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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대등서명
Sociologue et l'historien
발행사항
서울 : 킹콩북, 2019
형태사항
142 p. ; 21 cm
ISBN
9791195507146
청구기호
304 B769s
일반주기
원저자명: Pierre Bourdieu, Roger Chartier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7033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7033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반지성주의 시대 합리성의 유토피아를 꿈꾸다!!!

여기, 격렬하지만 우정이 넘치고, 비판적이지만 유머가 가득한
다섯 번의 놀라운 대화가 있다.
전문적이면서도 대중적이고, 전투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대화다운 대화를 찾고자 한다면,
반지성에 맞서는 무기를 찾고자 한다면,
이 책을 보기를 바란다.


이 책은 세계적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와와 역사학계의 거장 로제 샤르티에의 대담집, 『사회학자와 역사학자』(Le sociologue et l’historien, 2010, Agone)를 한국어로 옮긴 글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와 더불어 현대 사회학을 상징하는 이론가인 부르디외는 장, 하비투스, 상징투쟁 등 자신의 핵심 개념을 놓고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을 연구한 아날학파 4세대의 대표 학자 샤르티에와 격렬하면서도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다. 프랑스학계의 두 거장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부르디외의 개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사회와 역사를 분석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허심탄회하게 논의한다.
이 대담은 그 명성에 비해 복잡한 개념과 다양한 주제, 난해한 문체 탓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르디외 개념을 저자 자신의 육성으로 쉽게 설명하며, 무엇보다도 부르디외 자신이 어떤 배경, 태도, 목표 아래 연구에 임하고 있는지, 학계와 일상에서 왜 과학적이면서도 전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지 분명히 밝혀준다. 이 책은 부르디외 이론의 풍부한 현재성과 가능성을 보여주며, 오늘날 현실을 분석할 수 있는 수많은 개념과 도구를 제공해준다. 부르디외를 알고 싶지만 방대한 저술에 주저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최선의 입문서가 될 것이다. 또 반지성주의, 혐오표현, 남성지배, 종북 논란 등 당대의 문제에 천착하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무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부르디외
라디오 대담으로 듣는 부르디외 입문


이 책은 부르디외를 결정론자로 이해하는 잘못된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와 달리 부르디외는 행위 이면의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자유주의 가능성을 진정으로 도입한다.
― 더 모닝스타

다섯 번의 라디오 방송, 부르디외의 이론을 정리하다
1988년 프랑스의 공영 라디오 채널인 프랑스 퀼튀르 부스에는 이제 막 대중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인 부르디외와 책과 문화에 관한 연구로 이름이 알려진 역사학자 샤르티에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다섯 차례 만나 부르디외의 개념을 놓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부르디외는 자기 자신마저 비꼴 정도로 대담은 시종일관 유머로 넘쳤고 우호적인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그 이면에는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샤르티에는 역자학자만의 입장이 아니라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부르디외 개념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부르디외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맞수를 만난 듯이 자신을 둘러싼 삿된 비난에서 벗어나 그 개념이 지닌 함의와 목표, 의도를 차분히 풀어낸다.
다섯 번의 대화는 사회학자의 임무, 환상과 지식, 구조와 개인, 하비투스와 장, 예술가와 예술 장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워낙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저술이 아닌 대화의 특성상, 이야기가 자유롭게 흘러가지만 이 같은 순서는 나름대로 일관성을 보인다. 대담의 앞부분은 사회학자의 사회적 기능, 상식 및 환상을 뚫어내는 지식과 지식인의 전투적 역할을 다루고, 중반에는 현행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지배적 구조와 이를 분석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이런저런 결정 기제 아래 개인의 자유, 이른바 행위자성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프랑스의 근대 문학, 미술을 사례로 예술가와 예술 장의 형성을 다루고 미학 및 예술에 관한 새로운 접근만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자유의 가능성과 그 조건, 한계를 동시에 탐색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책은 부르디외의 수십 년 동안의 작업을 대상으로 구조(또는 권력)의 힘과 그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또는 저항)에 관한 다양한 접근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학자는 왜 불편한가?

부르디외: 그렇죠. 저는 사회학이 불편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24쪽) …… 사회학자가 자신의 작업,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와 맺는 관계는, 제가 아는 한 정신분열에 관해 의사들이 설명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회학자는 무언가를 말해야 하거나 혹은 행해야 하지만, 그것을 말하거나 행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방금 말하거나 행한 바를 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합니다.(45-46쪽)

첫 대담을 여는 말에서 샤르티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회학자는 견디기 힘든’ 존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참기 힘들고, 불쾌한 사람이란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람의 등에를 자처했듯이, 부르디외는 이 지적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동시에 왜 자신이 동료 학자, 엘리트 계층, 심지어 대중을 귀찮게 하는지 설명한다. 사회학자, 또는 사회학 자체가 성찰성을 특징으로 하며,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들의 진실을 진단하고 말하기에 사회학자는 견디기 힘든 존재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사회학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사물의 자명한 질서에 도전하는 것, 자기 분열을 껴안고 이른바 ‘사회적’ 진실을 말하는 것, 남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과학적’ 진실을 말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상식을 파괴하고 비판과 해방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사회학자의 임무라고 말한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와 연결된 문제로서 오늘날 지식, 지식인의 임무는 과거와 달라졌다고 한다. 이제 지식인은 학계 내부의 위계적 규칙에 따라 직업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무의미한 통계치만 앵무새처럼 나열하는 정책전문가나 여론조사원도 아니다. 또 지식인은 계몽주의의 거대한 기획 아래 인간의 완성을 전망하는 예언자도 아니고, 마르크주의의 전망 아래 미래의 해방을 예단하는 메시아도 아니며, 대중이나 특정 계급을 대변하고 지도하는 당-지식인도 아니며, 남들에게 특정한 담론, 프로그램, 품행을 주입하는 통치 기술의 전문가도 아니다. 오늘날 지식인의 임무는 사회학자와 마찬가지로 죽어버린 지식생산 과정과 그 산물에 구멍을 내고, 대중의 바로 옆에서, 바로 밑에서 그들의 구체적 현실을 대상으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고 그들에게 사유수단을 제공하는 일이다.

샤르티에: 지식인은 정말로 오랫동안 피지배 대중에게 어떤 담론을 부과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지식인의 기획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지식인의 역할이 피지배 대중에게 지배 메커니즘을 스스로 분석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는 일이 됩니다.

부르디외: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 우리는 자신이 접하는 사유대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사유수단을 제 것으로 만들 때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나마 아주 미미한 정도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49-50쪽)

이런 맥락에서 지식인은 모든 것에 답하는 총체적 지식인이 아니라, 일부러 부분적인 질문을 만들어 제기하며, 현 상태의 인식 도구를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답을 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 현실에 근거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야 한다.


개인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러나 사회학자건 아니건, 인간은 구조(또는 지배)의 결정력에서 무조건 벗어날 수 없으며 날 때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다만 부르디외에 따르면 주체는 구조의 중력에서 약간은 벗어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자유라는 행위에는 부지런함, 특히 앎에 대한 끈질긴 습득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대신 사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접하는 사유대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사유수단 역시 제 것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로 죽을 작은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자기 앎이 있을 때, 우리는 현행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다양한 결정 기제를 바꾸거나 적어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대화의 중반부에서 이런 실천을 방해하는 기존의 몇 가지 거대한 이론, 교조화된 접근, 무한한 자유를 주장하는 자원주의,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상식과 권위에 기대는 가짜 이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부르디외: 제가 보기에 메시아적 희망은 변혁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런 메시아적 환상을 합리적 희망들로 대체해야 합니다. 적절한 수준의, 매우 이성적인, 어떻게 보면 온건한 희망들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희망은 자주 개량적이거나 타협적이라는 불신에 시달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급진적인 형식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69쪽)

특히 이런 비판에는 ‘메시아적 구원’과 거리를 두려는 사회학의 ‘합리적 유토피아주의’가 배어 있다. 예컨대 당대의 공식 지식인 교조화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혁명의 메시아를 기다를 뿐,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왜 그들이 체제 내화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다른 수준에서 벌어지는 투쟁, 이른바 교육, 문화 등 상징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저항의 교차, 정확히는 분류화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적으로 부르주아 자식은 왜 대학에 더 많이 가고 노동자 자식은 왜 노동자가 되는가.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미 굳어진 개념, 실천으로는 이런 현상을 분석하지도 바꾸지도 못한다. 기존의 지배적·상식적 개념은 너무 거칠어서 설명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오용의 위험도 있어서 현실을 오히려 왜곡한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제 얘기는 ‘지금 읽고 있는 것에 주의하시오’라는 메타담론을 실어 나릅니다.”(47쪽)


구조의 힘을 역사화하다
부르디외와 동시대를 살았던 몇몇 철학자는 자신의 작업을 외부, 바깥의 사유라고 부른다. 어떤 학자는 후기 구조주의 자체가 서구 바깥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특히 푸코는 자신의 계보학을 인류학 ― 알다시피 부르디외도 인류학 훈련을 받았다 ― 에 빗댄다. 인류학자가 낯선 세계의 문화를 탐색하듯이, 계보학자는 서구 문화 안에서 바깥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역으로 자기 문화를 규정하는 결정 기제를 밝혀낼 수 있다. 이 낯설게 하기 전략은 결국 우리를 구속하는 체계,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허용과 배제의 체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일상, 우리의 ‘부르주아적’ 실천이 결국은 원시인의 의례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자의적 질서에 근거하는지 폭로하는 일이다.
푸코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부르디외는 우리를 구속하는 지배적 체계, 개인의 자유를 한정하는 구조의 힘을 분석하려고 한다. 특히 부르디외는 두 가지 상보적인 이론적 전략을 구상한다. 하나는 구조(또는 지배) 자체를 보편적이고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여기고, 한 사회에서 특정한 시기에 들어서는 장의 발생과 그 규칙을 분석하려고 한다. 예컨대 서양 중세에서는 돈보다 명예가 더 중요하고 태평양의 섬에서는 호혜적인 선물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행위자는 그 장의 규칙에 따라, 그 내부의 상징재(돈, 명예, 지위, 명성 등)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런 접근을 현대 사회에 들이대는 것은 결국 장의 의례, 또는 장이 부과하는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따위를 무대 위에 올려 그 자의적 성격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변형하고 전복하려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장과 결합된 개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거꾸로 구조에 변형을 가하기도 하는 이론적 장치를 도입하는 전략이다. 그것이 바로 하비투스 개념이다. 하비투스는 객관적 구조, 또는 다양한 결정 기제가 내려앉아 개인에게 내면화된 성향 체계이다. 바꿔 말해 개인은 사회 세계의 구조를 내면화하고 그 구조를 행위, 품행, 선택, 취향을 인도하는 분류도식으로 전환한다. 하비투스는 개인의 의식이나 관념보다는 가족, 교육, 미디어 등 물질적 장치를 매개로 비의식적인 영역, 육체에 각인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체계가 구조의 힘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열려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둘러싼 투쟁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기존의 구조가 재생산될 것인가, 조그마한 자유와 변혁의 가능성이 있는가? 결국 부르디외가 구상한 것은 장과 하비투스, 권력과 저항의 복잡한 변증법이 아닐까. 부르디외의 희망은 체제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도록 하비투스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

브루디외: 따라서 하비투스는 숙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저를 두고 해석하는 식의 불가피한 운명이 아닙니다. 하비투스는 성향들의 열린 체계입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고, 그런 경험들에 의해서 마침내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이런 주장에 재빨리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일련의 경험이 하비투스를 [변화시키는 대신] 강화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개연성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연계된 사회적 숙명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 하비투스는 특정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것은 스프링과 같지만, 방아쇠가 필요한 것이죠. 게다가 상황에 따라 하비투스는 정반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99쪽)


자유의 좁다란 가능성을 탐색하다
그렇다면 저항, 행위자의 자유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 현대의 모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면, 한 가지 접근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교육, 가족, 미디어 등 체계적 재생산이 일어나는 과정 자체를 바꾸는 방식이다. 이는 개인의 행위를 결정하는 특정한 결정 기제에 개입하여, 개인의 성향 체계를 조형하는 물질적 장치를 바꾸는 일이다. 특히 불평등을 줄인다는 목표 아래, 교육 개혁은 부르디외 이론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고 프랑스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계급 간, 계층 간 학력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접근에도 행위자의 자유로운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 책의 마지막 부문에서 부르디외는 마네, 플로베르 등의 예술가와 예술 장을 다루면서 이 문제를 파고든다. 이들은 가장 화가다운 화가, 가장 작가다운 작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금의 자유’, 이른바 무에서 유를 창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결정 기제의 한계를 넘어 상징적 죽음을 감행했을 뿐 아니라 그 대가로 새로운 장을 창설하거나 새로운 정당성의 원리를 제시하고 새로운 미적 취향을 개발했다.

부르디외: 제 작업이 추구한 평소의 논리 때문에, 이런 인물들을 연구한 셈이죠. 특히 저는 언제나 장의 발생 과정에 관해 이해하고자 했는데, 제 시각에서 플로베르와 마네는 근본적으로 장의 창설자라고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언제나 잊고 있지만, 예언자는 사제들 사이에서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이교도의 창설자는 교부들이 자기들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말하는 바를 거리에서 말합니다. 그와 같은 인물이 예언자입니다. 마네가 이런 사례에 속합니다.(116쪽)

그런데 이런 정당화 원리, 새로운 취향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이교의 창설자는 고통스런 파문에 맞서면서 어떻게 미지의 지대로 들어가는가? 부르디외는 이들은 천재로 추켜세우거나 특정한 사조 안에 가두기보다는 창설자가 어떤 자원에 의존했는지 밝히고자 한다. 예컨대 마네는 어떤 곳에서 태어났고, 누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누구와 동료 관계를 맺었는가, 어떤 유무형의 자본이 있었는가 따위를 탐색한다. 새로운 발명은 개인의 영웅적 결단이나 심리적 특성에 의존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적 토대가 존재한다. 신학의 비유를 들자면, 부르디외는 역사 비평의 관점에서 성서를 재해석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그리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마네, 플로베르는 장의 중력을 벗어나 어떻게 텅 빈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가. 부르디외의 목표는 구조와 행위자, 위치와 하비투스를 동시에 시야에 넣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있으며 결국은 평번한 사람들이 구조의 힘을 떨치고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만드는 데 있다.


부르디외 사유로 들어가는 길
이런 이론적 논쟁 말고도 이 책에는 당대 현실에 개입하는 많은 사례가 등장한다. 특히 1980년대 프랑스 사회에 불었던 대의 정치의 위기, 좌파 정당의 몰락, 신자유주의 부상 등을 배경으로 파퓰리즘 논쟁이 일어났다. 경제 위기와 노동의 유연화를 맞아 자신을 대표할 길이 없어진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대표하자, 기존의 엘리트와 기득권층, 정치인은 직접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부르디외는 그 속에서 무력한 이론, 지배자의 기만을 읽어내고 평범한 사람들을 옹호했다. 이런 사태는 어쩐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오늘날 상황과 닮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부르디외 이론의 현재성과 풍부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혐오표현, 사회적 갈등, 파퓰리즘, 젠더 문제 등 오늘날 핵심 문제에 접근하려는 독자라면, 이 책은 훌륭한 도구 상자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부르디외 개인과 그의 이론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강박증에 걸린 듯이 부르디외는 이론의 복잡한 측면에 집착한다. 그래서인지 그 역시 성찰적이면서도 열정적이고, 역사적이면서도 현재적이고, 사회적이면서도 개별적이고, 개념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과학적이면서도 대중적이고,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이고, 전복적이면서도 권력에 민감하다. 샤르티에는 우리를 대신해 이런 양가적 측면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부르디외 자신에게 똑같이 돌려준다. 예컨대 이미 공인된 대상이 아니라 천박한 대상을 연구한다면서, 왜 플로베르 같은 이미 탁월한 저자를 연구하냐고 묻는 식이다. 부르디외가 어떻게 답했을까? 이 책을 끝까지 읽는다면 그 답을 어느 정도 잡아낼 수 있다. 부르디외 사유로 들어가는 입문서를 찾고자 한다면, 이 책은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목차

서문 생생한 목소리로 6

1장 사회학자의 직능 23
2장 환상과 인식 48
3장 구조와 개인 71
4장 하비투스와 장 91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112

옮긴이 후기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