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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조심하라, 이 책을 읽으면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앤터니 비버(역사학자, 《스페인 내전》 저자)
이 책은 스탈린 치하 러시아 사람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을 처음으로 열어젖혔다.
이 무시무시한 사회 실험에 관한 저자의 탁월한 기록은,
독자들을 소비에트 유토피아의 심장부로 안내한다.
- Marc Lambert · Scotsman
《속삭이는 사회》는 소비에트 억압 체제를 외부에서 분석하는 데 머물렀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어, 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인간관계, 가치관과 내면 심리에 끼친 영향을 당사자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한 최초의 책이다. 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 인터뷰와 무수한 편지 및 일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당대를 살아간 이들의 숨결까지 되살린다. 망가진 삶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산 생존자들, 부모의 상처를 대물림한 자식들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얻는다. 극한 상황이 불러온 끔찍한 야만과 타락, 그 틈에서 피어난 인간 의지와 고결함을 낱낱이 증언하고 고백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공동체를 꿈꾼 사상 최대의 인간 실험장,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러시아의 내밀한 목소리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집단적 인간’.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권력을 쥔 볼셰비키는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를 꿈꿨다. 개인적인 것은 곧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 사적 소유는 물론 사적 생활도 있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은 인간의 개인주의적 습성에 맞선 끊임없는 ‘전투’였다. 한 세기의 4분의 3에 걸친 세월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에 찬 사상 최대의 인간 실험장이 되었다.
《속삭이는 사회》는 이 거대한 실험의 대상이 된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의 실체를 복원한다.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불신과 공포에 짓눌려 살아간 2억 인민의 비극으로 귀결되기까지, 평범한 개인들, 가족, 이웃, 친구들의 내밀한 삶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전투’의 핵심 표적은 가족이었다. 볼셰비키의 눈에 가족은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었다. 아이는 이제 특정 부모의 자식이기에 앞서 국가의 자산이 되어야 했다. 볼셰비키 부모는 아직 학교에도 가지 않은 어린 자녀를 어른과 다름없는 ‘작은 동지’로 대접했다. 부부 싸움은 소비에트와 당 조직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비판받았다. 집을 가진 가족은 가난한 가족들과 의무적으로 방을 나누어 썼다. 사회주의 체제가 완성되면 개별 가족은 결국 사라질 것이고 이념적 단체와 조직이 가족을 대체할 것이었다. 마을, 학교, 직장에서도 ‘집단적 인간’의 창조를 위한 실험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다. 성실한 소비에트 시민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눈과 귀가 될 책임을 졌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불순분자는 남김없이 색출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의 끈이 끊어진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남편이 아내를 밀고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빌미가 되어 노동수용소로 끌려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은폐와 배신, 침묵과 타협, 자기 세뇌와 이중생활이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되었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 ‘속삭이며’ 살아야 했다.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통해
소비에트 체제의 실제 작동 과정을 들여다본다!
‘인간’과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해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체제를 둘러싼 의문과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에서도 ‘국가의 폭력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체제가 70여 년이나 지탱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문제는 소련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국가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속삭이는 사회》는 바로 이 문제를 중심에 두고 소비에트 사회의 실상을 면밀히 탐구한다.
《속삭이는 사회》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과 가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내면 세계를 통해 소비에트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고, 나아가 소비에트 체제의 작동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유례 없는 책이다. 제정 러시아와 러시아 혁명 연구로 널리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198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처음 이 책을 구상했다. 구상은 20여 년에 걸쳐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다듬어졌고, 2002년부터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페름, 알마아타, 노릴스크 등 구소련 지역 전역에 걸쳐 진행한 5년간의 심층 조사와 집필을 통해 마침내 이 역작이 탄생했다.
《속삭이는 사회》의 중심 등장인물은 혁명 초기, 즉 1917년부터 1925년 사이에 태어난 ‘혁명의 아이들’이다. 이 세대의 삶은 혁명과 러시아 내전, 신경제정책(NEP), 농업 집단화와 5개년 계획, 1931~1932년의 대기근, 1937~1938년의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체제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속삭이는 사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단면을 대표한다. 스탈린 시대에 국가 폭력을 경험한 희생자 가족들, 수용소 관리나 비밀경찰로 복무하며 체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사람들, 체제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순응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와 생활상이 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는 ‘소비에트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볼셰비키 혁명가부터, 자신의 가치관을 숨기거나 바꾸면서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에 적응해야 했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과 엘리트 출신들, ‘자본가 농민’ 쿨라크(kulak)로 낙인찍혀 수용소에 수감된 농민들,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는 잘 모르지만 당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으로 출세한 노동자·농민 출신의 1930년대 신흥 관료층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사회를 구성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이 책에는 수많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몇 세대에 걸쳐 상세하게 그려지는 가족들이 있다. 이들 가족의 역사는 소련 민중 전체의 역사를 대표한다. 이웃 소년에게 ‘쿨라크(부농)’로 고발당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났으나 먼 훗날 그들의 인생을 만신창이로 만든 소년을 기꺼이 용서한 골로빈 가족, 1917년 혁명의 세계주의 이상을 믿었으나 결국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라스킨 가족, 제정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철저한 스탈린주의자가 되었던 작가 시모노프의 가족이 그들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한 인간의 기구한 생애, 세기를 뛰어넘어 이어지는 한 가족의 비극적 연대기에는 장편 대하소설을 방불케 하는 무게와 감동이 있다.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공포 체제에 협력하게 만들었는가?
개인의 마음에 스며든 ‘소비에트 유토피아’의 진짜 모습을 밝힌다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스탈린 체제가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스며들어 그들의 가치관과 인간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을 스탈린 공포정치 체제의 조용한 방관자이자 협력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 체제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스며들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추적한다.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힘과 지속적인 유산은 국가 구조나 지도자 숭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 ‘우리 모두에게 침투한 스탈린 체제’에 있었다.”(1권 29쪽)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많은 개개인의 기억과 증언을 모으고 재구성하여, 저자는 스탈린 시대의 전체상을 보여주는 장대한 모자이크를 엮어내 독자 앞에 펼친다. “볼셰비키 혁명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건설이라는 대의를 향해 돌진하던 시대에 냉혹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지금의 러시아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한다.”(‘옮긴이 후기’·2권 591쪽) 《속삭이는 사회》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소비에트 유토피아’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밝혀낸 독보적 저작이다.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결국 평범한 소련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소비에트 체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파이지스는 소련 인민들이 ‘소비에트 가치’를 받아들인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 기근 등으로 황폐화된 소비에트 현실 세계에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열정 때문이 아니라, 계급 투쟁 과정에서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점에서 기존 주장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트 사회의 기본 버팀목이었는지, 아니면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수동적인 순응주의적 태도가 소비에트 사회를 유지한 원동력이었는지는 여전히 역사가들의 흥미를 끄는 중요한 문제이다. ― ‘옮긴이 후기’(2권 591쪽)에서
이제까지 스탈린 체제에 대해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역사’는 많았으나, 이처럼 체제가 개개인의 일상과 내면에 끼친 영향을 깊이 탐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드물었다. 레닌이나 스탈린, 트로츠키 같은 유명한 혁명가나 지도자가 아니라, 공적 역사에 통계 숫자로 남은 수많은 평범한 가족들의 숨겨진 역사를 통해 소련 체제를 살아간 보통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은 이 책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나 역사적 평가 면에서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공적 역사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추로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지닌 중요성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사회 구조, 정치, 경제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한 시대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속삭이는 사람들’에게서 찾은 억눌린 기억‘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복원한 소비에트 사회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 시대 자행된 억압의 진상을 단순히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스탈린이라는 지도자나 스탈린 체제를 역사학자로서 분석하는 차원에서 만족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를 살아간 당사자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정치와 사건의 역사를 넘어선 ‘마음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191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온, 또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온 평범한 러시아의 ‘갑남을녀’들이다.
《수용소 군도》의 작가 솔제니친을 필두로 하여 여러 억압 생존자들이 회고록을 발표한 바 있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 시대의 기억을 묻어 둔 채 묵묵히 살아왔다.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괴로워서이기도 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 끌려갈 수 있었던 시대에 뿌리박힌 공포심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상 존재하는 상호 감시와 언제 닥칠지 모를 체포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자식에게까지 전해졌고, 지금도 러시아 사회에 널리 퍼진 정서로 자리 잡고 있다.
“‘속삭이는 사람(whisperer)’에 해당하는 러시아어에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shepchushchii)’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몰래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사람(sheptun)’이다.”(1권 28~29쪽) 《속삭이는 사회》의 제목에도 반영된 이 단어는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조용하고 순응적인 주민은 스탈린 통치가 낳은 지속적인 결과다. 골로빈 집안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심지어 일부는 안토니나처럼 아주 가까운 친구나 친척에게까지 과거를 숨겼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가족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집 밖에서 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배웠다. “우리 같은 아이들이 배워야 할 듣기와 말하기 규칙 같은 게 있었어요.”라고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중간 간부급 볼셰비키의 딸은 말했다.
“어른들이 속삭이는 것을 엿듣거나 몰래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어른들의 대화를 우리가 들었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아는 것만으로도 곤경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하고는 우리에게 ‘벽에도 귀가 달려 있지’, ‘입조심해’ 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표현이, 어른들이 방금 말한 것이 우리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머리말’(1권 27~28쪽)에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스탈린 시대의 경험은 러시아 사람들의 내면 심리와 가치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인간관계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피해자였던 기억, 가해자였던 기억, 방관자였던 기억으로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속삭이는 사회》는 침묵이 삶의 방식이 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부여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술과 숨겨진 개인 자료에서 발굴한 ‘아래로부터의 역사’
이 책은 편지와 사진, 일기, 개인 문서 등 주로 각 가족들이 간수해 온 사적인 자료와, 러시아의 인권 단체인 ‘메모리알 협회’의 도움을 받아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삼아 씌어졌다. 저자는 총 1천 명 이상의 사람들과 진행한 전화 인터뷰에서 수집한 원 자료를 확인하고 이 책의 구술사 프로젝트에 포함할 가족들을 선택했다. 소련 사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편중되지 않은 표본을 선정하는 데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으며, 인터뷰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개인의 주관적인 ‘기억’을 토대로 한다는 구술사의 약점을 극복했다.
연구의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해 저자는 연구 대상이 된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자 힘썼다. 이 책에는 익명으로 된 증언이 없다. 한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실명을 밝히는 데 동의했다. 또한 저자는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들에게 책의 초고 중 그들의 증언이 나오는 부분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증언이 왜곡되지 않고 타당한 맥락에서 인용되었는지를 본인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끔 했다.
저자가 심층 인터뷰를 위해 열 번 이상 집에 찾아가 긴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사람들의 입이 열리고 내밀한 체험담이 쏟아져 나오기까지, 일기, 편지, 사진 등 집안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를 건네받기까지는 차근차근 신뢰를 쌓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을 통해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여러 가족의 내밀한 역사를 《속삭이는 사회》에 담을 수 있었다.
▶▶내용 미리보기
가족의 소멸을 향해
“우리는 아이들을 가족의 유해한 영향력으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
우리는 아이들을 국유화해야 한다.”
― 1장 1917년 혁명의 아이들(1917~1928)·69~70쪽
열일곱 살 소녀 옐리자베타 드라프키나는 볼셰비키 혁명 본부인 스몰니 학원에서 12년 만에 아버지와 상봉했다. 때는 1917년 10월, 혁명 직전이었다. 혁명가였던 아버지 구세프는 옐리자베타가 다섯 살 때 차르 경찰의 눈을 피해 가족과 연을 끊고 지하에서 활동해 왔다. 평범한 부녀 사이였다면 감격에 찬 순간이었을 이들의 재회는 지극히 메마르고 덤덤한 것이었다.
“구세프 동지, 전 당신 딸입니다. 한 끼 사먹을 수 있게 3루블만 주세요.” ……
“물론이죠, 동지.” 구세프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녹색의 3루블 지폐를 꺼냈다. 나는 돈을 받았고, 고맙다고 인사했으며 점심을 한 그릇 더 사먹었다. ― 1장 1917년 혁명의 아이들(1917~1928)·42~43쪽
구세프와 옐리자베타 부녀는 그 뒤로도 계속 각자 혁명 활동에 몰두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만나더라도 결코 가족처럼 지내지 못했다. 인간 해방을 위한 결전이 벌어지던 혁명 러시아에서 가족 같은 개인사를 생각하는 일은 곧 ‘속물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 배가 고픈 나머지 그만 아버지에게 말을 걸기는 했으나, 볼셰비키로서 옐리자베타도 이 가치관에 근본적으로 동의했다.
이 혁명가 부녀의 재회 이야기를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무척 좋아해서, 나중에 그의 측근이 된 옐리자베타에게 청해 몇 번이고 다시 듣곤 했다. “이 일화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과 이타적 헌신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의 여러 집단에서 전설이 되었다.”(1권 43쪽)
볼셰비키는 바로 옐리자베타와 구세프 같은 인간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스탈린의 말을 빌리면 “진정한 볼셰비키는 당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질 수도 없었다.”(1권 43쪽) 사회주의적 인간은 사생활이 아니라 공동선을, 철저히 공적인 목표만을 추구해야 했다. 공적인 목표란 바로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이었다.
아파트 공산주의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비밀은 전혀 없었지요.
우리는 모두 동등했고 똑같았어요.”
― 3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뒷면(1932~1936)·317쪽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개개인의 집에서부터 실현되었다. 소련 도시에서 가장 흔한 주거 유형은 공동 아파트(콤무날카kommunalka)였다. 한 아파트에서 여러 가족이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하며 함께 사는 형태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는 1930년대 중반 주민의 4분의 3이 공동 아파트에 살았다.
“공동 아파트는 공산주의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사람들에게 주거 공간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볼셰비키는 그들의 기본 사고와 행동을 좀 더 공산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1권 306쪽)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공동 생활이 그들에게 소비에트 체제의 공적 가치인 노동에 대한 사랑, 검소함, 복종, 순응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1권 317쪽)
그 시절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 문을 열어놓고 살았고, 우리 같은 아이들은 집 전체를 자유롭게 썼습니다. ……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갖고 나와 마치 한 가족처럼 국경일을 축하하곤 했습니다.
― 3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뒷면(1932~1936)·335쪽
그러나 공동 아파트가 이상적인 천국이지만은 않았다. 사적 공간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엄청난 불편함을 감수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주거 면적은 최악의 경우 1평 이하 수준까지 떨어졌다. 모두가 공유해야 했던 화장실과 부엌에서 특히 갈등이 심했다. 레닌그라드의 한 공동 아파트에서는 “48명이 변기 하나를 같이 썼다.”(1권 313쪽) 한 개의 부엌에서 “여자 30명이 동시에 요리하는 광경을 떠올려보세요.”(1권 310~311쪽)라고 공동 아파트에서 성장한 한 소녀는 회고한다.
공동 아파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사생활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수건과 세면 도구, 냄비와 팬, 접시, 포크와 나이프, 심지어 소금과 후추도 방에 간수했다.”(1권 314쪽) 자기 물건을 남이 훔쳐 쓴다는 의심, 남의 물건을 보며 느끼는 시기심이 만연했다.
공동 아파트는 국가의 감시 권력을 가정의 사적 공간으로 확장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공동 아파트의 주민들은 이웃들의 개인적 습관, 방문객과 친구, 구입한 물건, 먹은 음식, 전화로 말한 내용(전화는 보통 복도에 있었다), 심지어 벽이 매우 얇았기 때문에(그리고 많은 방에서 벽이 천장까지 닿지 않았다) 방에서 말한 내용까지 거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1권 308쪽) 정부 당국은 사람들에게 이웃의 대화를 엿듣고 밀고하라고 독려했다.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뉘앙스가 담긴 아주 사소한 언행이라도 고발당하고 체포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한 거주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경험한 체포, 투옥, 유형과는 또 다른 억압의 느낌이었으나, 몇 가지 점에서 더 안 좋았습니다. 유형을 당했을 때는 자의식을 보존했지만, 공동 아파트에서는 내적 자유와 개별성을 억압당한다고 느꼈습니다. 부엌에 갈 때마다 한 무리의 작은 군중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기에 억압을 느꼈고 나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불가능했죠.
― 3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뒷면(1932~1936)·317쪽
시민의 의무, 감시와 고발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아내하고만 자유롭게 말을 한다.
그것도 밤에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말이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18쪽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 스탈린 시대 소련에 널리 퍼진 관용구다. 소비에트 시민들은 섣부른 한마디로 체포당할 것을 걱정하며 이 말을 교훈으로 새겼다. 그리고 정부를 대신하여 ‘벽에 달린 귀’ 역할을 수행한 것 역시 똑같은 소비에트 시민들이었다.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소비에트 사회 특유의 풍조는 스탈린 이전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볼셰비키는 “동지의 사적인 견해나 행실이 당의 단결을 위협한다고”(1권 93~94쪽) 여겨질 때 그것을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스탈린이 집권하고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이 세력을 키워 가면서 감시와 고발은 시민의 의무로서 더욱 강력하게 권장되었다. 전쟁의 위협에 직면한 스탈린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틈을 타 소비에트 체제에 적대적인 첩자들, 즉 숨어 있는 ‘인민의 적’들이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무너뜨리리라는 두려움에 빠졌다. 스탈린의 공포가 절정에 달한 1937년과 1938년에는 이후 ‘대숙청’이라고 불리게 될 전대미문의 체포 열풍이 불었다. “체포된 사람의 단 5퍼센트만이라도”(1권 398쪽) 실제 ‘인민의 적’이라면 95퍼센트가 결백하다 하더라도 모든 체포가 정당한 것이었다. 이 체포의 상당 부분이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상적 감시와 고발에서 비롯했다.
출신 배경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찾습니다. 남편이 체포된 여자가 있다고 해보죠. 대화는 이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한 소비에트 시민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을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자신은 좋은 시민이라고 말하지요.”
“예,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도와주세요. 소련에 반대하는 행동이나 대화를 인지하면 무슨 내용이든 우리한테 알려주세요.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전에 당신이 알게 된 것, 누가 무슨 말을 했고, 그들이 이야기할 때 누가 같이 있었는지를 적어야 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정말 좋은 소비에트 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일터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당신을 도와줄 것입니다. 이를테면 해고되거나 강등될 경우 당신은 우리의 도움을 받게 될 겁니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36쪽
감시와 고발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체포된 가족을 도와주겠다는 경찰의 꾐에 빠져 다른 사람을 고발해서 체포되게 만들었다. 이들은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살아남고 자리 잡고자 안간힘을 썼다. 고자질은 ‘소비에트 시민’으로서 자신이 지닌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이었다. 고발할 만한 사람을 고발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른 누군가가 고발하기 전에 서둘러 고발했다.”(1권 435쪽)
침묵과 순응이 지배하는 사회
“사람들은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25쪽
사람들은 말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친구와도, 이웃과도, 심지어 가족과도 터놓고 대화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면 뒤에 진짜 자아를 숨겼다. 어느 누구도 가면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평범한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첩자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이 점점 일반적인 일이 되어 갔다. 공포가 은폐를 부르고, 은폐가 다시 공포를 부르는 악순환이었다. 대숙청에서 아버지를 잃은 한 여성은 이렇게 회고한다.
“너는 네 혀 때문에 곤욕을 치를 거야.” 사람들은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하기를 두려워하면서 삶을 견뎌 나갔다. 엄마는 두 명 중 한 명은 정보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이웃과, 특히 경찰이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말하는 것이 두렵다. 나는 내 의견을 주장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수가 없으며, 항상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물러선다. 이것은 내 성격으로 자리 잡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일 때 그런 식으로 길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경찰을 보면 두려움으로 떨기 시작한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19쪽
공포에 떨면서도 사람들은 가족을 의심할지언정 체제를 의심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에게 당 지도부가 하는 말을 의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숙청의 희생자들조차 ‘인민의 적’의 존재를 계속 믿었다. 그들은 자신이 부당하게 체포된 것이 ‘인민의 적’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인민의 적’으로 오해받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스탈린에게 가족들을 석방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나는 며칠 뒤에 스탈린이 내 편지를 읽고서는 ‘무슨 일이야? 왜 정직한 사람이 체포되었지? 당장 석방하고 그에게 사과하시오.’라고 말할 것이라고 상상했다.”(1권 462쪽) “스탈린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보다 스탈린이 인민의 적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고 계속 생각한다면, 징벌을 받으면서도 이겨내기가 더 쉬웠다.”(1권 456쪽)고 한 희생자는 회고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고통이 스탈린 탓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지만 궁금해했을 뿐이다. ……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탈린은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조만간 우리는 (유형에서) 풀려날 거야.” ……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겠지만, 스탈린의 정의를 믿으면 심리적으로 삶을 견뎌내기가 훨씬 쉬웠다. 자기기만은 공포를 가라앉혀주었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56~457쪽
아버지를 고발한 소년 영웅
“저는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인민의 적은 제게 아버지일 수가 없습니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97쪽
소비에트 사회의 아이들은 부모를 고발하는 것이 훌륭한 행동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실제로 아버지를 고발했다고 알려진 열다섯 살 소년 파블리크 모로조프는 많은 아이들의 영웅이었다. 소련 언론은 파블리크 소년을 순교자이자 모든 청소년들의 본보기로 앞장서 칭송했다.
1931년 11월 마을 학교에서 열린 트로핌의 재판을 보도한 언론에 따르면, 파블리크는 아버지의 범죄를 고발했고 트로핌이 “난 네 아비다, 네 아비라고!” 하며 소리치자 재판관에게 말했다. “예, 그 사람은 제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아들이 아니라 피오네르(공산주의 소년단원)로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트로핌은 극북의 노동수용소형을 선고받았고 그 후 총살당했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23쪽
아이들은 파블리크 이야기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가족 간의 사랑보다 더 높은 미덕이라는 것을 배웠다. “친구와 친척들을 밀고하는 일은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 공공심이 투철한 것이라는 사상이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뿌려졌다.”(1권 225쪽) 부모들은 자식에게 입 조심하라고 당부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말하기를 조심해야 했다. 한 아버지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내 아이에게 스탈린을 비난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파블리크 모로조프 이야기 이후 아들 앞에서도 경솔한 말이 무심코 튀어나올까 두려웠다. 왜냐하면 아들이 학교에서 그 말을 무심코 입에 올리면 학교 이사회가 그것을 보고할 것이고, 아이에게 “너 어디서 그 말을 들었니?”라고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32쪽
비극적이게도, 특히 어릴 적 국가에 부모를 빼앗긴 아이들이 모로조프를 더욱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모가 총살당하거나 노동수용소에 끌려간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부모의 사랑을 모른 채 자랐고, 오히려 부모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었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체제에서 배척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아들은 ‘인민의 적’의 자식으로서 체제에서 소외당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체제의 가치에 복종하여 체제에 인정받고 편입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우리는 가족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파블리크가 아버지를 배반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부르주아 계급의 구성원인 쿨라크를 잡았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그는 우리 눈에 영웅이었다. 우리에게 모로조프 이야기는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전적으로 계급 투쟁에 관한 이야기였다. ― 5장 죽은 자와 산 자(1938~1941)·57쪽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낙인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총살당한 것처럼 너도 총살되어야 해.”
― 5장 죽은 자와 산 자(1938~1941) ·59쪽
소비에트 체제는 사실상 철저한 ‘연좌제’의 사회였다. 부모를 고발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자식들이 ‘범죄자’ 부모와 연을 끊었다. ‘인민의 적’으로 체포당한 부모를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학교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신문에는 부모와 절연하겠다고 선언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수천 건 실렸다.
나, 니콜라이 이바노프는 전직 성직자인 아버지가 오랫동안 신이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했기 때문에 그를 부인한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와 모든 관계를 끊는 이유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33~234쪽
나는 이제 이 가족의 일부임을 거부한다. 나는 내 진짜 아버지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준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단)이라고 느낀다. 내 진짜 어머니는 우리의 모국이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 소련의 인민들이 지금 나의 가족이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34쪽
두 번째 선언문을 쓴 열여섯 살 소년에게 가족과 연을 끊기를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식이 출세하려면 가족과 단절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식에게 가족을 거부하라고 권한 부모는 이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체포되어 노동수용소에 갇힌 한 어머니는 엄마에게 정말 죄가 있느냐고 묻는 열다섯 살 딸의 편지에 그렇다고 답장을 썼다. 그녀는 이후 딸에게서 다시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 딸이 소비에트 정부를 증오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게 나아요.”라며 그녀는 울었다.(1권 499쪽)
‘인민의 적’의 자식들을 배척하는 한편으로, 체제는 과거를 철저히 버리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인민의 적’의 자식이라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수많은 ‘인민의 적’의 자식들이 체제에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절실한 욕구에 떠밀려 누구보다도 앞장서 체제에 헌신했다. “소비에트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저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2권 63쪽) 체포되어 유형당한 쿨라크(부농)의 아들 드미트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그것이야말로 당에 바란 소망이었다. 나는 출세를 위해 입당을 원하지 않았다. 나에게 당은 정직과 헌신의 상징이었다. 당에는 정직하고 훌륭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나는 내가 그들의 일원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 5장 죽은 자와 산 자(1938~1941)·79쪽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숨기지 않은 탓에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따돌림을 당해 나와야 했고, 이후 새로 다니게 된 대학에서는 퇴학당했다. 그 뒤에는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결국 그 자신도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런데도 그는 당을 숭배했다. 입당을 거부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드미트리는 “60년이 지난 뒤에도 손이 떨렸고 …… 감정에 북받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2권 78쪽)
많은 ‘인민의 적’의 자식들이 출신 배경을 숨겼다. 체포된 성직자의 아들이었던 레오니트는 명석한 아이였지만 아버지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는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서 겨우 기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전기 기술자로서 소비에트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었다.”라고 그는 인정한다. “출세하려면 과거를 비밀에 부쳐야 했다. ……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진실이 알려지면, 내 명성에 금이 갔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쌓아 온 지위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265쪽
레오니트는 지금까지도 스탈린이 아버지를 체포한 원흉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직자의 아들인 자신에게 공장의 고위 책임자로서 출세할 기회를 준 스탈린에게 감사하고 있다.
독재자의 죽음, 통곡하는 사람들
“왜 그렇게 울부짖고 있나요?
스탈린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337쪽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던 25년 동안 약 2500만 명이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억압당했다. 이들은 1941년 기준으로 약 2억 명에 달하던 소련 인구의 8분의 1을 차지한다. “평균을 내면 소련의 1.5 가족당 1명을 나타낸다.”(1권 27쪽) 총살당하고 수용소에 갇힌 이들 희생자뿐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 자식, 남편과 아내를 잃어버린 그들의 가족도 삶과 정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죽었을 때 러시아를 뒤덮은 감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충격 하늘이 스탈린을 사랑할 이유가 없는 억압의 피해자들 중 많은 이 스탈스탈린의 부고를 듣고 눈물을 흘렸늘이 대숙청 때 감옥에서 2년을 보낸 시인 베르골츠조차 자신을 고문한 자를 애도하는 시를 썼다.
심장은 피를 흘리고 ……
우리의, 우리의 친애하는 이여!
당신의 머리를 팔로 감싸고,
국민은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333쪽
많은 소련 사람들에게 스탈린은 그 자체로 세계였다. 스탈린의 죽음은 마치 세계의 종말과도 같았다. 그들은 스탈린의 그늘 아래에서 성장했고 그들의 모든 생각은 스탈린이 형성한 것이었다.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경험한 고통과 상관없이, 스탈린의 부재는 사람들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한 억압의 피해자는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흘린 눈물에 스스로 놀랐고, 스탈린이 자신에게 지닌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모든 질문을 그에게 던졌고, 그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든 답변을 주었다.”(2권 335쪽)
할머니는 스탈린 대신 자기가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내가 죽고 스탈린이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 나는 할머니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나도 스탈린을 사랑했다. 그러나 오늘(2003년) 나는 할머니에게 말할 것이다. “할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딸은 체포되었고, 손자와 손녀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사위는 총살당했다. 할머니의 남편마저 성직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 그러나 할머니는 스탈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335~336쪽
스탈린의 죽음은 대부분의 소련 사람들에게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더 큰 공포를 가져왔다. 스탈린이 지배하는 세계는 행복하지 않더라도 익숙한 세계였다. 스탈린이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사정이 훨씬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2권 337쪽) 스탈린의 죽음에 보복하고자 정부가 더 많은 사람들을 체포할 수도 있었다. 억압의 장본인이 스탈린이 아니라 스탈린의 부하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스탈린의 망령과 ‘만들어진 기억’
“이곳은 해빙이 되기에는 너무 얼어 있고, 지금까지도 스탈린이 살아 있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여전히 따뜻하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526쪽
스탈린이 죽고, 노동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이 풀려나고, 부당하게 체포된 사람들의 복권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탈린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04년에 저자가 인터뷰한 한 억압 피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는 노동수용소에서 10년을 강제 노동에 바쳤다.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다. 어른이 된 뒤로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 나는 벌써 50년 전에 복권이 됐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헌법에 따르면, 그들은 내 사생활에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458쪽
그처럼 깊은 상처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울지도 않았다.”(2권 459쪽) 사람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인내하며 침묵을 지키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고통을 되새기는 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침묵한다고 괴로운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학에서는 감정을 말로 드러내야 정신적 외상에서 회복하기 쉽다고 한다. “참고 견디는 태도는 사람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동적이고 운명에 순응하게 만들 수도 있다.”(2권 459~460쪽)고 저자는 말한다. 침묵이 오래 지속될수록 오히려 입 밖에 내지 않은 괴로운 기억은 치유되지 않은 채 희생자를 계속 짓누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억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신화를 만들어 기억과 뒤섞었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위안을 얻으려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수용소 수감자 중에는 자신들이 강제 노동을 통해 소비에트 경제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자신이 공헌했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껴안고 살아갈 수 있게”(2권 506쪽) 도와주었다. 다음은 이십 대 초반에 노릴스크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예순 넘어서까지 강제 노동에 동원된 노인의 회고다.
이 훈장들은 모두 (사회주의 경쟁의) 승리자들을 위한 거라오. 야금 승리자, 제9차 5개년 계획(1971~1975)의 승리자 ……. 아, 저거 하나는 뭔지 잊어버렸구먼. …… 그리고 여기 이 훈장들은 ‘(노릴스크) 단지의 역전의 용사’와 ‘소련 역전의 용사’에게 준 건데,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노동을 했다고 받은 거요. 이쪽의 이 훈장은 단지가 군사화되었을 때인 대조국전쟁 시기의 역전의 용사들을 위한 기념 훈장이지. …… 나는 전쟁에서 내가 했던 역할이 자랑스럽소. 시민으로서 애국적 의무를 다했다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509쪽
2005년 1월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러시아인의 42퍼센트가 ‘스탈린 같은 지도자’의 복귀를 원했다.”(2권 510쪽) 스탈린 시대에는 삶의 방향이 뚜렷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모두가 공유하는 미래의 희망이 있었다.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진 뒤 러시아는 한편으로 더 살기 어려워졌다. 물가와 범죄율이 치솟은 현재의 러시아와 달리, 스탈린 시대에는 상점에 생필품이 충분했고 사회에 질서와 규율이 있었다고 많은 노인들이 회상한다. 그들에게 스탈린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그 믿음에 청춘을 바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앞날이 좋을 거라고 믿었어요. 우리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면 삶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 우리는 지상에 천국을 창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만인이 풍족하게 사는 사회, 평화가 있고 더는 전쟁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 믿음은 진실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우리가 물질적 문제 대신에 미래를 위한 교육과 작업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보다 그때 우리가 하는 일에 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얼 믿고 있죠? 우리는 이상(理想)이 없습니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515쪽
- 앤터니 비버(역사학자, 《스페인 내전》 저자)
이 책은 스탈린 치하 러시아 사람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을 처음으로 열어젖혔다.
이 무시무시한 사회 실험에 관한 저자의 탁월한 기록은,
독자들을 소비에트 유토피아의 심장부로 안내한다.
- Marc Lambert · Scotsman
《속삭이는 사회》는 소비에트 억압 체제를 외부에서 분석하는 데 머물렀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어, 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인간관계, 가치관과 내면 심리에 끼친 영향을 당사자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한 최초의 책이다. 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 인터뷰와 무수한 편지 및 일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당대를 살아간 이들의 숨결까지 되살린다. 망가진 삶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산 생존자들, 부모의 상처를 대물림한 자식들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얻는다. 극한 상황이 불러온 끔찍한 야만과 타락, 그 틈에서 피어난 인간 의지와 고결함을 낱낱이 증언하고 고백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공동체를 꿈꾼 사상 최대의 인간 실험장,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러시아의 내밀한 목소리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집단적 인간’.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권력을 쥔 볼셰비키는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를 꿈꿨다. 개인적인 것은 곧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 사적 소유는 물론 사적 생활도 있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은 인간의 개인주의적 습성에 맞선 끊임없는 ‘전투’였다. 한 세기의 4분의 3에 걸친 세월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에 찬 사상 최대의 인간 실험장이 되었다.
《속삭이는 사회》는 이 거대한 실험의 대상이 된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의 실체를 복원한다.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불신과 공포에 짓눌려 살아간 2억 인민의 비극으로 귀결되기까지, 평범한 개인들, 가족, 이웃, 친구들의 내밀한 삶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전투’의 핵심 표적은 가족이었다. 볼셰비키의 눈에 가족은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었다. 아이는 이제 특정 부모의 자식이기에 앞서 국가의 자산이 되어야 했다. 볼셰비키 부모는 아직 학교에도 가지 않은 어린 자녀를 어른과 다름없는 ‘작은 동지’로 대접했다. 부부 싸움은 소비에트와 당 조직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비판받았다. 집을 가진 가족은 가난한 가족들과 의무적으로 방을 나누어 썼다. 사회주의 체제가 완성되면 개별 가족은 결국 사라질 것이고 이념적 단체와 조직이 가족을 대체할 것이었다. 마을, 학교, 직장에서도 ‘집단적 인간’의 창조를 위한 실험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다. 성실한 소비에트 시민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눈과 귀가 될 책임을 졌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불순분자는 남김없이 색출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의 끈이 끊어진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남편이 아내를 밀고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빌미가 되어 노동수용소로 끌려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은폐와 배신, 침묵과 타협, 자기 세뇌와 이중생활이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되었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 ‘속삭이며’ 살아야 했다.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통해
소비에트 체제의 실제 작동 과정을 들여다본다!
‘인간’과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해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체제를 둘러싼 의문과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에서도 ‘국가의 폭력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체제가 70여 년이나 지탱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문제는 소련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국가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속삭이는 사회》는 바로 이 문제를 중심에 두고 소비에트 사회의 실상을 면밀히 탐구한다.
《속삭이는 사회》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과 가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내면 세계를 통해 소비에트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고, 나아가 소비에트 체제의 작동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유례 없는 책이다. 제정 러시아와 러시아 혁명 연구로 널리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198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처음 이 책을 구상했다. 구상은 20여 년에 걸쳐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다듬어졌고, 2002년부터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페름, 알마아타, 노릴스크 등 구소련 지역 전역에 걸쳐 진행한 5년간의 심층 조사와 집필을 통해 마침내 이 역작이 탄생했다.
《속삭이는 사회》의 중심 등장인물은 혁명 초기, 즉 1917년부터 1925년 사이에 태어난 ‘혁명의 아이들’이다. 이 세대의 삶은 혁명과 러시아 내전, 신경제정책(NEP), 농업 집단화와 5개년 계획, 1931~1932년의 대기근, 1937~1938년의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체제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속삭이는 사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단면을 대표한다. 스탈린 시대에 국가 폭력을 경험한 희생자 가족들, 수용소 관리나 비밀경찰로 복무하며 체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사람들, 체제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순응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와 생활상이 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는 ‘소비에트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볼셰비키 혁명가부터, 자신의 가치관을 숨기거나 바꾸면서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에 적응해야 했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과 엘리트 출신들, ‘자본가 농민’ 쿨라크(kulak)로 낙인찍혀 수용소에 수감된 농민들,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는 잘 모르지만 당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으로 출세한 노동자·농민 출신의 1930년대 신흥 관료층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사회를 구성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이 책에는 수많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몇 세대에 걸쳐 상세하게 그려지는 가족들이 있다. 이들 가족의 역사는 소련 민중 전체의 역사를 대표한다. 이웃 소년에게 ‘쿨라크(부농)’로 고발당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났으나 먼 훗날 그들의 인생을 만신창이로 만든 소년을 기꺼이 용서한 골로빈 가족, 1917년 혁명의 세계주의 이상을 믿었으나 결국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라스킨 가족, 제정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철저한 스탈린주의자가 되었던 작가 시모노프의 가족이 그들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한 인간의 기구한 생애, 세기를 뛰어넘어 이어지는 한 가족의 비극적 연대기에는 장편 대하소설을 방불케 하는 무게와 감동이 있다.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공포 체제에 협력하게 만들었는가?
개인의 마음에 스며든 ‘소비에트 유토피아’의 진짜 모습을 밝힌다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스탈린 체제가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스며들어 그들의 가치관과 인간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을 스탈린 공포정치 체제의 조용한 방관자이자 협력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 체제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스며들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추적한다.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힘과 지속적인 유산은 국가 구조나 지도자 숭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 ‘우리 모두에게 침투한 스탈린 체제’에 있었다.”(1권 29쪽)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많은 개개인의 기억과 증언을 모으고 재구성하여, 저자는 스탈린 시대의 전체상을 보여주는 장대한 모자이크를 엮어내 독자 앞에 펼친다. “볼셰비키 혁명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건설이라는 대의를 향해 돌진하던 시대에 냉혹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지금의 러시아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한다.”(‘옮긴이 후기’·2권 591쪽) 《속삭이는 사회》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소비에트 유토피아’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밝혀낸 독보적 저작이다.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결국 평범한 소련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소비에트 체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파이지스는 소련 인민들이 ‘소비에트 가치’를 받아들인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 기근 등으로 황폐화된 소비에트 현실 세계에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열정 때문이 아니라, 계급 투쟁 과정에서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점에서 기존 주장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트 사회의 기본 버팀목이었는지, 아니면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수동적인 순응주의적 태도가 소비에트 사회를 유지한 원동력이었는지는 여전히 역사가들의 흥미를 끄는 중요한 문제이다. ― ‘옮긴이 후기’(2권 591쪽)에서
이제까지 스탈린 체제에 대해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역사’는 많았으나, 이처럼 체제가 개개인의 일상과 내면에 끼친 영향을 깊이 탐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드물었다. 레닌이나 스탈린, 트로츠키 같은 유명한 혁명가나 지도자가 아니라, 공적 역사에 통계 숫자로 남은 수많은 평범한 가족들의 숨겨진 역사를 통해 소련 체제를 살아간 보통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은 이 책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나 역사적 평가 면에서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공적 역사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추로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지닌 중요성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사회 구조, 정치, 경제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한 시대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속삭이는 사람들’에게서 찾은 억눌린 기억‘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복원한 소비에트 사회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 시대 자행된 억압의 진상을 단순히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스탈린이라는 지도자나 스탈린 체제를 역사학자로서 분석하는 차원에서 만족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를 살아간 당사자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정치와 사건의 역사를 넘어선 ‘마음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191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온, 또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온 평범한 러시아의 ‘갑남을녀’들이다.
《수용소 군도》의 작가 솔제니친을 필두로 하여 여러 억압 생존자들이 회고록을 발표한 바 있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 시대의 기억을 묻어 둔 채 묵묵히 살아왔다.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괴로워서이기도 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 끌려갈 수 있었던 시대에 뿌리박힌 공포심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상 존재하는 상호 감시와 언제 닥칠지 모를 체포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자식에게까지 전해졌고, 지금도 러시아 사회에 널리 퍼진 정서로 자리 잡고 있다.
“‘속삭이는 사람(whisperer)’에 해당하는 러시아어에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shepchushchii)’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몰래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사람(sheptun)’이다.”(1권 28~29쪽) 《속삭이는 사회》의 제목에도 반영된 이 단어는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조용하고 순응적인 주민은 스탈린 통치가 낳은 지속적인 결과다. 골로빈 집안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심지어 일부는 안토니나처럼 아주 가까운 친구나 친척에게까지 과거를 숨겼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가족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집 밖에서 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배웠다. “우리 같은 아이들이 배워야 할 듣기와 말하기 규칙 같은 게 있었어요.”라고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중간 간부급 볼셰비키의 딸은 말했다.
“어른들이 속삭이는 것을 엿듣거나 몰래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어른들의 대화를 우리가 들었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아는 것만으로도 곤경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하고는 우리에게 ‘벽에도 귀가 달려 있지’, ‘입조심해’ 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표현이, 어른들이 방금 말한 것이 우리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머리말’(1권 27~28쪽)에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스탈린 시대의 경험은 러시아 사람들의 내면 심리와 가치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인간관계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피해자였던 기억, 가해자였던 기억, 방관자였던 기억으로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속삭이는 사회》는 침묵이 삶의 방식이 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부여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술과 숨겨진 개인 자료에서 발굴한 ‘아래로부터의 역사’
이 책은 편지와 사진, 일기, 개인 문서 등 주로 각 가족들이 간수해 온 사적인 자료와, 러시아의 인권 단체인 ‘메모리알 협회’의 도움을 받아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삼아 씌어졌다. 저자는 총 1천 명 이상의 사람들과 진행한 전화 인터뷰에서 수집한 원 자료를 확인하고 이 책의 구술사 프로젝트에 포함할 가족들을 선택했다. 소련 사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편중되지 않은 표본을 선정하는 데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으며, 인터뷰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개인의 주관적인 ‘기억’을 토대로 한다는 구술사의 약점을 극복했다.
연구의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해 저자는 연구 대상이 된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자 힘썼다. 이 책에는 익명으로 된 증언이 없다. 한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실명을 밝히는 데 동의했다. 또한 저자는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들에게 책의 초고 중 그들의 증언이 나오는 부분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증언이 왜곡되지 않고 타당한 맥락에서 인용되었는지를 본인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끔 했다.
저자가 심층 인터뷰를 위해 열 번 이상 집에 찾아가 긴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사람들의 입이 열리고 내밀한 체험담이 쏟아져 나오기까지, 일기, 편지, 사진 등 집안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를 건네받기까지는 차근차근 신뢰를 쌓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을 통해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여러 가족의 내밀한 역사를 《속삭이는 사회》에 담을 수 있었다.
▶▶내용 미리보기
가족의 소멸을 향해
“우리는 아이들을 가족의 유해한 영향력으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
우리는 아이들을 국유화해야 한다.”
― 1장 1917년 혁명의 아이들(1917~1928)·69~70쪽
열일곱 살 소녀 옐리자베타 드라프키나는 볼셰비키 혁명 본부인 스몰니 학원에서 12년 만에 아버지와 상봉했다. 때는 1917년 10월, 혁명 직전이었다. 혁명가였던 아버지 구세프는 옐리자베타가 다섯 살 때 차르 경찰의 눈을 피해 가족과 연을 끊고 지하에서 활동해 왔다. 평범한 부녀 사이였다면 감격에 찬 순간이었을 이들의 재회는 지극히 메마르고 덤덤한 것이었다.
“구세프 동지, 전 당신 딸입니다. 한 끼 사먹을 수 있게 3루블만 주세요.” ……
“물론이죠, 동지.” 구세프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녹색의 3루블 지폐를 꺼냈다. 나는 돈을 받았고, 고맙다고 인사했으며 점심을 한 그릇 더 사먹었다. ― 1장 1917년 혁명의 아이들(1917~1928)·42~43쪽
구세프와 옐리자베타 부녀는 그 뒤로도 계속 각자 혁명 활동에 몰두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만나더라도 결코 가족처럼 지내지 못했다. 인간 해방을 위한 결전이 벌어지던 혁명 러시아에서 가족 같은 개인사를 생각하는 일은 곧 ‘속물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 배가 고픈 나머지 그만 아버지에게 말을 걸기는 했으나, 볼셰비키로서 옐리자베타도 이 가치관에 근본적으로 동의했다.
이 혁명가 부녀의 재회 이야기를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무척 좋아해서, 나중에 그의 측근이 된 옐리자베타에게 청해 몇 번이고 다시 듣곤 했다. “이 일화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과 이타적 헌신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의 여러 집단에서 전설이 되었다.”(1권 43쪽)
볼셰비키는 바로 옐리자베타와 구세프 같은 인간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스탈린의 말을 빌리면 “진정한 볼셰비키는 당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질 수도 없었다.”(1권 43쪽) 사회주의적 인간은 사생활이 아니라 공동선을, 철저히 공적인 목표만을 추구해야 했다. 공적인 목표란 바로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이었다.
아파트 공산주의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비밀은 전혀 없었지요.
우리는 모두 동등했고 똑같았어요.”
― 3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뒷면(1932~1936)·317쪽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개개인의 집에서부터 실현되었다. 소련 도시에서 가장 흔한 주거 유형은 공동 아파트(콤무날카kommunalka)였다. 한 아파트에서 여러 가족이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하며 함께 사는 형태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는 1930년대 중반 주민의 4분의 3이 공동 아파트에 살았다.
“공동 아파트는 공산주의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사람들에게 주거 공간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볼셰비키는 그들의 기본 사고와 행동을 좀 더 공산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1권 306쪽)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공동 생활이 그들에게 소비에트 체제의 공적 가치인 노동에 대한 사랑, 검소함, 복종, 순응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1권 317쪽)
그 시절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 문을 열어놓고 살았고, 우리 같은 아이들은 집 전체를 자유롭게 썼습니다. ……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갖고 나와 마치 한 가족처럼 국경일을 축하하곤 했습니다.
― 3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뒷면(1932~1936)·335쪽
그러나 공동 아파트가 이상적인 천국이지만은 않았다. 사적 공간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엄청난 불편함을 감수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주거 면적은 최악의 경우 1평 이하 수준까지 떨어졌다. 모두가 공유해야 했던 화장실과 부엌에서 특히 갈등이 심했다. 레닌그라드의 한 공동 아파트에서는 “48명이 변기 하나를 같이 썼다.”(1권 313쪽) 한 개의 부엌에서 “여자 30명이 동시에 요리하는 광경을 떠올려보세요.”(1권 310~311쪽)라고 공동 아파트에서 성장한 한 소녀는 회고한다.
공동 아파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사생활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수건과 세면 도구, 냄비와 팬, 접시, 포크와 나이프, 심지어 소금과 후추도 방에 간수했다.”(1권 314쪽) 자기 물건을 남이 훔쳐 쓴다는 의심, 남의 물건을 보며 느끼는 시기심이 만연했다.
공동 아파트는 국가의 감시 권력을 가정의 사적 공간으로 확장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공동 아파트의 주민들은 이웃들의 개인적 습관, 방문객과 친구, 구입한 물건, 먹은 음식, 전화로 말한 내용(전화는 보통 복도에 있었다), 심지어 벽이 매우 얇았기 때문에(그리고 많은 방에서 벽이 천장까지 닿지 않았다) 방에서 말한 내용까지 거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1권 308쪽) 정부 당국은 사람들에게 이웃의 대화를 엿듣고 밀고하라고 독려했다.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뉘앙스가 담긴 아주 사소한 언행이라도 고발당하고 체포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한 거주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경험한 체포, 투옥, 유형과는 또 다른 억압의 느낌이었으나, 몇 가지 점에서 더 안 좋았습니다. 유형을 당했을 때는 자의식을 보존했지만, 공동 아파트에서는 내적 자유와 개별성을 억압당한다고 느꼈습니다. 부엌에 갈 때마다 한 무리의 작은 군중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기에 억압을 느꼈고 나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불가능했죠.
― 3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뒷면(1932~1936)·317쪽
시민의 의무, 감시와 고발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아내하고만 자유롭게 말을 한다.
그것도 밤에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말이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18쪽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 스탈린 시대 소련에 널리 퍼진 관용구다. 소비에트 시민들은 섣부른 한마디로 체포당할 것을 걱정하며 이 말을 교훈으로 새겼다. 그리고 정부를 대신하여 ‘벽에 달린 귀’ 역할을 수행한 것 역시 똑같은 소비에트 시민들이었다.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소비에트 사회 특유의 풍조는 스탈린 이전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볼셰비키는 “동지의 사적인 견해나 행실이 당의 단결을 위협한다고”(1권 93~94쪽) 여겨질 때 그것을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스탈린이 집권하고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이 세력을 키워 가면서 감시와 고발은 시민의 의무로서 더욱 강력하게 권장되었다. 전쟁의 위협에 직면한 스탈린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틈을 타 소비에트 체제에 적대적인 첩자들, 즉 숨어 있는 ‘인민의 적’들이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무너뜨리리라는 두려움에 빠졌다. 스탈린의 공포가 절정에 달한 1937년과 1938년에는 이후 ‘대숙청’이라고 불리게 될 전대미문의 체포 열풍이 불었다. “체포된 사람의 단 5퍼센트만이라도”(1권 398쪽) 실제 ‘인민의 적’이라면 95퍼센트가 결백하다 하더라도 모든 체포가 정당한 것이었다. 이 체포의 상당 부분이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상적 감시와 고발에서 비롯했다.
출신 배경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찾습니다. 남편이 체포된 여자가 있다고 해보죠. 대화는 이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한 소비에트 시민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을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자신은 좋은 시민이라고 말하지요.”
“예,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도와주세요. 소련에 반대하는 행동이나 대화를 인지하면 무슨 내용이든 우리한테 알려주세요.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전에 당신이 알게 된 것, 누가 무슨 말을 했고, 그들이 이야기할 때 누가 같이 있었는지를 적어야 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정말 좋은 소비에트 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일터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당신을 도와줄 것입니다. 이를테면 해고되거나 강등될 경우 당신은 우리의 도움을 받게 될 겁니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36쪽
감시와 고발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체포된 가족을 도와주겠다는 경찰의 꾐에 빠져 다른 사람을 고발해서 체포되게 만들었다. 이들은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살아남고 자리 잡고자 안간힘을 썼다. 고자질은 ‘소비에트 시민’으로서 자신이 지닌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이었다. 고발할 만한 사람을 고발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른 누군가가 고발하기 전에 서둘러 고발했다.”(1권 435쪽)
침묵과 순응이 지배하는 사회
“사람들은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25쪽
사람들은 말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친구와도, 이웃과도, 심지어 가족과도 터놓고 대화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면 뒤에 진짜 자아를 숨겼다. 어느 누구도 가면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평범한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첩자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이 점점 일반적인 일이 되어 갔다. 공포가 은폐를 부르고, 은폐가 다시 공포를 부르는 악순환이었다. 대숙청에서 아버지를 잃은 한 여성은 이렇게 회고한다.
“너는 네 혀 때문에 곤욕을 치를 거야.” 사람들은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하기를 두려워하면서 삶을 견뎌 나갔다. 엄마는 두 명 중 한 명은 정보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이웃과, 특히 경찰이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말하는 것이 두렵다. 나는 내 의견을 주장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수가 없으며, 항상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물러선다. 이것은 내 성격으로 자리 잡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일 때 그런 식으로 길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경찰을 보면 두려움으로 떨기 시작한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19쪽
공포에 떨면서도 사람들은 가족을 의심할지언정 체제를 의심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에게 당 지도부가 하는 말을 의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숙청의 희생자들조차 ‘인민의 적’의 존재를 계속 믿었다. 그들은 자신이 부당하게 체포된 것이 ‘인민의 적’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인민의 적’으로 오해받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스탈린에게 가족들을 석방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나는 며칠 뒤에 스탈린이 내 편지를 읽고서는 ‘무슨 일이야? 왜 정직한 사람이 체포되었지? 당장 석방하고 그에게 사과하시오.’라고 말할 것이라고 상상했다.”(1권 462쪽) “스탈린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보다 스탈린이 인민의 적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고 계속 생각한다면, 징벌을 받으면서도 이겨내기가 더 쉬웠다.”(1권 456쪽)고 한 희생자는 회고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고통이 스탈린 탓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지만 궁금해했을 뿐이다. ……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탈린은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조만간 우리는 (유형에서) 풀려날 거야.” ……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겠지만, 스탈린의 정의를 믿으면 심리적으로 삶을 견뎌내기가 훨씬 쉬웠다. 자기기만은 공포를 가라앉혀주었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56~457쪽
아버지를 고발한 소년 영웅
“저는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인민의 적은 제게 아버지일 수가 없습니다.”
― 4장 숙청과 공포(1937~1938)·497쪽
소비에트 사회의 아이들은 부모를 고발하는 것이 훌륭한 행동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실제로 아버지를 고발했다고 알려진 열다섯 살 소년 파블리크 모로조프는 많은 아이들의 영웅이었다. 소련 언론은 파블리크 소년을 순교자이자 모든 청소년들의 본보기로 앞장서 칭송했다.
1931년 11월 마을 학교에서 열린 트로핌의 재판을 보도한 언론에 따르면, 파블리크는 아버지의 범죄를 고발했고 트로핌이 “난 네 아비다, 네 아비라고!” 하며 소리치자 재판관에게 말했다. “예, 그 사람은 제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아들이 아니라 피오네르(공산주의 소년단원)로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트로핌은 극북의 노동수용소형을 선고받았고 그 후 총살당했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23쪽
아이들은 파블리크 이야기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가족 간의 사랑보다 더 높은 미덕이라는 것을 배웠다. “친구와 친척들을 밀고하는 일은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 공공심이 투철한 것이라는 사상이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뿌려졌다.”(1권 225쪽) 부모들은 자식에게 입 조심하라고 당부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말하기를 조심해야 했다. 한 아버지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내 아이에게 스탈린을 비난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파블리크 모로조프 이야기 이후 아들 앞에서도 경솔한 말이 무심코 튀어나올까 두려웠다. 왜냐하면 아들이 학교에서 그 말을 무심코 입에 올리면 학교 이사회가 그것을 보고할 것이고, 아이에게 “너 어디서 그 말을 들었니?”라고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32쪽
비극적이게도, 특히 어릴 적 국가에 부모를 빼앗긴 아이들이 모로조프를 더욱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모가 총살당하거나 노동수용소에 끌려간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부모의 사랑을 모른 채 자랐고, 오히려 부모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었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체제에서 배척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아들은 ‘인민의 적’의 자식으로서 체제에서 소외당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체제의 가치에 복종하여 체제에 인정받고 편입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우리는 가족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파블리크가 아버지를 배반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부르주아 계급의 구성원인 쿨라크를 잡았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그는 우리 눈에 영웅이었다. 우리에게 모로조프 이야기는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전적으로 계급 투쟁에 관한 이야기였다. ― 5장 죽은 자와 산 자(1938~1941)·57쪽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낙인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총살당한 것처럼 너도 총살되어야 해.”
― 5장 죽은 자와 산 자(1938~1941) ·59쪽
소비에트 체제는 사실상 철저한 ‘연좌제’의 사회였다. 부모를 고발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자식들이 ‘범죄자’ 부모와 연을 끊었다. ‘인민의 적’으로 체포당한 부모를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학교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신문에는 부모와 절연하겠다고 선언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수천 건 실렸다.
나, 니콜라이 이바노프는 전직 성직자인 아버지가 오랫동안 신이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했기 때문에 그를 부인한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와 모든 관계를 끊는 이유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33~234쪽
나는 이제 이 가족의 일부임을 거부한다. 나는 내 진짜 아버지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준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단)이라고 느낀다. 내 진짜 어머니는 우리의 모국이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 소련의 인민들이 지금 나의 가족이다. ― 2장 농촌 공동체의 전복(1928~1932)·234쪽
두 번째 선언문을 쓴 열여섯 살 소년에게 가족과 연을 끊기를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식이 출세하려면 가족과 단절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식에게 가족을 거부하라고 권한 부모는 이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체포되어 노동수용소에 갇힌 한 어머니는 엄마에게 정말 죄가 있느냐고 묻는 열다섯 살 딸의 편지에 그렇다고 답장을 썼다. 그녀는 이후 딸에게서 다시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 딸이 소비에트 정부를 증오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게 나아요.”라며 그녀는 울었다.(1권 499쪽)
‘인민의 적’의 자식들을 배척하는 한편으로, 체제는 과거를 철저히 버리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인민의 적’의 자식이라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수많은 ‘인민의 적’의 자식들이 체제에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절실한 욕구에 떠밀려 누구보다도 앞장서 체제에 헌신했다. “소비에트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저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2권 63쪽) 체포되어 유형당한 쿨라크(부농)의 아들 드미트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그것이야말로 당에 바란 소망이었다. 나는 출세를 위해 입당을 원하지 않았다. 나에게 당은 정직과 헌신의 상징이었다. 당에는 정직하고 훌륭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나는 내가 그들의 일원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 5장 죽은 자와 산 자(1938~1941)·79쪽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숨기지 않은 탓에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따돌림을 당해 나와야 했고, 이후 새로 다니게 된 대학에서는 퇴학당했다. 그 뒤에는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결국 그 자신도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런데도 그는 당을 숭배했다. 입당을 거부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드미트리는 “60년이 지난 뒤에도 손이 떨렸고 …… 감정에 북받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2권 78쪽)
많은 ‘인민의 적’의 자식들이 출신 배경을 숨겼다. 체포된 성직자의 아들이었던 레오니트는 명석한 아이였지만 아버지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는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서 겨우 기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전기 기술자로서 소비에트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었다.”라고 그는 인정한다. “출세하려면 과거를 비밀에 부쳐야 했다. ……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진실이 알려지면, 내 명성에 금이 갔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쌓아 온 지위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265쪽
레오니트는 지금까지도 스탈린이 아버지를 체포한 원흉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직자의 아들인 자신에게 공장의 고위 책임자로서 출세할 기회를 준 스탈린에게 감사하고 있다.
독재자의 죽음, 통곡하는 사람들
“왜 그렇게 울부짖고 있나요?
스탈린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337쪽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던 25년 동안 약 2500만 명이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억압당했다. 이들은 1941년 기준으로 약 2억 명에 달하던 소련 인구의 8분의 1을 차지한다. “평균을 내면 소련의 1.5 가족당 1명을 나타낸다.”(1권 27쪽) 총살당하고 수용소에 갇힌 이들 희생자뿐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 자식, 남편과 아내를 잃어버린 그들의 가족도 삶과 정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죽었을 때 러시아를 뒤덮은 감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충격 하늘이 스탈린을 사랑할 이유가 없는 억압의 피해자들 중 많은 이 스탈스탈린의 부고를 듣고 눈물을 흘렸늘이 대숙청 때 감옥에서 2년을 보낸 시인 베르골츠조차 자신을 고문한 자를 애도하는 시를 썼다.
심장은 피를 흘리고 ……
우리의, 우리의 친애하는 이여!
당신의 머리를 팔로 감싸고,
국민은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333쪽
많은 소련 사람들에게 스탈린은 그 자체로 세계였다. 스탈린의 죽음은 마치 세계의 종말과도 같았다. 그들은 스탈린의 그늘 아래에서 성장했고 그들의 모든 생각은 스탈린이 형성한 것이었다.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경험한 고통과 상관없이, 스탈린의 부재는 사람들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한 억압의 피해자는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흘린 눈물에 스스로 놀랐고, 스탈린이 자신에게 지닌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모든 질문을 그에게 던졌고, 그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든 답변을 주었다.”(2권 335쪽)
할머니는 스탈린 대신 자기가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내가 죽고 스탈린이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 나는 할머니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나도 스탈린을 사랑했다. 그러나 오늘(2003년) 나는 할머니에게 말할 것이다. “할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딸은 체포되었고, 손자와 손녀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사위는 총살당했다. 할머니의 남편마저 성직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 그러나 할머니는 스탈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7장 스탈린의 신민들(1945~1953)·335~336쪽
스탈린의 죽음은 대부분의 소련 사람들에게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더 큰 공포를 가져왔다. 스탈린이 지배하는 세계는 행복하지 않더라도 익숙한 세계였다. 스탈린이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사정이 훨씬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2권 337쪽) 스탈린의 죽음에 보복하고자 정부가 더 많은 사람들을 체포할 수도 있었다. 억압의 장본인이 스탈린이 아니라 스탈린의 부하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스탈린의 망령과 ‘만들어진 기억’
“이곳은 해빙이 되기에는 너무 얼어 있고, 지금까지도 스탈린이 살아 있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여전히 따뜻하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526쪽
스탈린이 죽고, 노동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이 풀려나고, 부당하게 체포된 사람들의 복권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탈린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04년에 저자가 인터뷰한 한 억압 피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는 노동수용소에서 10년을 강제 노동에 바쳤다.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다. 어른이 된 뒤로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 나는 벌써 50년 전에 복권이 됐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헌법에 따르면, 그들은 내 사생활에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458쪽
그처럼 깊은 상처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울지도 않았다.”(2권 459쪽) 사람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인내하며 침묵을 지키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고통을 되새기는 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침묵한다고 괴로운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학에서는 감정을 말로 드러내야 정신적 외상에서 회복하기 쉽다고 한다. “참고 견디는 태도는 사람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동적이고 운명에 순응하게 만들 수도 있다.”(2권 459~460쪽)고 저자는 말한다. 침묵이 오래 지속될수록 오히려 입 밖에 내지 않은 괴로운 기억은 치유되지 않은 채 희생자를 계속 짓누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억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신화를 만들어 기억과 뒤섞었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위안을 얻으려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수용소 수감자 중에는 자신들이 강제 노동을 통해 소비에트 경제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자신이 공헌했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껴안고 살아갈 수 있게”(2권 506쪽) 도와주었다. 다음은 이십 대 초반에 노릴스크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예순 넘어서까지 강제 노동에 동원된 노인의 회고다.
이 훈장들은 모두 (사회주의 경쟁의) 승리자들을 위한 거라오. 야금 승리자, 제9차 5개년 계획(1971~1975)의 승리자 ……. 아, 저거 하나는 뭔지 잊어버렸구먼. …… 그리고 여기 이 훈장들은 ‘(노릴스크) 단지의 역전의 용사’와 ‘소련 역전의 용사’에게 준 건데,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노동을 했다고 받은 거요. 이쪽의 이 훈장은 단지가 군사화되었을 때인 대조국전쟁 시기의 역전의 용사들을 위한 기념 훈장이지. …… 나는 전쟁에서 내가 했던 역할이 자랑스럽소. 시민으로서 애국적 의무를 다했다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509쪽
2005년 1월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러시아인의 42퍼센트가 ‘스탈린 같은 지도자’의 복귀를 원했다.”(2권 510쪽) 스탈린 시대에는 삶의 방향이 뚜렷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모두가 공유하는 미래의 희망이 있었다.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진 뒤 러시아는 한편으로 더 살기 어려워졌다. 물가와 범죄율이 치솟은 현재의 러시아와 달리, 스탈린 시대에는 상점에 생필품이 충분했고 사회에 질서와 규율이 있었다고 많은 노인들이 회상한다. 그들에게 스탈린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그 믿음에 청춘을 바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앞날이 좋을 거라고 믿었어요. 우리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면 삶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 우리는 지상에 천국을 창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만인이 풍족하게 사는 사회, 평화가 있고 더는 전쟁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 믿음은 진실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우리가 물질적 문제 대신에 미래를 위한 교육과 작업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보다 그때 우리가 하는 일에 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얼 믿고 있죠? 우리는 이상(理想)이 없습니다.
― 9장 기억의 재구성(1956~2006)·515쪽
목차
원저자명: Orlando Fi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