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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개인저자
라종일 지음
발행사항
파주 : 창비, 2013
형태사항
272 p., 도판 [4] p. ; 20 cm
ISBN
9788936482657
청구기호
340.99 라75ㅇ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5803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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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5803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한 테러리스트의 삶과 죽음으로 보는
남북 대결의 비극과 국가폭력의 야만성


1983년 10월 9일, 한국사회는 물론 전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아웅산 국립묘소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테러는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났고, 그로부터 정확히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은 대치 상황과 화해 국면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들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갔다. 아웅산 테러사건의 범인 ‘강민철’ 역시 그중의 한 사람이다. 국가의 명령에 응했고 주어진 작전을 수행했으나 실패로 끝난 채 머나먼 버마(현재의 미얀마) 땅에서 2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수감생활을 했고, 그 명령을 내렸던 국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죽어갔다.
정치학자 출신으로 국가정보원의 요직을 지낸 바 있는 저자 라종일(한양대 석좌교수)은 북한은 물론 남한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채 인간으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한 테러리스트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넘어 남북의 대치 상태에서 유린된 인권에 주목하고자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집필했다고 밝힌다. 비단 강민철 개인의 삶에 대한 조명이 아니라 60년 넘는 분단 상황이 빚어낸 비극적인 희생의 역사를 환기하고 국가폭력의 야만적인 실태에 대한 고발이라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광주학살과 북한의 정치적인 판단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은 긴장과 화해의 국면이 반복되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의 원조나 협력보다는 자기네의 이익과 정치적 해석에 따른 움직임이 많았고, 화해 제스처의 이면에는 정권의 전복이나 붕괴를 획책하는 시도도 있었다. 특히 게릴라 작전이나 주요 인사에 대한 테러는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남북관계를 극단적으로 경색시키곤 했다. 북측에 대한 남한의 테러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바가 적으나, 남한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그중 1968년 청와대를 향했던 김신조 일당의 기습 테러, 1970년의 국립현충원 테러사건, 1974년 조총련계 재일교포 청년의 영부인 암살은 남한의 대통령을 조준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테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북한의 테러 후에는 남한 역시 북한에 그에 상응하는 보복성 테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민중을 탄압하고 미국에 굴종하는 남한 정권을 테러로라도 전복하여 남한 민중을 해방시키려는 뜻이었을지 모르나 거의 매번 그 과정과 의도가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한 정치적 오판이었고, 게다가 그런 반복적인 테러로 인해 남한 내 진보적인 정치의 가능성까지 후퇴시킨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이도 있다. 북한의 막연한 기대와 오산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면서 예정에 없던 ‘버마’를 순방국에 추가한다. 당시 버마는 북한하고만 국교를 맺은 상태였고 남한과는 비수교 상태였기에 방문단뿐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의 담당자들도 그런 결정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청와대의 지시로만 알려진 버마 방문은 그렇게 추진되었다. 한편 전두환의 정권 획득 과정과 1980년 5월 광주학살 사건을 지켜본 북한 정권은 남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하에서 나날이 커져가는 남한 사회비판세력의 결집을 통해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북한 정권의 그러한 정치적 판단은 버마 방문 예정인 전두환 대통령의 암살작전으로 이어졌다.

아웅산 묘소의 비극적인 그날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소 참배를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북한 공작조는 남측 방문단보다 먼저 버마에 도착해 치밀하게 테러를 준비했다. 진모(본명 김진수), 강민철(본명 강영철) 그리고 신기철 3인으로 조직된 테러리스트들은 랑군강을 통해 버마에 밀입국해 남한 방문단의 일정을 파악하고 아웅산 묘소의 지붕 아래에 원격조종 폭탄을 설치한다.
애초에 없던 버마 일정이었으나 남한 안기부 요원들은 버마에 미리 도착해 사전검색을 실시했고 다소간 우려와 걱정이 있었으나 대통령 일행은 예정대로 버마에 도착한다. 다음날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 참배를 앞두고 대통령을 수행하기로 한 버마 외무장관이 늦게 도착하여, 대통령을 제외한 몇몇 장관들과 수행원들이 먼저 묘소로 출발한다. 예정된 시간보다 숙소에서 늦게 출발한 대통령, 대통령을 기다리며 아웅산 묘소에 도열해 있던 남측 인사들, 그리고 숨죽이며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던 북한 공작원들. 바로 그 순간 아웅산 묘소에 대통령이 도착하면 울리기로 했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소리에 따라 테러리스트들은 원격조종장치의 버튼을 눌렀고, 묘소는 폭발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모두 17명의 남측 인사들이 사망했고, 수많은 부상자를 냈던 아웅산 테러사건 현장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테러 소식을 듣고 바로 차를 돌려 숙소로 돌아갔고, 테러리스트들은 행사 현장을 황급히 빠져나가 탈출을 시도한다.
남한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한 북한 공작원 3인의 테러는 실패로 끝났고, 남한은 물론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대통령은 순방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했고, 즉시 북한 측의 소행임을 밝히는 데에 주력했다. 남한의 군부나 여론은 북한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전세계는 북한에 대해 급격히 냉랭하게 돌아서서 국교 단절을 선언하거나 외교관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나라도 있었다. 물론 북한은 결단코 자기 소행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다.
한편 테러 현장을 빠져나가 자신들을 태우고 온 동건 애국호를 찾아 헤매던 테러리스트 일당은 랑군강 일대에서 사살되거나(신기철), 큰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진모와 강민철).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테러리스트 강민철

버마의 군경에 생포된 테러리스트 2인은 그뒤에 재판을 거쳐, 진모에게는 사형이 강민철에게는 무기형이 언도되었다. 불교국가인 버마에서는 이례적으로 진모에게는 즉시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강민철은 그로부터 25년 동안 버마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28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북한에서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공작원 강민철은 이방의 감옥에 유폐된 채 청춘을 다 보내고 오십대 중반의 쇠약한 늙은 몸으로 숨져갔다.
옥중의 강민철은 큰 부상으로 성치 않은 몸임에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증언들이 많다. 영어의 몸인 자신의 안위보다도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또 엇갈리는 증언이 있으나 북에 두고 온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평생 결혼도 해보지 못한 자신의 신세에 대한 서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로 북한에 대해 부정적이던 국내외의 여론은 전두환-노태우 정권하에서 남북관계의 화해 무드 속에 또다시 잠잠해졌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햇볕정책과 대북 원조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머나먼 버마 감옥에 수감 중인 강민철은 철저하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송환을 요구해봐야 자신들의 범죄를 자인하는 셈이 될 테고, 남한 입장에서는 북한의 테러리스트를 거론해봐야 화해 국면인 남북관계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체제의 교육과 훈련에 따라 스스로의 판단은 꿈도 꿀 수 없이 그저 국가의 부름에 응했던 젊은 강민철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또다시 국가의 처분에 따라 버려진 것이다. 이용당하고 버려진, 그 자체로 살인병기가 된 강민철은 25년이라는 세월을 이국의 감옥에서 고국에 대한 원망,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를 품고 살다가 죽어갔다.
이 책의 저자 라종일은 김대중 정부시절 안기부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버마를 방문하여 강민철에 대한 남한 외교관의 면담을 허락받으려고 애썼으며, 그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소환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 바 있었다. 1998년 남한 외교관의 최초 면담을 추진하고 버마 정부의 허락을 받아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 외교관의 면담도 오래 갈 수 없었다. 평화스러운 남북관계를 저해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일각의 우려에 따라 강민철에 대한 면담 길은 또다시 막힌 것이다.

지워진 사람과 국가폭력의 비극성

한 국가가 통치와 국방을 위해 벌이는 테러행위는 그 형태와 규모가 어떠할지라도 누군가는 희생자로 만들고 또 한편은 가해자로 만든다. 그런 희생과 가해의 관계는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명령에 복종할 뿐인 테러의 가해자 역시 국가폭력에 의한 또다른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강민철이 벌인 끔찍한 테러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인 판단이 허락되지 않는 국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25년의 수감생활을 방치했던 북한은 근본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한 비록 테러범이지만, 동족이고 이미 아무런 무력적인 위협이 될 수 없었던 강민철을 외면했던 남한 역시 인도주의적 관점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남북한에서 공히 ‘지워진 사람’(the erased)으로 존재했던 강민철을 지금 우리가 새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권력이 연출하는 이러한 부조리극의 비극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반성 없이는 우리 젊은 세대들을 또다시 ‘실미도’ 같은 곳에서 ‘은밀하게’ 키우고 희생시키는 국가권력의 작동을 멈추게 할 수 없”기(정병호, 추천사) 때문이다.
1983년 남북한과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아웅산 테러사건은 당시를 살았던 이들에게도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단지 역사적 기록으로만 접할 수 있을뿐더러 그마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 테러사건의 주역인 강민철이라는 한 개인은 철저히 잊혀졌다. 그의 비극적인 삶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역사의 비극적 이면과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환기하고 반성할 때 진정한 남북관계의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아웅산 묘소, 그날

1. 남북의 길
2. 광주항쟁과 아웅산 테러사건
3. 국화 작전과 버마 방문
4. 역사적인 장소, 아웅산 묘소
5. 테러리스트의 운명
6. 조국이 저버린 테러리스트
7. 테러리스트 강민철
8. 감옥에서의 죽음

에필로그-잊힌 테러리스트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