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신 없음의 과학: 세계적 사상가 4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 대등서명
- Four horsemen
- 발행사항
- 파주 : 김영사, 2019
- 형태사항
- 207 p. ; 22 cm
- ISBN
- 9788934999454
- 청구기호
- 204.4 D271f
- 일반주기
- 원저자명: Richard Dawkins, Daniel Dennett, Sam Harris, christopher Hitchens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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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7804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7804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신에 얽매일 것인가, 과학으로 자유로워질 것인가?”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
2007년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에서 역사적인 대담이 열렸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한자리에 모여 현대 무신론의 시동을 건 획기적인 대화를 나눈 것이다. 종교의 봉인이 풀릴 때 나타날 기사라는 뜻에서 ‘네 기사(Four Horsemen)’라 불리는 이들은, 지적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으로 현대 무신론을 이루는 가닥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신 없음의 과학》은 그날의 대화와 이후 그들의 진화된 사고를 담은 새로운 에세이를 한데 묶은 것이다. 한국판에서는 진화학자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해제를 더했다. 현대 무신론 운동의 태동부터 ‘네 기사’라는 과학적 무신론 동맹의 형성 등 풍부한 지식적 배경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기념비적인 대담의 매력은 사회자도, 사전 계획도, 미리 약속한 의제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흘러간다는 데 있다. 사중주의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곡에 매력을 더하듯이, 네 기사는 공통의 깃발을 치켜들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과학과 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신과 믿음, 종교적 가르침 영역 밖에서의 도덕과 영성에 대한 문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논쟁,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 등 다양한 주제로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모든 현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명의 사상가들은 그동안 상식이라 불리던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개인의 성찰을 자극한다.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지적 탐구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과학과 종교계를 뒤흔든 최대 문제작들의 사상적 토대가 된 바로 그 대화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혼을 간질이며, 신경을 자극하는 지적 향연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상가들이 어쩌다 한곳에 모이게 되었을까? 때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자행한 911 테러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지식인 중에는 이러한 테러가 미국의 반이슬람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삐 풀린 종교 때문에 세계가 큰 위험에 빠졌다고 외치는 지식인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네 기사의 저서들,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2004),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2006),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2007),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8)는 과학적 관점으로 ‘신앙이라는 금기’를 건드림으로써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네 기사들의 대담은 그 열기 속에서 성사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안타깝게도 2011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이 역사적 대화는 네 사람이 함께 모인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동안 논쟁해온 신과 종교에 관한 사상적 토대의 핵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장 강경한 노선의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의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비주의 노선의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신과 믿음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근본 주제에서 파생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가령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반박당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는데 왜 종교인들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까? 우리가 때때로 겪는 신비로운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가?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해로운가? 미켈란젤로가 과학박물관 천장화를 의뢰받았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등이다. 대화가 무르익어 네 기사의 미묘한 의견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면 혹시 딴청을 부리던 독자도 의자를 바싹 당겨 앉게 될 것이다.
■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은 어떻게 다른가?
그들이 다룬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다른가이다. 도킨스는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며,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46쪽)라고 주장한다.
팽창하는 우주, 물리법칙, 미세 조정된 물리상수, 화학법칙,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진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140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비참한 죄인이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장도 사실 뒤집어보면 일종의 오만이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주의 창조주는 벌점을 매기고 가산점을 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우주의 신경이 온통 내게 쏠려 있다니, 이거야말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오만이 아닌가? _pp.36~37
히친스는 “종교인들이 항상 그들 스스로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라는 실제 기도 내용을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간다”(97쪽)고 믿음의 비이성적 행태를 꼬집는다.
■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을 바라는가?
실제로 히친스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 그는 “나는 거짓 위안이 없으면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157쪽)고 했다. 세상에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는 해리스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교회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상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종류의 의식. 저는 우리 삶에는 신성함을 위한 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허튼소리를 전제로 하지 않아야겠죠. 저는 심오한 뭔가를 추구하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_p.173
도킨스는 교회는 불필요하지만, 역사적 이유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는 보고 싶지 않다. 《성경》을 모르고는 문학을 이해할 수 없고 미술, 음악,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이유는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174~175쪽)라는 것이다. 데닛은 무신론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찮고 끔찍한 것에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의미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로부터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라고 생각한다.”(174쪽)
■ 모든 종교가 똑같이 해로운가?
히친스는 대화 말미에 “종교를 비판할 때 모든 종교에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기독교ㆍ이슬람교ㆍ아미시파ㆍ자이나교 등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닛과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데닛은 “물론 우리는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항상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188쪽)는 입장이다. 해리스는 믿음에 대한 모든 주장이 어떤 의미에서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언론의 전술이라며, “우리가 세부에 초점을 맞추면 지원 세력을 얻을 수 있지만, 무신론의 방벽 위에 올라서서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고 말하면 90퍼센트의 이웃을 잃게 된다”(190쪽)고 설명한다. 히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모든 종교가 똑같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똑같이 위험합니다. 정신 능력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독보적 영장류로 만들어주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결사적으로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언제나 치명적이죠. _pp.190~191
도킨스는 “나는 모든 종교에 공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는 모두 그런 식의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190쪽)라고 설명한다.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열띤 탐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
그들의 대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대담이 빛나는 것은 사중주의 연주자들이 제각기 종교와 무신론, 과학과 이성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의견이 현시대의 현안에도 똑같이 긴급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로 시작해 “사랑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어”로 끝나는 설전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고, ‘종교적 믿음’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역사적 사실이 아닌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서문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신념과 이념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 논쟁의 부분집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대화의 많은 부분이 ‘믿음’과 ‘신앙’을 ‘신념’과 ‘이념’으로 바꾸어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또한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에도 이 대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네 기사의 매력적이고 빛나는 말, 자유롭고 품위 있게 교환되는 자유사상의 용기와 가치에서 깊은 영감을 받기를 바란다.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
2007년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에서 역사적인 대담이 열렸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한자리에 모여 현대 무신론의 시동을 건 획기적인 대화를 나눈 것이다. 종교의 봉인이 풀릴 때 나타날 기사라는 뜻에서 ‘네 기사(Four Horsemen)’라 불리는 이들은, 지적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으로 현대 무신론을 이루는 가닥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신 없음의 과학》은 그날의 대화와 이후 그들의 진화된 사고를 담은 새로운 에세이를 한데 묶은 것이다. 한국판에서는 진화학자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해제를 더했다. 현대 무신론 운동의 태동부터 ‘네 기사’라는 과학적 무신론 동맹의 형성 등 풍부한 지식적 배경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기념비적인 대담의 매력은 사회자도, 사전 계획도, 미리 약속한 의제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흘러간다는 데 있다. 사중주의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곡에 매력을 더하듯이, 네 기사는 공통의 깃발을 치켜들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과학과 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신과 믿음, 종교적 가르침 영역 밖에서의 도덕과 영성에 대한 문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논쟁,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 등 다양한 주제로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모든 현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명의 사상가들은 그동안 상식이라 불리던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개인의 성찰을 자극한다.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지적 탐구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과학과 종교계를 뒤흔든 최대 문제작들의 사상적 토대가 된 바로 그 대화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영혼을 간질이며, 신경을 자극하는 지적 향연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상가들이 어쩌다 한곳에 모이게 되었을까? 때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자행한 911 테러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지식인 중에는 이러한 테러가 미국의 반이슬람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삐 풀린 종교 때문에 세계가 큰 위험에 빠졌다고 외치는 지식인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네 기사의 저서들,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2004),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2006),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2007),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8)는 과학적 관점으로 ‘신앙이라는 금기’를 건드림으로써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네 기사들의 대담은 그 열기 속에서 성사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안타깝게도 2011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이 역사적 대화는 네 사람이 함께 모인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동안 논쟁해온 신과 종교에 관한 사상적 토대의 핵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장 강경한 노선의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의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비주의 노선의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신과 믿음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근본 주제에서 파생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가령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반박당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는데 왜 종교인들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까? 우리가 때때로 겪는 신비로운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가?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해로운가? 미켈란젤로가 과학박물관 천장화를 의뢰받았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등이다. 대화가 무르익어 네 기사의 미묘한 의견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면 혹시 딴청을 부리던 독자도 의자를 바싹 당겨 앉게 될 것이다.
■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은 어떻게 다른가?
그들이 다룬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다른가이다. 도킨스는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며,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46쪽)라고 주장한다.
팽창하는 우주, 물리법칙, 미세 조정된 물리상수, 화학법칙,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진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140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비참한 죄인이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장도 사실 뒤집어보면 일종의 오만이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주의 창조주는 벌점을 매기고 가산점을 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우주의 신경이 온통 내게 쏠려 있다니, 이거야말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오만이 아닌가? _pp.36~37
히친스는 “종교인들이 항상 그들 스스로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라는 실제 기도 내용을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간다”(97쪽)고 믿음의 비이성적 행태를 꼬집는다.
■ 그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는 세상을 바라는가?
실제로 히친스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 그는 “나는 거짓 위안이 없으면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157쪽)고 했다. 세상에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는 해리스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교회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상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종류의 의식. 저는 우리 삶에는 신성함을 위한 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허튼소리를 전제로 하지 않아야겠죠. 저는 심오한 뭔가를 추구하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_p.173
도킨스는 교회는 불필요하지만, 역사적 이유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는 보고 싶지 않다. 《성경》을 모르고는 문학을 이해할 수 없고 미술, 음악,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이유는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174~175쪽)라는 것이다. 데닛은 무신론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찮고 끔찍한 것에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의미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로부터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라고 생각한다.”(174쪽)
■ 모든 종교가 똑같이 해로운가?
히친스는 대화 말미에 “종교를 비판할 때 모든 종교에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기독교ㆍ이슬람교ㆍ아미시파ㆍ자이나교 등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닛과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데닛은 “물론 우리는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항상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188쪽)는 입장이다. 해리스는 믿음에 대한 모든 주장이 어떤 의미에서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언론의 전술이라며, “우리가 세부에 초점을 맞추면 지원 세력을 얻을 수 있지만, 무신론의 방벽 위에 올라서서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고 말하면 90퍼센트의 이웃을 잃게 된다”(190쪽)고 설명한다. 히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모든 종교가 똑같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똑같이 위험합니다. 정신 능력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독보적 영장류로 만들어주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결사적으로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언제나 치명적이죠. _pp.190~191
도킨스는 “나는 모든 종교에 공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는 모두 그런 식의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190쪽)라고 설명한다.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열띤 탐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
그들의 대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대담이 빛나는 것은 사중주의 연주자들이 제각기 종교와 무신론, 과학과 이성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의견이 현시대의 현안에도 똑같이 긴급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로 시작해 “사랑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어”로 끝나는 설전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고, ‘종교적 믿음’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역사적 사실이 아닌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서문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신념과 이념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 논쟁의 부분집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대화의 많은 부분이 ‘믿음’과 ‘신앙’을 ‘신념’과 ‘이념’으로 바꾸어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또한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에도 이 대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네 기사의 매력적이고 빛나는 말, 자유롭고 품위 있게 교환되는 자유사상의 용기와 가치에서 깊은 영감을 받기를 바란다.
목차
이 책을 읽기 전에_ 무신론 혁명을 촉발한 ‘네 기사’의 등장
머리말_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1. 종교의 오만, 과학의 겸손, 무신론의 지적·도덕적 용기
_리처드 도킨스
2. 이웃에 ‘커밍아웃’하라, 수가 많으면 강해진다
_대니얼 데닛
3. 독단은 지식의 성장을 방해하고 인류를 갈라놓는다
_샘 해리스
4. 네 기사의 토론
_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감사의 말
역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