상황을 분석하면서, 집단적인 공포의 폭발을 촉발한 불안정한 삶의 해소를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과 사회 보장 국가의 건설을 역설했던 케인스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국가에 지나친 권력을 부여하고, 국가가 시민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도록 내버려둔 결과 파시즘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전후 복지 국가들의 대성공은 이들의 견해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복지 국가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 나치가 남긴 교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이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한 유산을 상기하라!
미국과 영국은 세계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였다. 이 두 나라는 규제 완화와 최소 국가, 감세를 바탕으로 사적 개인의 이익 추구를 미덕으로 추켜세우며 지난 30년 동안 복지 법안과 경제 관리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 왔다. 하지만 토니 주트가 구체적인 통계를 통해 보여 주는 신자유주의가 남긴 유산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지난 30년간 미국과 영국에서 불평등은 유럽 대륙 국가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심화되었고, 세대 간 계층 이동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사적 이익의 추구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도그마를 공공 정책에 가장 열심히 반영했던 이들 나라들에서는 이웃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이 두 나라에서는 유아 사망률, 기대수명, 범죄율, 재소자 비율, 정신질환, 실업, 비만, 영양실조, 십대 임신, 불법 약물 복용, 경제적 불안정, 개인 부채, 불안 등 사회 병리학적 현상들 또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났다. 놀랍게도 엄청난 국부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선진국인 미국은 소득 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지표인 지니 계수에서 중국과 거의 비슷한 수치를 드러냈다. 더구나 미국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미국인들의 기대 수명은 보스니아보다 낮고 알바니아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영국의 사례는 빈부 격차가 극심할 경우 전체 국부는 삶의 질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여 준다. 토니 주트는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목표들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목표는 바로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또한 주트는 젊은이들에게 부도덕한 정치가들과 정치의 타락상에 실망하더라도 정치를 포기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비록 도덕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린피스, 인권의 감시자, 국경 없는 의사회 등 비정부 기구에서 벌이는 활동은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트는 말한다. 대의민주주의는 정치라는 무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트에 따르면, 경제 성장을 충분히 이루어 낸 다음에야 국가가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에 나설 수 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가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과거를 무턱대고 미화하는 것보다 혹은 과거를 무조건 끔찍한 시절로 폄훼하는 것보다 더 나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다.” 과거는 미래보다 더 밝은 빛 아래 놓여 있다. 토니 주트가 무엇보다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은 전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되었던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이 그들에게 일종의 안내인 역할을 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비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유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오직 이리저리 해석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토니 주트가 사회에 남긴 마지막 전언이다.
목차
감사의 말
서문 혼돈에 빠진 사람들
1.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2. 잃어버린 세계
3.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
4. 그 모든 것과의 작별?
5. 무엇을 할 것인가?
6. 도래할 미래의 양상
맺음말 더 나은 삶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