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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747

근대문화사: 흑사병에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영혼이 직면한 위기. 1-5

발행사항
서울 : 한국문화사, 2015
형태사항
407p ; 24 cm
ISBN
9788968172496
청구기호
920.4 프299ㄱ
일반주기
원저자명: Egon Friedell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5570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5570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베네데토 크로체, 야콥 부르크하르트,
그리고 에곤 프리델!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Kulturgeschichte der Neuzeit)> 한국어판 드디어 출간


독일어판 1,600쪽 분량에 가까운 <근대문화사>는 출간되자마자 대중에게 폭발적 관심을 받았다. 당대에도 표현주의 작가 알프레트 되블린과 저널리스트 레오폴트 슈바르츠쉴트,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등의 추천을 받은 <근대문화사>는 수십 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흑사병 발병 시기인 1340년대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까지
600여 년의 유럽 문화를 관통한다


“결단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사건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는 것이 역사기술자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 교양인의 천부적 권리이기도 하다.” -오스카 와일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600여 년간 서구인이 겪은 문화적 부침의 역사를 섬세한 예술적·철학적 문화프리즘으로 그려낸다. 이 부침의 역사 속에는 예술과 종교, 정치와 혁명, 과학과 기술, 전쟁과 억압 등속의 거시적 문화 조류뿐만 아니라 음식·놀이·문학·철학·음악·춤·미술·의상·가발 등과 같은 미시적인 일상생활의 문화 조류도 포함된다.

저자 에곤 프리델이 <근대문화사>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은 이전까지의 문화사(文化史) 책과 다르다.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나열하며 논지를 풀어가는, 백화점식 보고 형식이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기존의 논리적 역사기술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미학적·도덕적 성격이 짙다. 저자 에곤 프리델은 ‘문화사 기술방식’을 ‘사실의 설명적 보고’와 ‘사실 인과관계의 논리적 기술’ 및 ‘사실의 미학적·윤리적 기술’로 종래 방식대로 구분하면서도 이를 넘나들며 모두를 망라한 ‘융·복합적 기술방식’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이야기 전체를 풀어가는 서술방식은 창조적인 ‘시학’ 내지는 문화적 ‘미학서’와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미시적 문화 조류에 대한 섬세한 탐색
망탈리테의 역사, 이야기체 역사의 선구

‘시대정신’이 어떻게 구체적인 ‘일상적 삶’으로 표현되는가
의·식·주의 스타일이 각 ‘시대정신’과 어떻게 만나는가
- 천재적인 딜레당트 에곤 프리델이 그린
정신적 의상(衣裳)의 역사(Seelische Kostumgeschichte)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의 강점은 무엇보다 미시적 문화 조류에 대한 탐색이 섬세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큰 종 모양의 치마, 일명 ‘정절지킴이’로 불렸던 의상 라이프로크는 바로크의 형식적 화려함 속에 가려진 몰락의 추태를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이 의상의 출현 때문에 파리와 같은 도시의 골목길이 넓혀지는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미시적 문화와 거시적 문화의 변증법적 통일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에곤 프리델은 이 책에서 근대를 규정하는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조류를 추적하며, 가장 중대한 정신적·정치적·사회적 발전 면모를 설명하면서 그때마다 결정적인 인물들을 뚜렷한 초상으로 그려낸다. 프리델의 문화프리즘을 통해 보면 위대한 인물과 시대정신은 상호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마치 독립적인 듯한 변증법적 모순을 함축한다. 이의 압축된 표현이 바로 “천재는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는 천재의 산물이다”, “천재와 시대는 공약수가 없다”는 식의 테제일 것이다. 루터, 라파엘로, 발렌슈타인과 구스타프 바사, 프리드리히 2세와 루이 14세, 펠리페 2세, 스피노자, 괴테, 칸트, 니체, 슈펭글러, 볼프, 고흐, 비스마르크, 프로이트, 빌헬름 2세 … 이들도 자신들의 삶에서 시대정신을 체현하고 있다. 한 시대는 그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간 구체적인 인물의 삶을 통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으며, 이는 시대정신을 구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이해할 통로를 제공해 준다. 시대정신을 체현하는 이 테제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것이 그가 만든 개념인 ‘정신적 의상의 역사(Eine seelische Kostumgeschichte)’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대정신’이 어떻게 구체적인 ‘일상’으로, 위대한 인물 개인의 삶으로 표현되는가, 의·식·주의 스타일이 각 ‘시대정신’과 어떻게 만나 그 시대의 생활형식(Lebensform)이 되는가를 서술하려 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서술방식은 ‘두텁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등의 방법론으로 요약되는 망탈리테의 역사, 이야기체 역사를 앞선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을 획득한 대(大)부르주아지가 즉물적으로, 현실적으로 재미없게, 그래서 따분하게, 그리고 꾸밈도 환상도 없이 처신하는 것도 일종의 의상인 셈이다. 금융자본가가 자신의 은행 집무실 바깥에서도 동물적인 성실함을 갖고 실용적으로 서민처럼 행하는 그 모든 것도 의상이며, 연기와 그을음을 먹고 살아가는 날품팔이, 마권(馬券) 장수, 외판원, 그리고 상인과 저널리스트들, 상품유통이나 정보수집의 어설픈 대리인들에게도 나름의 의상이 있었다.”
-<근대문화사> 본문 중에서

반유대주의의 유대인, 에곤 프리델
<근대문화사> 또한 그 시대의 집단적 의식의 산물이다


“최상의 것은 병적인 것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노발리스

<근대문화사>에는 저자 프리델의 민족심리학이 반복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저자가 만일 유대인 출신 나치 희생자가 아니라 제국 문서실 일원이었다면 반유대주의의 선동으로 보일 부분도 있다. 그 자신 유대인이었던 프리델은 ‘유대인의 정신’에 대한 반감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이는 유럽에 동화되려는 19세기 유대인들 사이에서 때때로 볼 수 있었던 ‘자기혐오’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치가 등장하자 그는, 프리델 선집에 「책임과 속죄(Schuld und Suhne)」를 후기로 쓴 헤르베르트 일리히(Heribert Illig)의 추측에 따르면, 자책감에 시달린 것 같다. 일리히는 이렇게 추단한다. “프리델은 히틀러의 등장에 공범 의식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의 작품은 니체의 작품이 그랬듯 ‘위대한 독재자’에게 수많은 변명거리를 제공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근대문화사>를 ‘대단히 반근대적·반자본주의적·반기술적·반합리주의적인 작품, 한마디로 앵글로색슨계에 반하는 작품’으로 판정했었기에 …”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은 보수와 진보, 전통과 현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유대인의 활동과 반유대주의, 이 모든 모순적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 이에 따라 에곤 프리델 역시 각 시대의 모든 요소가 뒤섞여 상쇄·절충되는 진통을 <근대문화사>에서 서술한다. 이는 그가 흑사병이 발생한 1348년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의 ‘근대’는 보편적 파국에 따른 쇼크와 뒤이은 카오스 상태로 집단적 표상이 유동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헛되게도 이성은 편견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이성 자체가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면 이성도 마찬가지로 편견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이폴리트 텐

에곤 프리델이 <근대문화사>로 들려주려 했던 ‘새로운 문화 이야기’는 근대 계몽의 당찬 기획을 실패로 본 194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점을 그들보다 먼저 보여준다. 이는 <근대문화사>의 부제인 '유럽 영혼이 직면한 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리델에게 근대화 과정은 위기였으며, ‘실재론(Realismus)’에 대한 ‘유명론(Nominalismus)’의 승리, 신에 대한 이성의 승리, ‘귀납적 인간(induktiver Mensch)’에 대한 ‘연역적 인간(deduktiver Mensch)’의 승리였다. ‘연역적 인간’의 승리는 ‘이성’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것을 단박에 ‘불량종자(mauvis genre)’로 취급하는 데카르트적 이성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성은 ‘형제가 없는 정신’이 될 수밖에 없고, 중세적 공동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근대문화사>를 관통하는 문화프리즘이다. ‘형제가 없는 정신’을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말로 표현하면 ‘도구적 이성’이 될 것이다. 이런 이성의 궁극적 표현이 세계대전으로 귀결된다고 보는 데서도 <근대문화사>와 <계몽의 변증법>은 서로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에 내재하는 억압적 요소를 ‘계몽을 넘어서는 계몽’과 같은 반성적 계몽을 통해 극복하려 하는 반면 <근대문화사>는 지금까지의 세계를 구성해온 이분법적 체계, 즉 정신과 물질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오는 제3의 불빛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은 현실 너머에 서 있고, 물질은 현실 아래에 있다 …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른 쪽에서부터 비쳐오는 흐릿한 불빛이 하나 반짝이고 있다.
유럽 문화사의 다음 장은 바로 이 불빛의 역사가 될 것이다.”
- <근대문화사> 에필로그

[옮긴이 글]

문화사에 딜레탕트인 내가 프로페셔널리즘보다 딜레탕티즘을 선호하는 에곤 프리델의 이 유명한 책, <근대문화사>를 처음 접한 것은 2003년 4월 즈음이었다. 그 무렵은 내가 악셀 브라이히(Axel Braig)와 울리히 렌츠(Ulrich Renz)의 공저인 <일 덜 하는 기술(Die Kunst, weniger zu arbeiten)>을 막 번역 출간한 때이다. <일은 적게 하면서 인생은 자유롭게 사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일 덜 하는 기술>은 책 끝머리에 부록으로 <권하고 싶은 책> 여남은 권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우리의 주제를 훨씬 넘어서서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고 소개한 책이 바로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였다.
그 후 얼마 뒤 이 책을 직접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라는 소개말은 의례적으로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 중 하나인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Neue Zuricher Zeitung)>이 일찌감치 “프리델의 <근대문화사>는 그 문학적 형상화의 힘 덕분에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읽힌다”고 평가한 말 역시 이 책 서문 첫머리를 읽으면 이내 이해될뿐더러 참으로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읽을거리’임을 확인하게 된다.

무한히 깊은 우주 공간에는 신의 반짝이는 사유이자 축복받은 도구이기도 한 수많은 별이 운행하고 있다. 창조주가 그 별들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별은 행복하다. 신이 세계를 행복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별들 가운데 이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 별이 딱 하나 있다. 이 별에는 인간만이 서 있을 따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신이 이 별을 망각했던가? 아니면 신은 이 별에 본래의 힘을 벗어나 스스로 축복을 쟁취할 자유를 주었던가?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작은 별의 역사가 만들어낸 자그마한 파편 하나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고자 한다.

언뜻 봐도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건조한 ‘문화사’에 관한 말투로 느껴지지 않는다. ‘존재론’에 관한 명상록 같기도 하고, 마르크스가 말한 ‘물신숭배(Fetishism)’의 세계에 대한 우울한 철학적 반성의 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를 풀어가는 서술방식, 이를테면 세계 전체가 시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세계사는 작품이나 말의 시인을 위한 소재를 갖고 있다, 세계사가 새로운 행위와 꿈을 꾸도록 부채를 건네는 그 시인은 누구일까? 그 시인은 바로 다름 아닌 후대 세계 전체일 뿐이다, 천재는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는 천재의 산물이다, 천재와 시대는 공약수가 없다는 등과 같은 변증법적 표현에서 보면 그의 이 책은 허무주의적 반성의 ‘존재론적’ 명상록의 차원을 넘어 창조적인 ‘시학’ 내지는 문화적 ‘미학서’와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사실 저자 에곤 프리델도 자신의 <근대문화사> 서술형식의 골간을 받치고 있는 관점은 과학적 성격보다 미학적ㆍ도덕적 성격이 강하다고 서문 앞쪽에서 미리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의 첫머리를 읽는 순간 이 글은 지금까지의 문화사(文化史) 책이 대개 보여주듯 사실관계를 단순히 나열하는 백화점식 보고 형식과도 다르며,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기존의 논리적 역사기술의 문화사 연구방식과도 확연히 다른 미학적 성격이 짙다는 점을 금세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 같다’는 평가를 내리는 문화사 ‘전문가’도 있지만 대단히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가 힐데 슈필(Hilde Spiel)과 같은 이는 프리델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박식함과 매혹적인 유머, 정확한 학술적 이해와 대단히 섬세한 예술취향을 겸비하고서” 그 “시기의 인간을 각 시기마다 그 시기의 외부적 환경과 정신적 환경 속에 세우고서 그런 인간의 일상과 복장, 관습을 그 시대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조류와 함께 신선하게 환기시킨다”는 말로써 사람들을 <근대문화사>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울리히 바인치를(Ulrich Weinzierl)은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서 프리델의 <근대문화사>를 두고 “그 표현력이 경쾌하고도 흥미로워 수십 년 동안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을 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런 ‘경쾌함’과 ‘흥미로움’의 참맛은 <근대문화사>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볼 때만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옮긴 나로서는 바인치를의 주장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물론 이 확신을 얻기까지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2003년 4월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해서 2015년 7월 지금 번역서로 이렇게 내놓기까지 꼬박 12년 3개월이 걸린 셈이다. 미적 표현과 그 예술적 서술방식에 매료되어, ‘이런 식의 문화사 기술도 가능하구나!’하는 느낌으로 간간이 읽고 우리말로 옮겨오다가 한국연구재단 ‘2011년 명저번역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본격적으로 번역해온 일도 벌써 만 4년이 다 되었다. 표현력의 ‘경쾌함’과 소설 같은 ‘흥미로움’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면서 ‘새로운 시대의 문화 이야기(Kulturgeschichte der Neuzeit)’, 즉 <근대문화사>에 빠져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중된 4년과 전체 12년은 결코 인내하기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나의 ‘몸’에 불균형만 초래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일상적 바이오리듬도 깨는 용감한 ‘반가족주의’의 길이기도 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래도 정신 건강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동의 얻기 쉽지 않은 말로나마 함께 위로하고 싶다.
이 책이 아무리 ‘흥미진진한 소설’ 같아도 번역하기에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저자 에곤 프리델이 쓰기에도 5년 이상 걸릴 만큼 긴 시간이 요구된 독일어판 1,600쪽 분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프리델은 처음 이 책을 3부작으로 출간했다(여기서 번역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베크(C. H. Beck) 출판사가 3부 5권으로 나뉜 것을 2008년 한 권으로 묶어 내놓은 특별판이다). 1927년 7월에 완성된 1부에는 <문화사란 무엇이며, 문화사를 왜 공부하는가?>라는 서문과 <르네상스와 종교: 흑사병에서 30년 전쟁까지>라는 제목의 1권이 포함된다. 1928년 12월에 나온 2부는 <바로크와 로코코: 30년 전쟁에서 7년 전쟁까지>의 2권과 <계몽과 혁명: 7년 전쟁에서 빈 회의까지>의 3권을 포함하며, 3부는 1931년 말에 완성된 것으로서 <낭만주의와 자유주의: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까지>의 4권과 마지막 5권 <제국주의와 인상주의: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에서 세계대전까지>를 포함한다. 흑사병 발병 시기인 1340년대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까지의 기간을 보면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는 <르네상스와 종교>에서 <제국주의와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근 600여 년의 유럽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
한 권의 특별판으로 묶은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흥으로부터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간 서구인이 겪은 문화적 부침의 역사를 섬세한 예술적ㆍ철학적 문화프리즘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부침의 역사 속에는 예술과 종교, 정치와 혁명, 과학과 기술, 전쟁과 억압 등속의 거시적 문화 조류뿐만 아니라 음식ㆍ놀이ㆍ문학ㆍ철학ㆍ음악ㆍ춤ㆍ미술ㆍ의상ㆍ가발 등과 같은 미시적인 일상생활의 문화 조류도 포함된다. 그런데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의 강점은 무엇보다 이 미시적 문화 조류에 대한 탐색이 섬세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큰 종 모양의 치마, 일명 ‘정절지킴이’로 불렸던 의상 라이프로크는 바로크의 형식적 화려함 속에 가려진 몰락의 추태를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이 의상의 출현으로 파리와 같은 도시의 골목길이 넓혀지는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미시적 문화와 거시적 문화의 변증법적 통일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에곤 프리델은 이 책에서 근대를 규정하는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조류를 추적하며, 가장 중대한 정신적ㆍ정치적ㆍ사회적 발전 면모를 설명하면서 그때마다 결정적인 인물들을 뚜렷한 초상으로 그려낸다. 프리델의 문화프리즘을 통해 보면 위대한 인물과 시대정신은 상호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마치 독립적인 듯한 변증법적 모순을 함축한다. 이의 압축된 표현이 바로 “천재는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는 천재의 산물이다”, “천재와 시대는 공약수가 없다”는 식의 테제일 것이다. 이 테제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것이 그가 만든 개념인 ‘정신적 의상의 역사(Eine seelische Kostumgeschichte)’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의상 하나에도 정신이 깃들어 있고, 정신 하나도 어떤 문화로든 표현된다는 것이다.
에곤 프리델이 <근대문화사>로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새로운 문화 이야기’는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세우겠다는 근대 계몽의 당찬 계획을 실패로 보았던 194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몽의 변증법>의 관점을 선취한 듯하다. 이는 <근대문화사>의 부제로 달려 있는 <흑사병에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영혼이 직면한 위기>라는 소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을 법하다. 이 위기의 근대화 과정을 프리델은 ‘실재론(Realismus)’에 대한 ‘유명론(Nominalismus)’의 승리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곧 신에 대한 이성의 승리이고, ‘귀납적 인간(induktiver Mensch)’에 대한 ‘연역적 인간(deduktiver Mensch)’의 승리를 함의한다. ‘연역적 인간’의 승리는 다양한 경험을 허용하지 않고 대전제가 되는 ‘이성’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것을 단박에 ‘불량종자(mauvis genre)’로 취급하는 데카르트적 이성의 패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성은 ‘형제가 없는 정신’이 될 수밖에 없고, 중세적 공동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바로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를 관통하는 문화프리즘이다. ‘형제가 없는 정신’을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말로 표현하면 ‘도구적 이성’이 될 것이다. 이런 이성의 궁극적 표현이 세계대전으로 귀결된다고 보는 것에서도 <근대문화사>와 <계몽의 변증법>은 서로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이성’에 내재하는 억압적 요소를 ‘계몽을 넘어서는 계몽’과 같은 반성적 계몽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반면에 전자는 지금까지의 세계를 구성해온 이분법적 체계, 즉 정신과 물질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오는 제3의 불빛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경험 심리학과 경험 물리학이 동일한 결과에 다다랐다. 즉 정신은 현실 너머에 서 있고, 물질은 현실 아래에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른 쪽에서부터 비쳐오는 흐릿한 불빛이 하나 반짝이고 있다.
유럽 문화사의 다음 장은 바로 이 불빛의 역사가 될 것이다.

에곤 프리델은 ‘유럽 문화사의 이 새로운 불빛’을 보지 않고 1938년 3월, 밤 10시경에 향년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의 ‘유쾌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군사적 ‘진지함’으로 ‘삶’을 억압하는 히틀러의 폭압적 군대가 오스트리아에 진입했을 때 4층 창밖으로 몸을 날려 죽음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사망한 지 77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른 쪽에서 비쳐오는 흐릿한 불빛 하나’ 볼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은 ‘유럽’이 직면했던 그 ‘영혼의 위기’뿐 아니라 ‘지구’ 전체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맞아 지구적 ‘삶 자체’가 위기에 봉착한 듯하다. 그것도 인간의 삶과 직접 관련된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불길한 여러 징후가 지구촌 곳곳에서 감지된다. 에곤 프리델의 말대로 왜 지구는 행복의 운명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반성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그 ‘흐릿한 불빛’은 이 반성에서 반짝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1931년, <근대문화사>가 출간되고 현지의 뜨거운 반응을 넘어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된 지도 한참 되었지만 우리는 이제야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아주 때늦게 빛을 보게 되었지만 이 빛의 탄생과정에 실로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독일어판 원서 1,600여 쪽이나 해당하는 분량의 책을 오늘 5권의 번역본으로 내기까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 책은 국내에서 빛을 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재단에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사실 수차례에 걸쳐 곤혹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고도 날카롭게 교정을 봐준 ‘한국문화사’의 이지은 팀장께 이 자리를 빌려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생활박자를 초스피드로 다그치는 신자유주의의 무서운 속도감을 고려치 않고, 각 권 평균 400쪽 이상 되는 5권의 책을 무심코 읽어달라고 용감하게 부탁해야 할 잠재적인 독자들에게도 미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 책이 오늘 우리 시대의 ‘고단한 영혼’을 달래주는 하나의 굄목이 될 수 있다면 역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목차

01 검은 금요일

누가 실재를 만드는가? | 비스마르크의 시대 | 프랑스의 행군 | 독일의 군사행동 | 중립국들 | 평화 | 코뮌 | 사회주의자보호법 | 문화투쟁 | 베를린 회의 | 전쟁 임박 | 2국 동맹.3국 동맹.재보장조약 | 독일 제국의 정신 | 뒤링 | 양식 없는 양식 | 마카르트 부케 | ‘독일 르네상스’ | 에펠탑 | 복장 | 마이닝겐 극단 | ‘종합예술’ | 최고의 연극 | 바그너의 곡선 | 「박쥐」 | 문학 | 빌헬름 부슈 | 전화기.백열등.자전거 | 입체화학 | 화성운하 | 전-인상주의자들 | 인상주의란 무엇인가? | 노동자 | 색채로 형성된 반기독교도 | 공쿠르 형제 | 졸라 |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 마지막 비잔틴 사람 | 악한의 변호 | 고발자 | 예술가의 증오

02 악마에게 끌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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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현실의 함몰

새로운 잠복기 | 분자로서의 우주 | 우주로서의 분자 | 시간은 장소의 한 기능이다 | 질량은 에너지다 | 동시성이란 없다 | 우주 속으로의 폭발 | 물병자리의 출현 | 역사의 몰락 | 논리학의 몰락 | 다다 | 드라마의 파국 | 예술의 자살 | 초현실주의 | 바벨탑 | 두 마리의 히드라 | 다섯 가지 가능성 | 메타심리학 | 부도덕의 노예반란 | 지하 세계에서 온 오르페우스 | 정신분석학의 도그마 | 전위된 물 자체 | 다른 쪽에서부터 비쳐오는 흐릿한 불빛

후기 / 울리히 바인치를 / 에곤 프리델의 삶과 <근대문화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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