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리딩
- 대등서명
- Reading
- 개인저자
-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알마 출판사, 2013
- 형태사항
- 533 p. ; 23 cm
- ISBN
- 9788994963983
- 청구기호
- 121 히819ㄹ
- 일반주기
- 색인수록 원저자명: Christopher Hitchens
- 서지주기
- 색인 수록
- 주제
- 지식론[知識論]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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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4655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4655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기획 의도
저널리즘 서평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다
모든 글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쓰인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글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매일의 구체적인 시간과 밀착되어 있는 저널리즘적인 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히친스가 다소 씁쓸하게 회상하는 거만한 고전 과목 선생님처럼 “그 사람의 글이 다소 ‘기자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학생?”이라고 경멸조로 말하는 것의 배경에는 그러한 인식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히친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중얼거렸다고 한다. “에밀 졸라-기자. 찰스 디킨스-기자. 토머스 페인-역시 기자. 마크 트웨인.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오웰-최고의 기자.”(71쪽)
이 책 《리딩》은 저자의 그런 오랜 중얼거림 혹은 주문의 산물이다. 모두 서른여덟 편의 독립된 에세이는 비록 시간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책’을 대상으로 하기는 하지만, 대개 저널리즘의 장에서 발표된 글이기 때문이다. 다른 단행본의 서문으로 썼던 네 편을 제외한 나머지 글은 주로 1857년 보스턴에서 창간된 미국의 일류 문예잡지〈애틀랜틱〉(23편)에서 발표한 것들이고, 그 밖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가디언〉〈타임스〉〈뉴스위크〉〈배너티 페어〉 등 영미권 유수의 매체에 기고되었던 다양한 서평이 책을 빼곡히 채운다. 히친스는 고전 선생님이 틀렸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의 마모를 질기게 버텨내는 저널리즘 서평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도서 내용의 단순한 요약도 아니고, 대상 도서보다 자신의 생각에 더 관심이 많은 사적인 독서일기도 아니다. 해당 책과 저자가 위치하는 맥락을 넓은 지적 지평 아래 상세히 펼쳐 보이고, 아이러니와 모순과 풍자적 요소가 가득한 신선한 일화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는가 하면, 책으로부터 진정 성찰한 만한 주제를 적재적소에 제시한다. 그래서 《리딩》에 실린 서평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이 대략 15년 전인 1999년에 쓰였음에도, 전혀 낡거나 진부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주례사 비평’의 함정을 넘어서
히친스는 생전에 영미권 최고의 비평가이자 논쟁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종교의 위선과 기만을 드러낸 대표작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그의 솔직함과 가차 없는 태도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직설적 면모는 《리딩》의 에세이들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를테면 “여러분의 서재에서 앨런 불록, 요아힘 페스트, 휴 트레버 로퍼가 쓴 히틀러 전기는 모두 내다 버려도 상관없다. 그러고 나서 비교적 짧은 책인 《히틀러의 의미》만 읽으면 된다”(458쪽)고 과감하게 호불호를 가르는가 하면, “(우드하우스 전기 작가인) 맥크럼은 여기에서도 우드하우스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 초기에 거리에서 연설하던 사람에게 강한 흥미를 품었다는 증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다”(200쪽)라며 해당 책의 저자가 놓치고 있는 것을 조용히 나무라기도 한다. 대가 오웰이라고 해서 히친스의 눈이 마냥 부드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히친스는 오웰의 《동물농장》이 “러시아의 1917세대의 운명을 따라”(143쪽)가는 뛰어난 소설임을 인정하면서도, 한 가지 결정적 모순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동물농장》에) 한 가지 빠진 부분이 눈에 확 띈다. 스탈린 돼지와 트로츠키 돼지는 있는데 레닌 돼지는 없다는 사실이다.”(144쪽)
위의 예에서 《동물농장》 리뷰의 경우, 히친스의 글은 단행본 ‘서문’의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그나마 저널리즘의 공간은 출판사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책의 결점을 지적하는 데 비교적 부담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어떤 책의 서문에서 바로 그 책을 비판하는 것은 퍽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여러 복잡한 관계에 대한 고려는 물론, 자신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믿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많은 수의 비평이 중요한 지점에서 머뭇거리고, 얼버무리고, 심지어는 되레 ‘긍정의 힘’을 난데없이 발휘하는 것은 성실한 독자를 맥 빠지게 한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비평문화의 쇠퇴와 출판물 질의 저하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되는 첩경이다. 고리를 풀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때는 그것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있다. 그런 점에서 히친스의 위선에 대한 예리한 조롱은 한국의 무기력한 비평문화에 적어도 작은 칼집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은 사랑
“셰익스피어나 엘리엇이 인간의 성격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었”(65쪽)던 것처럼, 저자는 저널, 그리고 비평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가차 없이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간다. 거침없이 발언하는 그에게 중요한 주제 하나는 당연히 ‘표현의 자유’였다. 히친스는 선배 기자 마르크스를 호출해 ‘표현의 자유’라는 박제된 표현에 숨을 불어넣는다. “괴테가 말하길, 화가는 진짜 인간에게서 보고 사랑을 느낀 아름다움만을 성공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 또한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된 사람만이 지킬 수 있다.”(74쪽)
히친스가 그렇게 확보된 자유의 그늘 아래에서 하려는 것은 무엇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 책 《리딩》 2부의 제목은 ‘전체주의의 유산’으로서, 전체주의와 관련한 여러 논점이 서평 형식으로 담겨 있다. 히친스는 1949년생으로, 독일 헬무트 콜 총리가 솔직하게 말했던 것처럼 “늦게 태어난 은총”(502쪽)을 타고난 세대이지만, 인간을 비참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가장 큰 위협으로 ‘전체주의’를 꼽고 이에 천착했지 싶다. 사실 1부 ‘절충적 유사성’에 실린 상당수의 리뷰도 전체주의와 관련된 내용이다. 사실 전체주의는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대표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와 파시스트를 꼽을 수 있지만, 다른 많은 역사적·사회적 흐름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히친스는 종교적 독단주의도 단호하게 전체주의의 하나로 보는 것 같다. 그가 이슬람 독재정권이나 테러리스트에 민감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북한을 거론할 때는 마치 혐오스러운 바퀴벌레를 지나치듯 한다. 원서 《ARGUABLY》의 분권 첫째 권인 《논쟁》과 함께 둘째 권인 《리딩》을 읽으면 그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히친스의 마지막 에세이 선집이 한국어판으로 완결되었다. 2011년 12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이 책에 실린 글 일부를 마지막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투병 중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리딩》에서 가장 늦은 2011년에 쓰인 글의 흐름이 흥미롭다. 필립 라킨의 《모니카에게 보내는 편지》 서평인데, 본문 대부분은 시인 라킨의 일탈적인 행위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에 할애된다. “라킨은 … 포르노그래피를 거의 영웅적인 수준으로 소비했으며, 사도마조히즘적인 공상의 아마추어 창작자였다.”(284쪽) 그러다가 돌연 끝부분에서 라킨의 연꽃 같은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의 거의 본능적인 거의 진실:/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라는 것.”(291쪽) 더러움, 그리고 사랑. 히친스가 삶을 마무리하던 해에 던진 메시지다.
[책 속으로]
1부 절충적 유사성
중력의 결함: 피터 애크로이드의 《뉴턴》
전설에 따르면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꼼꼼하게 연구하는 사람이었으며, 퀴리 부인이 라듐을 연구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빛과 색깔을 구분하고 싶다는 의욕이 넘친 나머지, 그는 한 눈으로 태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실험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눈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실험을 마친 뒤 시력 회복을 위해 사흘 동안 어두운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빛이 에테르(ether, 빛을 파동으로 볼 때 이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로 생각되었던 가상의 물질. 간섭계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는 부정되었으므로 더이상 논의되지 않는다―옮긴이)를 통과할 때 ‘압력체’로써 박동한다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내 눈과 뼈 사이로 눈 뒤편까지 최대한 가까이” 커다란 바늘을 찔러 넣었다. “거의 집착에 가까울 만큼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성격인 그는 시력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고 그 실험 결과를 관찰하기 위해 망막의 곡률을 바꾸려 시도했다.”_14쪽
악마와 사전: 피터 마틴의 《새뮤얼 존슨 전기》
우리가 데이비드 흄과 새뮤얼 존슨의 마지막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보스웰의 관대함과 호기심 덕분이다. 존슨이 그토록 싫어했던 미국 독립운동이 시작된 1776년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리에 누워 있던 흄은 보스웰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자신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존슨은 흄의 이 차분한 발언을 전해 듣고는 믿지 않으려 했다(나는 여기에서 헤스케스 피어슨의 설명을 따르고 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많은 영웅들이 기독교의 도움 없이도 금욕적인 자세로 죽음을 맞았다는 보스웰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뒤 애덤 스미스와 만났을 때 스미스가 보스웰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보증하자, 존슨은 스미스에게 큰 소리로 거짓말이라고 외쳤고 스미스는 냉정한 태도로 존슨에게 “개자식”이라고 응수했다. 존슨이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의 저자인 스미스와 이러한 충돌을 벌인 것을 보면, 나중에 매콜리가 그는 “모든 편협한 주장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아주 명확히 가려낼 수 있었으나 자신의 편협함만은 예외였다”고 평가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_54쪽
디킨스의 어두운 면: 마이클 슬레이터의 《찰스 디킨스》
하지만 디킨스가 앤젤라 버뎃 쿠츠에게 쓴 편지에서 1857년의 인도 반란에 관해, 만약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면 “자비를 발휘한 재빠른 처형으로… 지표면에서 [이 사람들을] 말살해버리겠다”고 쓴 것은 무슨 수로 변명할 수 있을까? 슬레이터는 이 문장을 간단히 줄여서 언급할 뿐이지만, 애크로이드는 편지 내용 중에서 그보다 더 고약한 부분을 좀더 자세히 인용한 뒤 이런 말을 덧붙인다. “위대한 소설가가 인종학살을 권고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디킨스와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이 흔했다고 말하는 것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에어Eyre 총독이 1865년에 자메이카에서 소름 끼치는 잔인성을 발휘해 반란을 진압했을 때, 디킨스와 칼라일은 그의 사디즘에 따스한 박수를 보냈지만 존 스튜어트 밀과 토머스 헉슬리는 에어를 소환해 의회에 출석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애크로이드는 이 사실 역시 분명히 언급했지만, 슬레이터는 빠른 속도로 휙 지나쳐버린다._68쪽
마르크스의 저널리즘 그럽 거리 시절: 카를 마르크스의 《뉴욕 트리뷴에 보낸 기사들: 카를 마르크스의 기사 선집》
마르크스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 보인 애정은 단순히 플라토닉한 수준 이상이었다. 얼마 뒤 <라이니셰 차이퉁>의 부장이 된 그는(부장급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재능을 미처 꽃피우지 못한 유망한 작가들이 몇 명이나 될까?) 자유로운 탐구라는 이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연결시킨 폭로 기사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라인란트의 주민들은 수세대 전부터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주워 장작으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기본적인 생필품을 이렇게 주워 쓰는 행위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선포한다(인클로저운동과 비슷한, 전통에 대한 공격이다). 이 범죄에 대한 처벌은 주민들이 공짜로 주워 간 나무의 ‘평가액’에 따라 달라지며, 자연의 힘으로 저절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의 ‘소유주’라는 사람들이 처벌을 결정할 것이다._74쪽
강도가 조금 덜하기는 해도, 그릴리의 딜레마에도 공감할 수 있다. 의욕과 포부가 넘치는 기자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되는 글을 팔아야 하는 덫에 붙들려 있고, 신문의 소유주는 경쟁지(<뉴욕 트리뷴>의 경우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의 비용 절감 전쟁에 붙들려 있다. 마르크스는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괴로운 일들에 관해 “구빈원의 빈민들처럼 뼈를 갈아 그것으로 수프를 끓이는 것”과 같다고 자기혐오적인 글을 썼다. 한편 그릴리는 <뉴욕 타임스>의 끝장을 보자는 식의 무시무시한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우리를 너무 밀어대고 있다…. 그 어떤 신문도 이렇게 원칙 없이 교활하기만 한 술책을 부린 적이 없다. 어떤 문제에서든 대중적인 면만을 항상 지켜보다가 노예제도 폐지론자, 여성운동가 등을 더할 나위 없이 매도하는 방식으로 많은 친구를 만들었다….” 나는 맨해튼 중심부에서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그릴리 광장을 지나 이 도시를 지배하는 상징적 신문이 된 <뉴욕 타임스>의 본사를 향해 걸을 때마다 장차 《자본론》을 쓸 인물을 그토록 가난으로 몰아넣었던 그 옛날의 신문사 경쟁을 떠올리곤 한다._76쪽
르네상스를 감히 예언하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한 가지 빠진 부분이 눈에 확 띈다. 스탈린 돼지와 트로츠키 돼지는 있는데 레닌 돼지는 없다는 사실이다. 《1984년》에도 스탈린을 상징하는 빅브라더와 트로츠키를 상징하는 엠마누엘 골드스타인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지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도 이 사실을 지적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인데도 나 역시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알아차렸다). 1930년대와 1940년대, 그리고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레닌의 혁명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였는지를 놓고 대단히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트로츠키가 정권을 잡았다면 과연 스탈린보다 나았을지 추측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웰은 대체적으로 트로츠키파에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판 공산주의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기존의 것보다 반드시 더 나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오웰은 아마도 이야기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그답지 않게 이처럼 뻔히 보이는 모순을 그냥 넘겨버리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해한 전원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 속에 잠재된 위험하고 파괴적인 가능성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검열을 피하지는 못했다._144쪽
이 소설이 하마터면 출판되지 못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히틀러의 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이 작품의 원고는 T. S. 엘리엇의 사무실로 보내졌다. 엘리엇은 당시 업계 최고의 출판사이던 페버&페버의 중요한 편집자이자 오웰에게 호의를 품은 지인이었으며,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반동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보수파에 속했다. 그러나 영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은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는 이 작품이 지나치게 “트로츠키적”이라며 출판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오웰에게 돼지를 통치자로 선택한 것이 안타깝다면서, 독자들이 “좀더 공공정신이 투철한 돼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뉴욕의 다이얼출판사가 오웰의 작품을 거절하며 한 얼간이 같은 말에 비하면 엘리엇의 말은 나은 편이었다. 다이얼출판사는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미국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고 오웰에게 엄숙히 알려왔다. 디즈니의 나라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_145쪽
스파이 스릴러의 아버지: 앤드루 로니의 《존 버컨: 장로교를 믿는 기사》
니얼 퍼거슨이 최근에 내놓은, 대영제국에 관한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제국이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일깨워준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제국의 병사, 광부, 선박 기관장 가운데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스타트렉Star Trek>에 스코티Scotty[<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우주선 엔터프라이즈 호의 기관장―옮긴이]를 등장시킨 것이 이 위대한 전통에 바치는 헌사라는 주장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는 식민지들도 여러 곳 있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뉴질랜드나 캐나다에 가면 스코틀랜드 건축 양식과 교육과 종교적 유산의 영향이 반드시 눈에 들어온다. 말레이시아의 캐머론 하이랜즈Cameron Highlands와 말라위의 블랜타이어Blantyre 시에서도 스코틀랜드의 영향이 여러 면에서 확연히 눈에 띈다. 심지어 남북전쟁 때 남부연방의 전투 깃발에도 성 앤드루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최근에 내가 읽은 글 중에서 텍사스의 혁명을 다룬 글에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옮긴이)의 시에서 따온 감동적인 구절이 혁명의 주장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자가 이 시구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맥락 속에서 독자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더욱 인상적이다._231쪽
이런 세상에: 노먼 셰리의 《그레이엄 그린의 생애, 2권, 1955~1991》
‘반미’라는 용어는 느슨한 개념으로 느슨하게 사용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미국 문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멸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누구든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면 반미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정의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느슨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작가가 미국이 베트남에서 식민주의적 면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더니 나중에 나이를 먹은 뒤에는 파나마의 노리에가처럼 미국에 저항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면 그는 반미주의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그의 주장 역시 대체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만큼 아이러니하지 않다. 지하드가 세계화된 이 시대에는 말이다(물론 지하드는 ‘세계화’와 미국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린이 모든 예술 분야 중에서 가장 미국적인 분야인 영화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아이러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소설과 ‘오락물’로 구분한 것은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누가 봐도 돈이 목적인 영화의 대본을 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마련한 방편이었다._254쪽
파국주의자: J. G. 밸러드의 《J. G. 밸러드의 완전한 이야기들》
이른바 과학소설(이 장르의 열렬한 숭배자들은 이 장르를 ‘SF’라고 부를 것인지, 아니면 ‘사이파이sci-fi’라고 부를 것인지를 놓고 무의미한 불화를 빚고 있다)을 처음부터 항상 싫어하고 불신해온 나는 킹즐리 에이미스가 밸러드에게 “H. G. 웰스의 후계자들 중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보낸 뒤에도 절대 감동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우주는 그 자체로서 너무나 복잡하고 무섭고 인상적인 곳이기 때문에 외계인이나 초강력 무기 같은 유치한 첨가물들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C. S. 루이스조차 행성 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장르에 손을 댔을 때는 평소보다 거짓된 글을 쓸 정도였다. 에이미스 부자 중 아들 쪽(이번 선집에 대단히 명료한 서문을 기고했다)은 30년쯤 전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지루하게 계속 늘어놓는 것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내게 《익사한 세계The Drowned World》《영원의 날The Day of Forever》을 건네주었다. 색다른 리듬을 맛보라는 뜻에서 《크래시Crash》도 주었다. 이 중 한 권만 읽었어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_322쪽
생생했던 소년: J. K. 롤링의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롤링보다 더 위대한 작가들, 특히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사람들도 이야기의 결말을 맺으려 할 때 똑같은 딜레마를 겪었다. 그리고 롤링은 코난 도일처럼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영웅과 악당에 대한 섬세한 캐리커처를 제공하고, 킹즈크로스 역을 근처의 베이커 거리에 있는 어떤 주소만큼이나 빛나는 소설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별도의 세계를 창조해서 상상력으로 그 모습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채워 넣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작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옛날에 여덟 살 때 정말로 증기기차를 타고 기숙학교에 갔던 사람으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다가 다이애건 앨리나 그리몰드 광장이 나오는 대목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내가 아는 신랄한 교사들(과 해리의 이모네 식구들 같은 사람들)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떠는 것도 즐거웠다. 이 소설의 확실히 감상적인 결말이 어쩌면 속편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는 속편이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장난감들은 이미 상자 속에 정리되어 있고, 마법의 지팡이도 접혀 있으며, 아이들이 새로운 재미를 찾아 아우성을 치는 동안 마술사들은 조심스레 보수를 받아 챙기고 있다(아이들에게 이제는 필립 풀먼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악마 설정은 그 어떤 패트로누스보다도 훌륭하다). 마지막 장의 제목처럼 ‘19년 뒤’, 그리고 그 후로도 수십 년이 흐른 뒤까지도 밤에 해리를 잠깐 만난 덕분에 문학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회고할 어른이 수백만 명이나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업적이다._354쪽
2부 전체주의의 유산
한 사람의 운명: 올리비에 토드의 《말로: 일생》
이사야 벌린은 내가 결코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어떤 인물에 대해 “아주 희귀한 존재, 순전히 허풍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치명적으로 보이는 이 비판에 마지못한 찬탄이 조금 틀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리비에 토드의 신작 전기 《말로: 일생》의 어조다(조지프 웨스트가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앙드레 말로는 20세기에 가장 많은 이미지로 자신을 꾸며낸 인물 중 하나다. … 말로도 워낙 몽상가였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에도 상당한 금액을 지불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오쩌둥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냈다. 스페인 내전 때 자신이 수행한 역할도 과장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찬란한 과거도 꾸며냈다. 뛰어난 사기꾼들이 모두 그렇듯이, 말로도 딱 알맞은 시기에 딱 알맞은 장소에 나타나는 요령이 있었다. 훌륭한 사람들과 어떻게든 친분을 맺는 재주도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해리 플래시맨의 프랑스판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말이 빠르고 변화무쌍하며,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영광을 둘러쓰고 있고, 많은 약탈당한 식민지들에 대해 화려하게 윤색된 여행담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점이 비슷했다._385~386쪽
열성분자: 마이클 스캐멀의 《쾨슬러: 20세기 회의주의자의 문학적, 정치적 오디세이》
쾨슬러는 신파적이기는 해도 고상한 방식으로 발터 베냐민과 함께 일종의 자살 리허설을 한 적이 있다. 게슈타포에게 생포되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그는 베냐민이 준 알약을 갖고 있었고, 베냐민은 며칠 뒤 스페인 국경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알약을 삼켰다). 이에 비해 그가 1983년에 실행한 자살에는 화려한 면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건강했던 아내 신시아까지 존재의 소멸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했던 것 같다. 어쩌면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했는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세사라니의 이전 연구는 쾨슬러가 아내들과 그 밖의 여성들(다른 사람들의 아내들은 말할 것도 없다)을 냉혹하게 대한 것에 대해 선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무섭게 파고들었다. 쾨슬러가 강박적으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과정에서(시몬 드 보부아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신체적인 강압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스캐멀은 이 대목에서 최선을 다해 정상참작을 호소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확연하다. 초자연적인 우연과 개입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바로 우주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을 남몰래 품고 있는 것처럼, 열등감을 지나치게 보상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거대한 자존심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필요하지만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해버린다. 적어도 쾨슬러의 경우에는, 그의 생애를 생각할 때 비극적인 느낌이 난다. 고상한 정신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_400~401쪽
페르시아 버전: 《기묘한 시대입니다, 그대여: 당대 이란 문학의 PEN 선집》
이란의 문화와 활기를 계속 유지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작가들과 영화인들이다(영화감독-시인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처럼 둘을 모두 겸하는 사람도 있다). 지속적인 압박은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져 체제의 틈새를 찾고, 한계를 시험하고, 초월하게 해준다. 신정神政의 캘리밴(Caliban,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노예―옮긴이)들이 거울을 보면서(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다) 항상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부르봉 왕가 사람들이 고야가 자신들을 그린 완전무결한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서글퍼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들은 이 나라에 영화산업, 출판사, 신문 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은 술에서부터 섹스에 이르기까지 ‘법에 어긋나는’ 주제들을 모조리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인의 눈에 단색으로만 보이는 이 나라의 모습에서 흔히 간과되는 어떤 것을 잘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조로아스터교 신자, 아제르바이잔인 등 이란 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것이다(이 선집은 더 많은 목소리를 기대할 수도 있는 소수집단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지만, 로야 하카키안의 작품은 포함되어 있다. 혁명기에 유대인으로서 보낸 어린 시절을 뜨겁지만 부드럽게 묘사한 그의 회고록 《부정의 땅을 떠나온 길Journey from the Land of No》은 그 자체로 망명 문학 르네상스의 보석 같은 작품이다)._419~420쪽
‘그를 상상하며: 이언 커쇼의 <히틀러 1889~1936: 오만>’
우리가 히틀러를 생각하면서 여전히 움찔거린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자신의 지성과 인격이 모욕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아직도 총통에게 계속 매혹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인 걸까? 상황이 달랐다면 그가 그저 지루하고 성가신 보통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쾌하기 때문인걸까? 그는 진부하고 편협하고 예의 바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마인 캄프》의 문장은 너무 거만해서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다. 하지만 캐리커처와 경멸로 그를 어리석은 인물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는 어찌 된 영문인지 항상 실패로 끝난다. … P.G. 우드하우스는 1937년에 발표한 멀리너 이야기에 “독일의 상황”에 대해 주점에서 열띤 토론이 일어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여기에서 생각이 깊은 누군가가 말한다. 히틀러가 곧 어느 쪽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문제를 피할 길은 없었다. “수염이 자라게 내버려두든지, 아니면 깎아버려야 할걸.” 하지만 이런 식의 반항적 재치나 조롱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면, 애당초 ‘악의 문제’나 히틀러 문제 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_453쪽
독일을 위한 진혼곡: W. G. 제발트의 《파괴의 자연사에 대하여》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인들은 왜 수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라의 훌륭한 도시들과 교회들과 기념물들이 사라져버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기분을 느껴야 할까? 많은 영국인들이 쓸데없는 파괴와 만행이 자행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일과의 공중전 계획을 수립했으며 별명이 ‘폭격기’였던 아서 해리스 공군 원수의 동상이 10년 전 런던에서 제막될 때 지면과 거리에서 강력한 시위가 벌어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제발트의 글을 살펴보던 나는 그가 “말살 전쟁”이란 말을 냉담하게 하는 부분에서 잠깐 흠칫했다. 그가 노위치 “습격”을 유감스러워하는 것보다 루프트바페 소속의 승무원들을 애도하는 마음이 조금 더 큰 듯한 부분에서도 조금 움찔했다. 내가 섬나라 근성 때문에, 또는 내 나라 사람만 생각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고故 하인리히 뵐은 아들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동포인 독일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1945년 4월의 일을 ‘패배’로 묘사하는지, 아니면 ‘해방’으로 묘사하는지를 보면 언제나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마스 만과 빅터 클렘페러는 이 점에 대해 상당히 단호해서, 제발트가 왠지 입에 담을 수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재앙에 관한 글까지 썼다(클렘페러는 그 재앙을 직접 겪기까지 했다). 그래도 독일에서 나치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작품과 생각을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독일 문화와 전통을 인정하는 척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_504쪽
저널리즘 서평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다
모든 글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쓰인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글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매일의 구체적인 시간과 밀착되어 있는 저널리즘적인 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히친스가 다소 씁쓸하게 회상하는 거만한 고전 과목 선생님처럼 “그 사람의 글이 다소 ‘기자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학생?”이라고 경멸조로 말하는 것의 배경에는 그러한 인식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히친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중얼거렸다고 한다. “에밀 졸라-기자. 찰스 디킨스-기자. 토머스 페인-역시 기자. 마크 트웨인.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오웰-최고의 기자.”(71쪽)
이 책 《리딩》은 저자의 그런 오랜 중얼거림 혹은 주문의 산물이다. 모두 서른여덟 편의 독립된 에세이는 비록 시간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책’을 대상으로 하기는 하지만, 대개 저널리즘의 장에서 발표된 글이기 때문이다. 다른 단행본의 서문으로 썼던 네 편을 제외한 나머지 글은 주로 1857년 보스턴에서 창간된 미국의 일류 문예잡지〈애틀랜틱〉(23편)에서 발표한 것들이고, 그 밖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가디언〉〈타임스〉〈뉴스위크〉〈배너티 페어〉 등 영미권 유수의 매체에 기고되었던 다양한 서평이 책을 빼곡히 채운다. 히친스는 고전 선생님이 틀렸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의 마모를 질기게 버텨내는 저널리즘 서평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도서 내용의 단순한 요약도 아니고, 대상 도서보다 자신의 생각에 더 관심이 많은 사적인 독서일기도 아니다. 해당 책과 저자가 위치하는 맥락을 넓은 지적 지평 아래 상세히 펼쳐 보이고, 아이러니와 모순과 풍자적 요소가 가득한 신선한 일화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는가 하면, 책으로부터 진정 성찰한 만한 주제를 적재적소에 제시한다. 그래서 《리딩》에 실린 서평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이 대략 15년 전인 1999년에 쓰였음에도, 전혀 낡거나 진부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주례사 비평’의 함정을 넘어서
히친스는 생전에 영미권 최고의 비평가이자 논쟁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종교의 위선과 기만을 드러낸 대표작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그의 솔직함과 가차 없는 태도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직설적 면모는 《리딩》의 에세이들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를테면 “여러분의 서재에서 앨런 불록, 요아힘 페스트, 휴 트레버 로퍼가 쓴 히틀러 전기는 모두 내다 버려도 상관없다. 그러고 나서 비교적 짧은 책인 《히틀러의 의미》만 읽으면 된다”(458쪽)고 과감하게 호불호를 가르는가 하면, “(우드하우스 전기 작가인) 맥크럼은 여기에서도 우드하우스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 초기에 거리에서 연설하던 사람에게 강한 흥미를 품었다는 증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다”(200쪽)라며 해당 책의 저자가 놓치고 있는 것을 조용히 나무라기도 한다. 대가 오웰이라고 해서 히친스의 눈이 마냥 부드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히친스는 오웰의 《동물농장》이 “러시아의 1917세대의 운명을 따라”(143쪽)가는 뛰어난 소설임을 인정하면서도, 한 가지 결정적 모순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동물농장》에) 한 가지 빠진 부분이 눈에 확 띈다. 스탈린 돼지와 트로츠키 돼지는 있는데 레닌 돼지는 없다는 사실이다.”(144쪽)
위의 예에서 《동물농장》 리뷰의 경우, 히친스의 글은 단행본 ‘서문’의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그나마 저널리즘의 공간은 출판사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책의 결점을 지적하는 데 비교적 부담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어떤 책의 서문에서 바로 그 책을 비판하는 것은 퍽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여러 복잡한 관계에 대한 고려는 물론, 자신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믿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많은 수의 비평이 중요한 지점에서 머뭇거리고, 얼버무리고, 심지어는 되레 ‘긍정의 힘’을 난데없이 발휘하는 것은 성실한 독자를 맥 빠지게 한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비평문화의 쇠퇴와 출판물 질의 저하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되는 첩경이다. 고리를 풀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때는 그것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있다. 그런 점에서 히친스의 위선에 대한 예리한 조롱은 한국의 무기력한 비평문화에 적어도 작은 칼집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은 사랑
“셰익스피어나 엘리엇이 인간의 성격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었”(65쪽)던 것처럼, 저자는 저널, 그리고 비평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가차 없이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간다. 거침없이 발언하는 그에게 중요한 주제 하나는 당연히 ‘표현의 자유’였다. 히친스는 선배 기자 마르크스를 호출해 ‘표현의 자유’라는 박제된 표현에 숨을 불어넣는다. “괴테가 말하길, 화가는 진짜 인간에게서 보고 사랑을 느낀 아름다움만을 성공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 또한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된 사람만이 지킬 수 있다.”(74쪽)
히친스가 그렇게 확보된 자유의 그늘 아래에서 하려는 것은 무엇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 책 《리딩》 2부의 제목은 ‘전체주의의 유산’으로서, 전체주의와 관련한 여러 논점이 서평 형식으로 담겨 있다. 히친스는 1949년생으로, 독일 헬무트 콜 총리가 솔직하게 말했던 것처럼 “늦게 태어난 은총”(502쪽)을 타고난 세대이지만, 인간을 비참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가장 큰 위협으로 ‘전체주의’를 꼽고 이에 천착했지 싶다. 사실 1부 ‘절충적 유사성’에 실린 상당수의 리뷰도 전체주의와 관련된 내용이다. 사실 전체주의는 포괄적인 개념이어서, 대표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와 파시스트를 꼽을 수 있지만, 다른 많은 역사적·사회적 흐름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히친스는 종교적 독단주의도 단호하게 전체주의의 하나로 보는 것 같다. 그가 이슬람 독재정권이나 테러리스트에 민감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북한을 거론할 때는 마치 혐오스러운 바퀴벌레를 지나치듯 한다. 원서 《ARGUABLY》의 분권 첫째 권인 《논쟁》과 함께 둘째 권인 《리딩》을 읽으면 그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히친스의 마지막 에세이 선집이 한국어판으로 완결되었다. 2011년 12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이 책에 실린 글 일부를 마지막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투병 중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리딩》에서 가장 늦은 2011년에 쓰인 글의 흐름이 흥미롭다. 필립 라킨의 《모니카에게 보내는 편지》 서평인데, 본문 대부분은 시인 라킨의 일탈적인 행위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에 할애된다. “라킨은 … 포르노그래피를 거의 영웅적인 수준으로 소비했으며, 사도마조히즘적인 공상의 아마추어 창작자였다.”(284쪽) 그러다가 돌연 끝부분에서 라킨의 연꽃 같은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의 거의 본능적인 거의 진실:/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라는 것.”(291쪽) 더러움, 그리고 사랑. 히친스가 삶을 마무리하던 해에 던진 메시지다.
[책 속으로]
1부 절충적 유사성
중력의 결함: 피터 애크로이드의 《뉴턴》
전설에 따르면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꼼꼼하게 연구하는 사람이었으며, 퀴리 부인이 라듐을 연구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빛과 색깔을 구분하고 싶다는 의욕이 넘친 나머지, 그는 한 눈으로 태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실험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눈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실험을 마친 뒤 시력 회복을 위해 사흘 동안 어두운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빛이 에테르(ether, 빛을 파동으로 볼 때 이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로 생각되었던 가상의 물질. 간섭계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는 부정되었으므로 더이상 논의되지 않는다―옮긴이)를 통과할 때 ‘압력체’로써 박동한다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내 눈과 뼈 사이로 눈 뒤편까지 최대한 가까이” 커다란 바늘을 찔러 넣었다. “거의 집착에 가까울 만큼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성격인 그는 시력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고 그 실험 결과를 관찰하기 위해 망막의 곡률을 바꾸려 시도했다.”_14쪽
악마와 사전: 피터 마틴의 《새뮤얼 존슨 전기》
우리가 데이비드 흄과 새뮤얼 존슨의 마지막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보스웰의 관대함과 호기심 덕분이다. 존슨이 그토록 싫어했던 미국 독립운동이 시작된 1776년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리에 누워 있던 흄은 보스웰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자신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존슨은 흄의 이 차분한 발언을 전해 듣고는 믿지 않으려 했다(나는 여기에서 헤스케스 피어슨의 설명을 따르고 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많은 영웅들이 기독교의 도움 없이도 금욕적인 자세로 죽음을 맞았다는 보스웰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뒤 애덤 스미스와 만났을 때 스미스가 보스웰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보증하자, 존슨은 스미스에게 큰 소리로 거짓말이라고 외쳤고 스미스는 냉정한 태도로 존슨에게 “개자식”이라고 응수했다. 존슨이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의 저자인 스미스와 이러한 충돌을 벌인 것을 보면, 나중에 매콜리가 그는 “모든 편협한 주장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아주 명확히 가려낼 수 있었으나 자신의 편협함만은 예외였다”고 평가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_54쪽
디킨스의 어두운 면: 마이클 슬레이터의 《찰스 디킨스》
하지만 디킨스가 앤젤라 버뎃 쿠츠에게 쓴 편지에서 1857년의 인도 반란에 관해, 만약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면 “자비를 발휘한 재빠른 처형으로… 지표면에서 [이 사람들을] 말살해버리겠다”고 쓴 것은 무슨 수로 변명할 수 있을까? 슬레이터는 이 문장을 간단히 줄여서 언급할 뿐이지만, 애크로이드는 편지 내용 중에서 그보다 더 고약한 부분을 좀더 자세히 인용한 뒤 이런 말을 덧붙인다. “위대한 소설가가 인종학살을 권고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디킨스와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이 흔했다고 말하는 것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에어Eyre 총독이 1865년에 자메이카에서 소름 끼치는 잔인성을 발휘해 반란을 진압했을 때, 디킨스와 칼라일은 그의 사디즘에 따스한 박수를 보냈지만 존 스튜어트 밀과 토머스 헉슬리는 에어를 소환해 의회에 출석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애크로이드는 이 사실 역시 분명히 언급했지만, 슬레이터는 빠른 속도로 휙 지나쳐버린다._68쪽
마르크스의 저널리즘 그럽 거리 시절: 카를 마르크스의 《뉴욕 트리뷴에 보낸 기사들: 카를 마르크스의 기사 선집》
마르크스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 보인 애정은 단순히 플라토닉한 수준 이상이었다. 얼마 뒤 <라이니셰 차이퉁>의 부장이 된 그는(부장급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재능을 미처 꽃피우지 못한 유망한 작가들이 몇 명이나 될까?) 자유로운 탐구라는 이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연결시킨 폭로 기사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라인란트의 주민들은 수세대 전부터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주워 장작으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기본적인 생필품을 이렇게 주워 쓰는 행위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선포한다(인클로저운동과 비슷한, 전통에 대한 공격이다). 이 범죄에 대한 처벌은 주민들이 공짜로 주워 간 나무의 ‘평가액’에 따라 달라지며, 자연의 힘으로 저절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의 ‘소유주’라는 사람들이 처벌을 결정할 것이다._74쪽
강도가 조금 덜하기는 해도, 그릴리의 딜레마에도 공감할 수 있다. 의욕과 포부가 넘치는 기자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되는 글을 팔아야 하는 덫에 붙들려 있고, 신문의 소유주는 경쟁지(<뉴욕 트리뷴>의 경우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의 비용 절감 전쟁에 붙들려 있다. 마르크스는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괴로운 일들에 관해 “구빈원의 빈민들처럼 뼈를 갈아 그것으로 수프를 끓이는 것”과 같다고 자기혐오적인 글을 썼다. 한편 그릴리는 <뉴욕 타임스>의 끝장을 보자는 식의 무시무시한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우리를 너무 밀어대고 있다…. 그 어떤 신문도 이렇게 원칙 없이 교활하기만 한 술책을 부린 적이 없다. 어떤 문제에서든 대중적인 면만을 항상 지켜보다가 노예제도 폐지론자, 여성운동가 등을 더할 나위 없이 매도하는 방식으로 많은 친구를 만들었다….” 나는 맨해튼 중심부에서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그릴리 광장을 지나 이 도시를 지배하는 상징적 신문이 된 <뉴욕 타임스>의 본사를 향해 걸을 때마다 장차 《자본론》을 쓸 인물을 그토록 가난으로 몰아넣었던 그 옛날의 신문사 경쟁을 떠올리곤 한다._76쪽
르네상스를 감히 예언하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한 가지 빠진 부분이 눈에 확 띈다. 스탈린 돼지와 트로츠키 돼지는 있는데 레닌 돼지는 없다는 사실이다. 《1984년》에도 스탈린을 상징하는 빅브라더와 트로츠키를 상징하는 엠마누엘 골드스타인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지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도 이 사실을 지적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인데도 나 역시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알아차렸다). 1930년대와 1940년대, 그리고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레닌의 혁명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였는지를 놓고 대단히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트로츠키가 정권을 잡았다면 과연 스탈린보다 나았을지 추측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웰은 대체적으로 트로츠키파에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판 공산주의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기존의 것보다 반드시 더 나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오웰은 아마도 이야기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그답지 않게 이처럼 뻔히 보이는 모순을 그냥 넘겨버리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해한 전원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 속에 잠재된 위험하고 파괴적인 가능성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검열을 피하지는 못했다._144쪽
이 소설이 하마터면 출판되지 못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히틀러의 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이 작품의 원고는 T. S. 엘리엇의 사무실로 보내졌다. 엘리엇은 당시 업계 최고의 출판사이던 페버&페버의 중요한 편집자이자 오웰에게 호의를 품은 지인이었으며,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반동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보수파에 속했다. 그러나 영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은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는 이 작품이 지나치게 “트로츠키적”이라며 출판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오웰에게 돼지를 통치자로 선택한 것이 안타깝다면서, 독자들이 “좀더 공공정신이 투철한 돼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뉴욕의 다이얼출판사가 오웰의 작품을 거절하며 한 얼간이 같은 말에 비하면 엘리엇의 말은 나은 편이었다. 다이얼출판사는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미국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고 오웰에게 엄숙히 알려왔다. 디즈니의 나라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_145쪽
스파이 스릴러의 아버지: 앤드루 로니의 《존 버컨: 장로교를 믿는 기사》
니얼 퍼거슨이 최근에 내놓은, 대영제국에 관한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제국이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일깨워준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제국의 병사, 광부, 선박 기관장 가운데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스타트렉Star Trek>에 스코티Scotty[<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우주선 엔터프라이즈 호의 기관장―옮긴이]를 등장시킨 것이 이 위대한 전통에 바치는 헌사라는 주장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는 식민지들도 여러 곳 있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뉴질랜드나 캐나다에 가면 스코틀랜드 건축 양식과 교육과 종교적 유산의 영향이 반드시 눈에 들어온다. 말레이시아의 캐머론 하이랜즈Cameron Highlands와 말라위의 블랜타이어Blantyre 시에서도 스코틀랜드의 영향이 여러 면에서 확연히 눈에 띈다. 심지어 남북전쟁 때 남부연방의 전투 깃발에도 성 앤드루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최근에 내가 읽은 글 중에서 텍사스의 혁명을 다룬 글에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옮긴이)의 시에서 따온 감동적인 구절이 혁명의 주장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자가 이 시구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맥락 속에서 독자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더욱 인상적이다._231쪽
이런 세상에: 노먼 셰리의 《그레이엄 그린의 생애, 2권, 1955~1991》
‘반미’라는 용어는 느슨한 개념으로 느슨하게 사용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미국 문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멸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누구든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면 반미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정의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느슨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작가가 미국이 베트남에서 식민주의적 면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더니 나중에 나이를 먹은 뒤에는 파나마의 노리에가처럼 미국에 저항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면 그는 반미주의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그의 주장 역시 대체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만큼 아이러니하지 않다. 지하드가 세계화된 이 시대에는 말이다(물론 지하드는 ‘세계화’와 미국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린이 모든 예술 분야 중에서 가장 미국적인 분야인 영화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아이러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소설과 ‘오락물’로 구분한 것은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누가 봐도 돈이 목적인 영화의 대본을 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마련한 방편이었다._254쪽
파국주의자: J. G. 밸러드의 《J. G. 밸러드의 완전한 이야기들》
이른바 과학소설(이 장르의 열렬한 숭배자들은 이 장르를 ‘SF’라고 부를 것인지, 아니면 ‘사이파이sci-fi’라고 부를 것인지를 놓고 무의미한 불화를 빚고 있다)을 처음부터 항상 싫어하고 불신해온 나는 킹즐리 에이미스가 밸러드에게 “H. G. 웰스의 후계자들 중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보낸 뒤에도 절대 감동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우주는 그 자체로서 너무나 복잡하고 무섭고 인상적인 곳이기 때문에 외계인이나 초강력 무기 같은 유치한 첨가물들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C. S. 루이스조차 행성 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장르에 손을 댔을 때는 평소보다 거짓된 글을 쓸 정도였다. 에이미스 부자 중 아들 쪽(이번 선집에 대단히 명료한 서문을 기고했다)은 30년쯤 전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지루하게 계속 늘어놓는 것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내게 《익사한 세계The Drowned World》《영원의 날The Day of Forever》을 건네주었다. 색다른 리듬을 맛보라는 뜻에서 《크래시Crash》도 주었다. 이 중 한 권만 읽었어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_322쪽
생생했던 소년: J. K. 롤링의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롤링보다 더 위대한 작가들, 특히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사람들도 이야기의 결말을 맺으려 할 때 똑같은 딜레마를 겪었다. 그리고 롤링은 코난 도일처럼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영웅과 악당에 대한 섬세한 캐리커처를 제공하고, 킹즈크로스 역을 근처의 베이커 거리에 있는 어떤 주소만큼이나 빛나는 소설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별도의 세계를 창조해서 상상력으로 그 모습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채워 넣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작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옛날에 여덟 살 때 정말로 증기기차를 타고 기숙학교에 갔던 사람으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다가 다이애건 앨리나 그리몰드 광장이 나오는 대목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내가 아는 신랄한 교사들(과 해리의 이모네 식구들 같은 사람들)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떠는 것도 즐거웠다. 이 소설의 확실히 감상적인 결말이 어쩌면 속편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는 속편이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장난감들은 이미 상자 속에 정리되어 있고, 마법의 지팡이도 접혀 있으며, 아이들이 새로운 재미를 찾아 아우성을 치는 동안 마술사들은 조심스레 보수를 받아 챙기고 있다(아이들에게 이제는 필립 풀먼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악마 설정은 그 어떤 패트로누스보다도 훌륭하다). 마지막 장의 제목처럼 ‘19년 뒤’, 그리고 그 후로도 수십 년이 흐른 뒤까지도 밤에 해리를 잠깐 만난 덕분에 문학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회고할 어른이 수백만 명이나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업적이다._354쪽
2부 전체주의의 유산
한 사람의 운명: 올리비에 토드의 《말로: 일생》
이사야 벌린은 내가 결코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어떤 인물에 대해 “아주 희귀한 존재, 순전히 허풍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치명적으로 보이는 이 비판에 마지못한 찬탄이 조금 틀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리비에 토드의 신작 전기 《말로: 일생》의 어조다(조지프 웨스트가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앙드레 말로는 20세기에 가장 많은 이미지로 자신을 꾸며낸 인물 중 하나다. … 말로도 워낙 몽상가였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에도 상당한 금액을 지불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오쩌둥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냈다. 스페인 내전 때 자신이 수행한 역할도 과장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찬란한 과거도 꾸며냈다. 뛰어난 사기꾼들이 모두 그렇듯이, 말로도 딱 알맞은 시기에 딱 알맞은 장소에 나타나는 요령이 있었다. 훌륭한 사람들과 어떻게든 친분을 맺는 재주도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해리 플래시맨의 프랑스판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말이 빠르고 변화무쌍하며,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영광을 둘러쓰고 있고, 많은 약탈당한 식민지들에 대해 화려하게 윤색된 여행담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점이 비슷했다._385~386쪽
열성분자: 마이클 스캐멀의 《쾨슬러: 20세기 회의주의자의 문학적, 정치적 오디세이》
쾨슬러는 신파적이기는 해도 고상한 방식으로 발터 베냐민과 함께 일종의 자살 리허설을 한 적이 있다. 게슈타포에게 생포되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그는 베냐민이 준 알약을 갖고 있었고, 베냐민은 며칠 뒤 스페인 국경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알약을 삼켰다). 이에 비해 그가 1983년에 실행한 자살에는 화려한 면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건강했던 아내 신시아까지 존재의 소멸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했던 것 같다. 어쩌면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했는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세사라니의 이전 연구는 쾨슬러가 아내들과 그 밖의 여성들(다른 사람들의 아내들은 말할 것도 없다)을 냉혹하게 대한 것에 대해 선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무섭게 파고들었다. 쾨슬러가 강박적으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과정에서(시몬 드 보부아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신체적인 강압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스캐멀은 이 대목에서 최선을 다해 정상참작을 호소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확연하다. 초자연적인 우연과 개입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바로 우주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을 남몰래 품고 있는 것처럼, 열등감을 지나치게 보상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거대한 자존심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필요하지만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해버린다. 적어도 쾨슬러의 경우에는, 그의 생애를 생각할 때 비극적인 느낌이 난다. 고상한 정신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_400~401쪽
페르시아 버전: 《기묘한 시대입니다, 그대여: 당대 이란 문학의 PEN 선집》
이란의 문화와 활기를 계속 유지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작가들과 영화인들이다(영화감독-시인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처럼 둘을 모두 겸하는 사람도 있다). 지속적인 압박은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져 체제의 틈새를 찾고, 한계를 시험하고, 초월하게 해준다. 신정神政의 캘리밴(Caliban,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노예―옮긴이)들이 거울을 보면서(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다) 항상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부르봉 왕가 사람들이 고야가 자신들을 그린 완전무결한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서글퍼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들은 이 나라에 영화산업, 출판사, 신문 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은 술에서부터 섹스에 이르기까지 ‘법에 어긋나는’ 주제들을 모조리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인의 눈에 단색으로만 보이는 이 나라의 모습에서 흔히 간과되는 어떤 것을 잘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조로아스터교 신자, 아제르바이잔인 등 이란 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것이다(이 선집은 더 많은 목소리를 기대할 수도 있는 소수집단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지만, 로야 하카키안의 작품은 포함되어 있다. 혁명기에 유대인으로서 보낸 어린 시절을 뜨겁지만 부드럽게 묘사한 그의 회고록 《부정의 땅을 떠나온 길Journey from the Land of No》은 그 자체로 망명 문학 르네상스의 보석 같은 작품이다)._419~420쪽
‘그를 상상하며: 이언 커쇼의 <히틀러 1889~1936: 오만>’
우리가 히틀러를 생각하면서 여전히 움찔거린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자신의 지성과 인격이 모욕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아직도 총통에게 계속 매혹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인 걸까? 상황이 달랐다면 그가 그저 지루하고 성가신 보통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쾌하기 때문인걸까? 그는 진부하고 편협하고 예의 바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마인 캄프》의 문장은 너무 거만해서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다. 하지만 캐리커처와 경멸로 그를 어리석은 인물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는 어찌 된 영문인지 항상 실패로 끝난다. … P.G. 우드하우스는 1937년에 발표한 멀리너 이야기에 “독일의 상황”에 대해 주점에서 열띤 토론이 일어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여기에서 생각이 깊은 누군가가 말한다. 히틀러가 곧 어느 쪽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문제를 피할 길은 없었다. “수염이 자라게 내버려두든지, 아니면 깎아버려야 할걸.” 하지만 이런 식의 반항적 재치나 조롱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면, 애당초 ‘악의 문제’나 히틀러 문제 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_453쪽
독일을 위한 진혼곡: W. G. 제발트의 《파괴의 자연사에 대하여》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인들은 왜 수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라의 훌륭한 도시들과 교회들과 기념물들이 사라져버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기분을 느껴야 할까? 많은 영국인들이 쓸데없는 파괴와 만행이 자행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일과의 공중전 계획을 수립했으며 별명이 ‘폭격기’였던 아서 해리스 공군 원수의 동상이 10년 전 런던에서 제막될 때 지면과 거리에서 강력한 시위가 벌어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제발트의 글을 살펴보던 나는 그가 “말살 전쟁”이란 말을 냉담하게 하는 부분에서 잠깐 흠칫했다. 그가 노위치 “습격”을 유감스러워하는 것보다 루프트바페 소속의 승무원들을 애도하는 마음이 조금 더 큰 듯한 부분에서도 조금 움찔했다. 내가 섬나라 근성 때문에, 또는 내 나라 사람만 생각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고故 하인리히 뵐은 아들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동포인 독일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1945년 4월의 일을 ‘패배’로 묘사하는지, 아니면 ‘해방’으로 묘사하는지를 보면 언제나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마스 만과 빅터 클렘페러는 이 점에 대해 상당히 단호해서, 제발트가 왠지 입에 담을 수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재앙에 관한 글까지 썼다(클렘페러는 그 재앙을 직접 겪기까지 했다). 그래도 독일에서 나치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작품과 생각을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독일 문화와 전통을 인정하는 척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_504쪽
목차
1부 절충적 유사성
중력의 결함: 피터 애크로이드의 《뉴턴》|영국을 만든 사람들: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반동적 예언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 관한 고찰》|악마와 사전: 피터 마틴의 《새뮤얼 존슨 전기》|난 바보와 함께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디킨스의 어두운 면: 마이클 슬레이터의 《찰스 디킨스》|마르크스의 저널리즘 그럽 거리 시절: 카를 마르크스의 《뉴욕 트리뷴에 보낸 기사들: 카를 마르크스의 기사 선집》|싸울 가치가 있는 것들: 레베카 웨스트의 《검은 양과 회색 매》|혁명가 바보: 데이비드 무디의 《에즈라 파운드: 시인, 1권, 1885~1920》|르네상스를 감히 예언하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비타협적인 존재의 독(毒)펜: 제시카 미트퍼드의 《데카: 제시카 미트퍼드의 서신들》|가엾은 윌리 아저씨: 제프리 마이어스의 《서머싯 몸: 생애》|영원한 청소년: 에블린 워의 《브라이즈헤드 재방문》|명예를 아는 남학생: 로버트 맥크럼의 《우드하우스: 생애》|가리는 것이 없는 호기심: 앤서니 파웰의 《공이 계속 구르게 하려고: 앤서니 파웰 회고록》|스파이 스릴러의 아버지: 앤드루 로니의 《존 버컨: 장로교를 믿는 기사》|이런 세상에: 노먼 셰리의 《그레이엄 그린의 생애, 2권, 1955~1991》|술병에 담긴 그레이엄 그린의 존재론: 그레이엄 그린의 《아바나의 사나이》|사랑하기: 필립 라킨의 《모니카에게 보내는 편지》|진짜 망할 놈의 바보: 존 서덜랜드의 《스티븐 스펜더: 승인받은 전기》|사로잡힌 정신: 에드워드 업워드의 《나선의 상승》
중간 끄고, 오른쪽 안 돼: 파루크 돈디의 《C. L. R. 제임스: 크리켓, 카리브 해 그리고 세계혁명》|파국주의자: J. G. 밸러드의 《J. G. 밸러드의 완전한 이야기들》|악당의 시간: 조지 맥도널드 프레이저의 《플래시맨과 호랑이》|거친 것들이 있는 곳: 샌디 번의 《감당할 수 없는 사키》|생생했던 소년: J. K. 롤링의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플리트 거리 최고의 인물들: 에블린 워에서 마이클 프레인까지
2부 전체주의의 유산
이단 재판의 장면들: 빅토르 세르주의 《툴라예프 동무의 사견》과 《혁명가의 회고록》|한 사람의 운명: 올리비에 토드의 《말로: 일생》|
열성분자: 마이클 스캐멀의 《쾨슬러: 20세기 회의주의자의 문학적, 정치적 오디세이》|다시 본 칠레: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페르시아 버전: 《기묘한 시대입니다, 그대여: 당대 이란 문학의 PEN 선집》|한밤중의 밝음: 마틴 에이미스의 《공포의 코바: 웃음과 2000만》|그를 상상하며: 이언 커쇼의 《히틀러 1889~1936: 오만》|생존자 : 빅터 클렘페러의 《차악次惡: 일기1945~1959》|가치 있는 전쟁: 팻 뷰캐넌의 《처칠, 히틀러 그리고 불필요한 전쟁》|그냥 평화에 기회를 한번 주자고?: 니콜슨 베이커의 《인간 연기》|독일을 위한 진혼곡: W. G. 제발트의 《파괴의 자연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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