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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독도 1947: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개인저자
정병준 지음
발행사항
파주 : 돌베게, 2012
형태사항
1004 p. : 삽화 ; 24 cm
ISBN
9788971994016
청구기호
911.8295 정44ㄷ
일반주기
색인수록
서지주기
참고문헌: p. 955-979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7334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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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7334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학술도서|제36회 월봉저작상 수상

1. 이 책의 출간 의의


2005년 1월 주한일본대사가 독도는 일본령이라고 공개 발언해 국내 여론이 들끓었을 때, 2월 말 한 장의 지도가 모든 텔레비전 메인뉴스 첫 꼭지에 소개되었다. 이화여대 사학과의 정병준 교수가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덜레스 문서철에서 발굴한 것으로, 영국 외무성이 완성한 대일평화조약 초안(1951년)에 첨부된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독도가 명백히 한국령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후 “발굴자로서 의무를 다했으나 연구자로서는 불편했고, 부족했다”고 느낀 정 교수는 본격적으로 독도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독도연구 1세대인 이한기 교수와 2세대인 신용하 교수의 맥을 잇는 정병준 교수의 『독도 1947: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는 그간의 독도연구를 총결산하는 의미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새롭게 발굴한 영국 조약 초안 첨부지도의 역사적·국제정치학적 의미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만큼 내용이나 분량 또한 방대하여 무려 1,004쪽에 이른다.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으로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과 2007년 우수학술도서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정 교수의 이번 작업은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들을 이겨내고 건강까지 상해가면서 완성한 것인 만큼 그 의의와 애착, 자부심이 남다른 면이 있다. “연구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거는 것, 그것이 역사학자가 추구하는 바이자 소망하는 바라고 생각했다”는 저자의 고백이 아름답고 미덥게 느껴지는 이유다.
경술국치 100주년과 해방 65주년을 기념하여 전후 독도문제를 가장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룬 이 연구서를 계기로 향후 한일관계는 물론 한미일관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새 지평이 열림과 동시에 한국이 좀더 성숙한 외교력을 갖추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 왜 ‘1947년’인가

이 책에서 1947년이 부각된 이유는 이해가 독도문제의 주요 행위주체인 한국, 일본, 미국에 가장 중요한 인식·정책·판단의 출발점이자 중심을 이룬 때였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의 경우 1947년부터 독도에 대한 관심과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된 지 불과 2년 뒤였고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지만,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의 명령에 의해 과도정부 조사단과 조선산악회가 독도학술조사대를 편성해 독도를 조사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가가 식민화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불법 영토편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완전 독립을 달성하기 전인 1947년 독도영유권 수호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던 것이었다. 다른 한편 독도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영토수호 의지는 일본의 재침략 위협을 받고 있다고 알려진 파랑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는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공격의 일환이었던 대마도 반환요구와 결합되었다. 즉, 한국인들은 1947년 이후 독도·파랑도·대마도를 일본과 관련한 영토주권의 대상으로 상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일본의 경우 종전 직후부터 대일평화조약의 체결이 국가적인 중대사로 부각되었다. 1945년 말부터 일본 외무성은 대일평화조약 준비작업에 착수했고, 1947년이 되면 조약과 관련한 모든 내부준비를 완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 외무성이 1947년 6월 제작해 미국과 연합국에 배포한 팸플릿은 이후 독도문제와 관련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 팸플릿은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부속도서’로 다루었다. 나아가 독도는 한국 이름이 없으며, 한국에서 간행된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는 허위사실을 적시했다. 이 팸플릿에 담긴 허위정보는 1948년 이후 맥아더사령부, 미 국무부 등이 독도문제와 관련한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게 한 문서적 증거가 되었다.

셋째, 미국의 경우 1946년 하반기 이래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했으며, 1947년 초부터 조약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7년 초반에 작성된 미 국무부의 다양한 초안들은 리앙쿠르암(독도)이 한국령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즉, 미국은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하는 시작단계부터 리앙쿠르암이 한국령임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1947년 국무부 정책기획단(PPS)은 미 국무부의 입장을 총정리하며, 조약 초안과 지도로 이를 표현했다(<그림 5-1, 5-3> 참조). 이러한 미국의 정책적 입장은 1949년 11월 주일미정치고문 겸 연합군최고사령부 외교국장이던 시볼드가 일본의 허위정보에 기초해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입장은 천변만화를 겪었고, 대일징벌적이고 엄격한 원칙을 고수한 연합국들의 견해를 무시한 채 미국이 단극적 단독강화의 방식으로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을 이끈 결과, 최종 조약문에서 독도조항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1947년은 전후 독도와 관련한 한국·일본·미국의 정책적 선택과 입장이 명확히 드러난 시점이자 전후 독도문제의 보이지 않는 출발점이었다. 1947년 한미일 3국은 각각 자국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독도에 대한 인식·정책·판단을 시작했으며, 한미일 3국의 표면화되지 않은 길항작용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의 체결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한국은 독도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지로 평화선에 독도를 포함시키며 독도에 대한 전반적 조사를 실시했고, 일본은 미국을 개입시켜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제하는 책략을 구사했다. 내연되던 갈등은 1952년 1월 이래 독도를 둘러싼 외교각서 교환전으로 표출되었고, 점차 독도 점거 및 무력충돌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3.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미·일 3국의 인식과 대응은 과연 어떻게 달랐는가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간의 본격적인 논쟁은 1952년 1월 한국의 해양주권선언, 즉 평화선 발표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은 주로 역사적 영유권에 강조점을 둔 반면, 일본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가지 측면에서 독도문제를 다루었다. 중요한 점은 1952년 이래 한일 간 독도논쟁에서 일본이 외교각서를 통해 논쟁을 주도하는 형식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외교각서를 통해 공세적 주장을 펼치면, 이에 대해 한국이 반박하거나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논쟁구도가 형성되었다. 때문에 논쟁에 있어서 일본이 더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 한국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비쳤다. 양국의 강력한 충돌과 상호작용의 결과, 독도 관련 자료의 발굴과 논리확립작업은 짧은 시간 내에 극한까지 진행되었다. 한편, 미국은 처음엔 독도가 한국령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일본인보다 더 일본의 입장을 우선시한 친일외교관 시볼드의 공작과, 2차 대전의 책임을 무겁게 물어 대일징벌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것보다는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일본을 반공의 보루이자 동맹국으로 삼는 것이 미국에 더 이익이므로 대일우호적인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미 대통령특사 덜레스의 판단에 휘둘리면서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의 소지를 제공했다.
1952년 한일 독도분쟁이 시작된 이래, 부산·동경·워싱턴 미 외교당국의 입장은 차이가 있었다. 부산 미대사관은 독도분쟁이 존재하며 한일회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동경 미대사관은 독도는 일본령이며 한국이 분쟁을 일으킨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952년 11월 워싱턴 본부는 1951년 8월의 정책결정을 통보했고, 이 사실을 1년 이상 알지 못했던 부산·동경은 경악했다. 현지의 사정에 동화되기 쉬웠던 한일 양국 미대사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1953년 상반기 이래 부산은 침묵했고, 동경은 미국이 일본 편에 서서 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강한 압력을 워싱턴에 보냈다. 1953년 11~12월 덜레스 국무장관은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결정했다. 즉, 독도분쟁은 한일 간의 문제다, 미국은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일본은 미국에 대해 독도문제에 개입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미국이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서 어떤 판단을 가졌든지 간에 이는 조약서명국의 합의된 공론이 아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양국은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1953년 말 내려진 덜레스의 정책판단이었고, 이후 지속된 미국의 공식적 독도정책이 되었다. 각 나라별 입장을 좀더 상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한일 간 독도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후 영토적 야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일본은 국가적 차원의 문서작업과 책략을 구사했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당시 나카이 요사부로와 일본정부 고위관리들은 독도가 한국령임을 알면서도 무주지로 영토편입 절차를 도모했고,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한 후에도 한국에는 이를 감추었다. 1947년 일본 외무성은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령이라는 허위정보를 담은 팸플릿을 미국과 연합국에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며, 1949~1951년 주일미정치고문 겸 연합군최고사령부 외교국장이던 시볼드 등을 통해 독도가 일본령이며 한국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바 없다는 거짓주장을 폈다.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과정에서 미국의 우호적 입장을 간파한 일본은 한국이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이용해 1952~1953년 간 독도를 주일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했다가 일본 어민들의 피해를 이유로 들어 해제함으로써 미국을 독도영유권 확인의 당사자로 개입시키고 영유권 증거를 획득했다. 1905년 일본 외무성의 책략은 1952~1953년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일본 외무성이 독도문제를 다루면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로는 ① 과거에 죽도(竹島) 혹은 기죽도(磯竹島)라는 명칭으로 불린 섬은 현재의 울릉도이며, 현재의 죽도는 과거에 송도(松島)로 불렸다. ② 1693년과 1881년 한국정부의 항의로 일본인의 죽도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는 현재의 울릉도이지 죽도(독도)가 아니다. ③ 한일 간 존재했던 충돌은 울릉도에 관한 것이지 현재의 죽도(독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④ 문헌·고지도상의 송도(松島)는 현재의 죽도(독도)로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 영토의 부분이다.
다음으로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국제법적인 근거는 크게 1905년 시마네현의 영토편입 고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 1952~1953년의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해제 등 세 가지였다. ① 1905년 시마네현청 고시 제40호(1905. 2. 22)에 의해 독도는 시마네현(島根縣) 오키도사(隱岐島司)의 관리하에 두어졌고,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 등이 효과적으로 섬을 개발했다. ② 종전 후에는 SCAPIN(연합군최고사령부지령) 677호(1946. 1. 29)와 1033호(1946. 6. 22)에서 죽도(독도)가 일본에서 배제되었지만, 주권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것이 아니었으며, 대일강화조약에 의해 죽도(독도)는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고, 미일안보조약­미일행정협정에 따른 미일합동위원회의 결정(1952. 7. 26)으로 죽도(독도)가 미군 연습기지로 선정되었고, 미일합동위원회의 결정(1953. 3. 19)으로 연습기지에서 해제되었는데, 이는 죽도(독도)를 일본 영토로 미국이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일본이 주장한 것은 독도의 일본 고유영토설이었다. 즉,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였으며, 1905년 근대법 절차에 따라 영토편입 수속을 밟았다는 것이었다. 이는 1905년 영토편입 당시 근거로 내세워진 무주지(無主地)편입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는데, 만약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고 일본이 이를 인지·보유·활용해왔다면 1905년의 무주지편입 절차 및 논리는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정부의 논리가 상호 모순적으로 구성된 가장 큰 요인은 1905년의 시점을 내세워서는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을 주장하기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 외무성이 내심 의지한 가장 중요한 핵심근거는 역시 전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과정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인정되었다고 하는 확신에 두어져 있었다. 문제는 일본 외무성이 여러 간접 통로로 미국의 의향을 파악했지만, 직접적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획득·보유하지 못한 데 있었다. 1952~1953년 간 일본이 구사한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해제 책략은 국내적·국제적 증거문서를 확보하는 동시에 미국의 개입과 동의를 획득하는 길이었다.
한편, 일본의 독도연구는 고유영토설, 무주지편입설(영토선점설) 등으로 대별되는데, 시기에 따라 그 강조와 중점이 변화했다. 1950년대 일본 외무성의 입장은 고유영토설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여러 일본측 자료들을 통해 독도가 한국령임이 분명해지자 영토선점설에 가까운 쪽으로 선회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또한 연구의 출발시점부터 일본은 독도문제의 해결에 한일 양국이 아닌 미국, 유엔, 국제사법재판소를 개입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특히 미국의 결정이 일본의 독도영유권 확인의 결정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렇듯 일본은 국제법적 측면에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 배경에는 미국의 결정과 협력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존재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을 독도문제의 결정자로 개입시키려 한 것이 전후 일본의 독도 정책·연구의 핵심이었다.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의 독도연구는 외무성의 공식주장보다는 시마네현 차원의 운동과 요구에 의해 강하게 주도되었다.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역할분담이며, 다른 한편으로 한국을 자극하기 위한 방략이기도 했다. 시모조 마사오가 주도하는 죽도문제연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독도문제를 부각시키고, 한국측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방정부 수준의 행사를 중앙 차원의 뉴스밸류를 갖게 만들어, 외교적·국제적 분쟁화에 성공하고 있다. 즉, 시마네현은 지방정부 차원의 요구와 의제를 자극적으로 포장한 후 한국 여론의 비판적 반응을 통해 일본의 국가적 차원의 의제로 전환시키는 교묘한 프로세스를 추구했다. 1950년대는 물론 1905년 독도의 불법 영토편입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 외무성과 시마네현은 동일한 목적하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독도연구는 주류적 역사학계·국제법학계의 관심사가 아니며, 주로 시마네현·돗토리현 지방사 연구자들의 몫이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독도문제를 ‘분쟁’화시키는 주역이 시마네현 지방정부이고, 이를 ‘객관적’이며 주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해당 지역사 연구자들이며, 핵심자료로 지목되는 문서들도 시마네현에서 발원한 것이라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2) 한국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한국정부가 가장 중시한 것은 한국정부의 조약서명국·연합국 지위확보 문제였다. 조약서명국 지위가 정치적·외교적 차원의 문제였다면, 한국의 경제적 현실과 직결된 중요 사안은 재한일본 국가·개인의 재산, 즉 적산·귀속 재산의 처리문제였으며, 그다음이 맥아더라인의 유지를 통한 수산업의 보호문제였다. 영토문제는 우선순위가 낮았는데, 영토문제 내에서는 대마도가 중시되었으며, 그다음이 파랑도와 독도의 순서였다. 이러한 영토 인식은 1947년 한국의 상황과 경험이 부여한 관성의 결과였다. 한국정부는 1951년 총 세 차례에 걸쳐 미 국무부에 한국정부의 공식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이 속에서 한국정부가 제시한 우선순위도 귀속재산의 효력 인정, 맥아더라인의 유지, 대마도·파랑도·독도의 순서였다. 전쟁 중 피난수도 부산에서 약 60여 명의 인원으로 유지되던 한국 외교당국으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울과 부산에서 축적된 독도 관련 자료들은 주미한국대사관에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고, 영토문제와 관련해 정치적 선전인 대마도 주장과 위치·실체가 미확인상태인 파랑도에 대한 주장이 독도영유권과 결합됨으로써 그 신뢰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한편, 1953년 첫 번째 대일반박서 이래 한국정부의 견해는 역사적 영유권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었다. 국제법적 측면에서도 한국정부가 강조한 두 가지 점이 매우 중요했다. 첫째, 1905년 일본의 독도 점령 당시 이 섬은 주인 없는 땅, 즉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령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독도는 이미 신라시대 이후 한국이 인지·보유·활용했으며,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전근대는 물론 근대에 들어서도 울릉도와 결합될 경우에만 유의미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섬이었다. 일본측이 제시한 어떤 자료에서도 울릉도가 언급되지 않은 독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도영유권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므로, 1905년 일본의 행위는 무주지편입이 아니라 한국령을 강제 점령한 불법적 행위였다. 둘째, 대일평화조약 당시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될 도서명단에 포함되지 않음으로써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다는 일본 주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일본은 미일협의과정에서 미국을 설득하며 이런 뉘앙스와 분위기를 감지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공개되거나 관련 당사국·연합국들 간에 합의된 사실이 아니었다. 일본 주장대로라면, 한국정부가 논박한 것처럼 대일평화조약문에 특정되지 않은 도서들의 영유권이 문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대일평화조약문에 제주도·거문도·울릉도 3개 섬만이 특정된 데 대한 가장 합리적이며 일반적인 해석은 대표적 도서만을 언급함으로써 조약문의 복잡함과 세부적 논의를 회피한 것이란 쪽이다. 대일평화조약을 이용하려는 일본정부의 견해를 비판한 한국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적어도 대일평화조약에서 일본측 주장대로 일본령에서 배제될 도서들을 특정한다는 원칙은 연합국 간에 합의된 바 없으며, 조약문에 반영된 사실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일평화조약에서 취급된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동일했다. 이러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이후 독도영유권에 대처하는 한국측 견해·연구의 핵심이 되었다.

(3) 미국

독도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정책적 입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든 실질적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주일미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이고, 또 한 사람은 당시 대통령특사였던 존 포스트 덜레스다.
우선 시볼드는 외교관으로서의 기본적 자질마저 의심스러운 인물로, 깊은 밤 빈번히 일본 외무성 관리들로부터 많은 자료를 건네받았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그러나 타국에서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일본의 이익을 대변한 자였다. 그는 대만문제에 대해 중국정부 혹은 중국전문가와 접촉·논의·협의하지 않았다. 북방 4개 섬 문제에 대해서도 소련정부·외교관·전문가와 접촉한 흔적이 전무했다. 당연히 한국의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정부, 외교관·관리, 한국문제 전문가는 물론 주한미대사관과도 전혀 협의하거나 자문을 구한 바 없다. 한국의 영토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한국정부나 한국전문가, 한국자료, 주한미대사관은 완전히 무시한 채 일본 외무성의 자료와 일본 외무성 관리를 신봉한 결과였다. 시볼드는 소련·중국이 알지 못하는 장막 뒤에서 연합국의 전시 합의를 무시한 채 친일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또한 시볼드의 대응은 영국·호주·뉴질랜드는 물론 필리핀·버마 등 아시아의 다른 연합국들이 인지했으면 대소동을 빚었을 정도로 친일적이었다. 한국정부와 주한미대사관 역시 1949년 11월 2일자 조약 초안은 물론 독도를 일본령으로 뒤바꿔놓은 시볼드의 행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진술 속에서 한국 영토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전후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과 영토분쟁을 벌이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서 일본의 영토를 명확히 표시하는 조문들이 설정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지도가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간략한 조문이 작성됨에 따라 조문 해석에서의 모호성, 이중성 등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일평화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일본의 영토를 규정하는 세 종류의 방식이 존재했다. 첫째 일본 영토를 특정하는 방법, 둘째 일본 영토와 방기될 영토를 특정하고 이를 지도에 표시하는 방법, 셋째 일본에서 방기될 영토를 특정하는 방법 등이었다. 그 가운데 일본에 가장 유리한 것이 일본에서 방기될 지역을 특정하는 방법이었다. 여기에 해당 영토가 포함되지 않으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외교역사상 모든 강화조약·평화조약의 핵심은 영토문제, 정치적·경제적 배상이었다. 그런데도 시볼드는 대일평화조약 조문에서 일본이 이양할 영토조항인 제4조부터 제12조까지를 모두 생략하며, 일본을 제외한 여타 서명국들이 일본의 관할하에 있던 구영토들의 처분에 동의한다는 조약의 부속서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참으로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그는 대만, 북방 4개 섬, 독도 등의 문제를 부속서류에서 다루자고 했다. 이런 주장은 일본 외무성에서조차 전혀 상상되거나 내부 검토되지도 못했던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그가 일본 외무성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일본의 이익을 반영하려고 애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시볼드가 진정으로 옹호한 ‘일본의 심리적 위축’은 일본이 저지른 모든 전쟁범죄와 전쟁책임이라는 객관적 사실마저 부정하거나 호도하려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독도와 관련한 시볼드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조약 제3조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특정해야 한다. 둘째,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었으며, ‘유효’하다. 셋째, 독도를 한국 해안 외곽의 섬으로 볼 수 없다. 넷째, 독도에 기상·레이더 기지를 설치한다면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거자료가 단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시볼드가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의 어디에서도 그의 주장의 근거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관련 문서나 근거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시볼드의 주장은 매우 교묘한 것이었는데, 독도를 일본령으로 특정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과 논리구도가 먼저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고, 한국의 입장은 완전히 무시한 후, 미국의 군사적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시볼드는 주장에 앞서 먼저 질문을 했어야 마땅했다. 시볼드가 먼저 했어야 하는 합리적인 질문은 왜 미 국무부가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했는가였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자신의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의 다음 질문은 독도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한국정부와 주한미대사관에 확인하는 작업이어야 했다. 그런 후에 마지막으로 일본의 주장과 미 국무부·한국정부의 입장을 비교하는 것이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시볼드의 논리에는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간행한 팸플릿의 흔적이 명백히 존재한다. 시볼드가 인용한 것은 “다줄렛(Dagelet,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 명칭이 있지만, 리앙쿠르암에 대해서는 한국명이 없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지사는 리앙쿠르암을 시마네현(島根縣) 소속 오키도사(隱岐島司) 소관으로 정한다는 현 포고를 공포했다”라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일본 주장의 ‘오래되고 유효한’ 근거 및 한국령을 부정하는 근거로 일본 외무성의 거짓말을 활용했던 것이다. 또한 독도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비하자는 제안에서는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당했던 침략적 만행을 미국의 군사적 이익과 결합시키는 교묘한 책략을 발견하게 된다. 시볼드는 러일전쟁기 독도에 일본 해군의 무선전신과 감시망루가 설치되었던 사실을 원용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실은 일본 외무성의 팸플릿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일본 외무성을 통해 확보한 정보·자료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처럼 시볼드가 제안한 보고서의 배경에 일본 외무성의 논리와 접근방법이 자리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시볼드는 미 국무부의 11월 2일자 조약 초안에 대한 두 차례의 보고서에서 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 일본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또한 조약 초안에 대한 시볼드의 전반적 검토결과는 노골적인 친일주장이자, 국제적 합의나 미국의 공식정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덜레스에 대해 알아보자.
대일평화조약의 추진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1950년 4월 19일 뉴욕 주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노련한 변호사였던 존 포스터 덜레스를 국무장관 고문에 임명했다. 초당적 외교를 모토로 한 덜레스는 5월 18일 대일평화조약의 체결을 담당하는 대통령특사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17일 덜레스가 사전조사차 동경을 방문함으로써 대일평화조약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의 핵심이 “비징벌적인 평화조약”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덜레스의 첫 출발점이 되었다.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대일평화조약의 첫 번째 특징이 ‘복수의 강화’가 아닌 ‘화해와 신뢰의 강화’였으며, 이는 덜레스가 샌프란시스코평화회의 둘째 날 연설 중에 언급한 ‘화해의 강화’, ‘징벌이 아닌 무차별의 조약’이라는 규정에서 잘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요시다에 따르면 이 조약에는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이는 덜레스의 말과 같은 조약의 비징벌적인 성격에 따른 것으로, 제2차 대전 후 체결된 이탈리아·루마니아강화조약에 전쟁책임이 언명되어 있는 것과도 다른 것이었으며, 군비에 대해 하등의 제한을 부가하지 않았고, 배상의 방식도 종래의 강화조약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대일평화조약 체결 시 덜레스의 보좌관으로 미 국무부 동북아시아국의 책임자였던 앨리슨은 이러한 조약의 성격이 덜레스의 개인적 경험 및 확신과 관련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제1차 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유조약에 미국대표단의 초년 외교관으로 참석했던 덜레스는 징벌적 조약이 미래 전쟁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패전국 독일에 엄청난 배상지불금을 부과함으로써 2차 대전이 발발했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패전국에 대한 전쟁책임의 명문화, 영토할양, 배상금 등이 이전까지 강화조약의 일반적 방식이었는데, 제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의 평화조약에서도 적용되었던 이 원칙들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런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평화조약의 시작단계부터 일본인들과 협의한다는 원칙이었다. 비록 일본인들의 견해를 결정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전 평화회담·평화조약과 전혀 다른 성격의 평화회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덜레스의 개인적 확신과는 별개로 한국전쟁의 발발은 일본의 지정학적·전략적 위상을 제고시켰다. 미국은 아시아의 마지막 교두보이자 태평양 도서방위의 중요 거점인 일본과의 평화관계를 회복하고 동맹 혹은 친구로 만드는 작업이 긴급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공군의 개입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대일평화조약은 일본의 전쟁책임, 배상, 영토할양 등을 배제한 채 패전국 일본을 진정한 협상상대로 인정한 세계 외교사의 유례가 없는 우호적 평화조약이었고, 실제로는 미국과 일본 간에 안보와 평화를 맞교환한 쌍무협정의 성격이 강했다. 덜레스의 개인적 신념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새로운 조약 초안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1947년 이래 미 국무부가 준비해왔던 대일징벌적 조약 초안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조약 초안이었다. 덜레스의 요구는 첫째 간단한 초안일 것, 둘째 평화조약에 초점을 둘 것 등 두 가지였다. 미 국무부가 준비한 상세하고 복잡하며,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 조약발효 후 감시체제 등을 강조한 이전의 조약 초안들은 책상 위에서 치워졌다.

이렇듯 독도문제에 대한 한미일 3국의 관계와 입장은 상이했다. 먼저 일본은 식민지·분단·군정·전쟁의 참화 속에 빠진 한국을 상대로 미국의 개입과 동의를 획득해 독도영유권을 확보하려는 준비된 계획과 책략을 실현했다. 1950년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은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무진의 행정적 편의주의가 고위급정책을 대체함으로써 독도분쟁의 원인제공자가 되었다. 독도분쟁은 미국의 외교적 결정력이 파생시킨 뜻하지 않은 문제였고, 상황을 파악하게 된 미국은 자국의 위치를 중립으로 조정했다. 반면 전쟁 중 국가의 생존이 위기에 처했던 한국으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논란에의 동참이었고, 사력을 다해서야 독도를 지킬 수 있었다.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준비·책략·공격자, 한국은 신생정부·초보외교·방어자, 미국은 결정자·조정자의 입장이었다. 즉, 전후 독도문제가 부각되는 핵심에는 역내질서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역할과 결정권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이라고 하는 지역체제 형성과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4. 영국과 미국 조약 초안에 첨부된 지도

이 지도는 독도문제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지도는 샌프란시스코회담 준비·진행 과정에서 제작된 영국정부의 유일한 공식지도였다. 또한 일본 영토규정과 관련해 연합국측에서 유일하게 제작된 지도였다. 둘째, 이 지도는 영토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집중적 로비대상이 된 미국이 아닌 영국의 견해를 반영함으로써, 연합국들의 보다 객관적이고 제3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일본의 국가적 문서조작과 로비의 집중적 통로가 되었던 미국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일본의 로비에서 자유롭던 영국정부에서 제작한 이 지도는 독도영유권에 대한 연합국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셋째, 이 지도는 영국이라는 주요 연합국의 견해일 뿐만 아니라 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인도·파키스탄·실론 등 영연방국가들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었다. 넷째, 결정적으로 이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되어 한국령임이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 드러나듯이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표시되었다. 이는 SCAPIN 677호(1946. 1) 이후 가장 명확하게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재확인해준 증거자료이다. 다섯째,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영국이 최초의 1차 초안에는 독도 및 울릉도, 제주도까지도 일본령으로 오인했다가, 제2차 초안부터는 정정작업을 통해 이들 지역이 일본령에서 배제됨을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SCAPIN 677호에 근거한 판단으로 단순한 착오였다는 일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여섯째, 비록 이 지도가 최종 평화조약의 공식적인 영토규정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독도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영유권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조약문에는 독도문제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은 독도가 일본에서 배제된다는 문구가 없으므로 이것이 자국의 영유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영국 조약 초안의 성립과 변화과정은 이런 일본의 주장이 근거 없음을 증명한다. 영국의 1차 초안은 4대 섬 중심으로 일본 영토에 포함될 지명을 특정하는 방식을, 2차·3차 초안은 4대 섬 중심으로 일본 영토에 경계선을 표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방식, 즉 ① 일본령에 포함·배제될 섬들의 특정, ② 일본령을 표시하는 위도선·경도선을 활용한 일본령 경계선 표식, ③ 부속지도의 활용은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명시된 대일영토규정을 현실화한 방안이었고, 1947~1950년 시기 미 국무부의 대일평화조약 초안과 1951년 영국 외무성의 대일평화조약 초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상호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조약 초안을 성안했는데, 모두 동일한 방식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연합국의 전시 대일영토규정이었던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근거한 대일영토규정은 1951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종 조약에서는 일본령에 속할 지역과 배제될 지역에 대한 특정이 사라짐으로써 전반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토규정이 조정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의 대일영토규정을 폐기했을 뿐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는 못한 것이었다.

미 국무부 지리담당관 보그스가 제작한 이 지도는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 준비과정에서 작성된 최초의 지도였다. 다음으로 보그스에 의해 지도가 활용되었으며, 일본령·대만령·한국령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직선 기선이 지도 위에 표시되었다. 즉, 지도의 도입과 이에 일본·대만·한국의 영토를 명확하게 직선으로 표시한 것은 바로 지리전문가인 보그스의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1947년 7월 24일 보그스의 영토조항 개정초안이 제시된 이후 국무부의 대일평화조약 초안에는 모두 일본령, 한국령, 대만령을 표시하는 붉은색 직선 기선이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백하게 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지도의 >자형의 꺾이는 부분 왼쪽 편에 울릉도(Utsuryoto)가 표시되어 있고, 그 아래 부분에 독도가 점선 원형의 도서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 수기로 ‘Takeshima’라고 적어놓았다. 즉,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백하게 표시된 것이다. 1947년 7월 미 국무부 내 최고의 지리전문가였던 보그스의 검토를 통해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이후 조약 초안에는 한국령에 대한 보그스의 평가와 서술이 그대로 인용되었다.
목차

저자의 글

서장
1. 독도연구의 역사: 논쟁에서 연구가 시작되다
(1) 한국·일본 양국의 공식견해
(2) 한국의 독도연구사
(3) 일본의 독도연구사

2.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과 독도문제
(1) 전후 독도문제와 연원: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2) 미국 외교문서의 공개와 독도문제의 새로운 연구

3. 연구의 시각·구성·자료
(1) 한·미·일 3국 관계로서의 독도문제
(2) 1947년이라는 시점
(3) 주요 구성
(4) 활용자료

1장 한국 1947년 : 남조선과도정부.조선산악회의 독도조사
1. 독도에서 서울로: 1905년 '침략'의 재현
(1) 독도의 위기: 일본인의 불법 점거·총격
(2) 서울의 대응: 독도·맥아더라인 위기의 결합

2. 과도 정부·조선산악회의 울릉도·독도 조사
(1) 과도정부의 수색위원회 결성 (2) 조선산악회의 합류 (3) 최초의 독도조사

3. 1947년 독도조사가 남긴 유산
(1) 보고강연회·전람회·조사보고서 (2) 신문·잡지의 보도 (3) 독도 관련 주요 개념·논점·인식의 부상

4. 파랑도와 대마도의 결합
(1) 파랑도: 일본의 또 다른 침략 소문 (2) 입법의원: 대일강화회의 참석·대마도

2장 한국 1948년 : 독도폭격사건과 독도의 재발견.재인식
1. 1948년 독도폭격사건
(1) 독도폭격사건의 발생 (2) 주한미군·극동군사령부의 조사 (3) 소청심사와 배상 (4) 폭격사건의 진상과 쟁점

2. 1948년 한국인들의 독도인식
(1) 국민적 공감대: 독도는 한국 영토 (2) 우국노인회의 청원: 독도·파랑도·대마도의 결합 (3) 미군정의 대일배상요구안과 독도 (4)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된 독도영유권

3장 일본 1947년 : 독도.울릉도는 일본령
1. 일본정부의 평화조약 준비작업(1945~1950)
(1) 평화조약문제연구간사회(1945. 11 ~ 1947. 5): 평화조약 준비작업의 시작
(2) 평화조약각성연락간사회(1947. 5) 설치과 일본정부의 일반원칙논의
(3) 연합국과의 협의(1947. 7) 개시와 정책심의위원회의 설치
(4) 강화방식의 검토: 역코스와 '사실상의 평화' 추구정책(1948)
(5) '단독강화', '다수강화'의 선택(1949~1950)

2. 일본의 영토문제 준비대책과 로비
(1) 일본 외무성의 영토문제 준비작업 (2) 영토문제 관련 로비는 있었는가?

3. 1947년 일본 외무성의 책략: 독도·울릉도 자국령 문서 작성 및 홍보
(1) 일본 외무성의 「일본의 부속소도」시리즈 간행
(2) 일본 외무성, 독도·울릉도를 일본의 부속소도로 선언
(3) 1947년 일본 외무성 독도 인식의 연원

4장 미국 1947년 : 리안쿠르암(독도)은 한국령
1. 대일평화회담과 조약 초안의 성립과정
(1) 대일평화조약의 추진·체결 과정 (2) 대일평화조약 초안의 변화과정

2. 대일조약작업단의 조약 준비작업과 독도 인식(1946~1947)
(1) 1946년 대일조약작업단의 립과 조약 초안 (2) 1947년 영토조항의 초안과 수정: 독도는 한국령

5장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과 독도 인식
1.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 1 (1947~1949):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1) 1947~1948년 대일조약작업단의 조약 초안과 독도 (2) 1949년 새로운 조약 초안과 독도

2.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 2 (1949~1950): 시볼드의 공작
(1) 1949년 논쟁: 시볼드의 초안 검토와 리앙쿠르암(독도)의 일본령 주장
(2) 주한미대사의 한국 참가 요청
(3) 뒤바뀐 독도영유권(1949. 12~1950)

3.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 3 (1950~1951): 독도조항의 삭제
(1) 존 포스터 덜레스의 등장과 새로운 대일평화조약의 추진
(2) 1950년 8월 7일자 초안: 포츠담 선언 대일영토규정의 폐기
(3) 1950년 9월 11일자 초안: 개정초안
(4) 1950년 9월 11일자 대일평화7원칙: 사라진 영토규정
(5) 1951년 3월 제안용 임시초안(공식초안, 연합국에 송부)

4. 영미합동초안의 성립과 최종 조약문의 확정(1951)
(1) 1951년 5월 3일자 제1차 영미합동초안: 영연방국가에 송부
(2) 1951년 6월 14일자 제2차 영미합동초안: 한국의 연합국 자격 배제·전시 연합국 대일영토규정의 폐기
(3) 1951년 7월 3일자·7월 20일자 제3차 영미합동초안: 관련국 송부
(4) 1951년 8월 13일자 최종초안

6장 영국의 평화조약 초안과 영미협의
1. 영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부속지도의 성립(1951. 3)과 한국 독도영유권의 재확인
(1) 영국 지도의 발굴경위 (2) 영국 조약 초안의 성립과정 (3) 영국 조약 초안의 한국 관련 내용 (4) 영국 지도의 특징과 한국 독도영유권의 재확인

2. 1951년 영미협의와 영토문제·한국문제의 논의
(1) 1951년 3월 영구과 미국의 의견조율 (2) 제1차 영미회담(1951. 4. 25~5. 4)과 한국의 참가·영토 문제의 논의 (3) 제2차 영미회담(1951. 6. 2~14)과 한국의 참가 배제 결정

7장 미국과 일본의 협의 (1951)
1. 1951년 덜레스의 1차 방일과 미일의 주요 조약 협의
(1) 일본의 대일평화7원칙에 대한 대책준비(1950. 11~1951. 1)
(2) 덜레스의 1차 방일(1951. 1~2)과 주요 조약의 사실상 가조인
(3) 미국 조약 초안(1951. 3 임시초안)에 대한 일본정부의 회신(1951. 4. 4)

2. 1951년 덜레스의 2차 방일과 일본의 한국 배제 주장
(1) 덜레스의 계획, 일본의 계획
(2) 영국 초안에 대한 미일협의와 독도문제
(3) 일본의 한국 배제 주장과 무고

8장 한국정부의 대일평화조약 대응과 한미협의 (1951)
1. 1948~1950년 간 한국정부의 대일평화조약 준비
(1) 네 가지 준비의제: 배상·참가·영토·맥아더라인 (2) 맥아더라인의 쟁점화

2.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임시초안(제안용)(1951. 3) 수교와 한국정부의 제1차 답신(1951. 4. 27)
(1) 워싱턴·동경의 외교 (2) 서울의 대응: 외교위원회의 구성 (3) 한국정부의 제1차 답신서(1951. 4. 27) 작성과 대마도 반환 요구
(4) 미국 무부의 논평(1951. 5. 9)

3. 대일평화조약 영미합동초안(1951. 7)과 한국정부의 대응
(1) 미국의 한국 조약서명국 자격 부정(1951. 7. 9) (2) 한국의 제2차 답신서(1951. 8. 2) (3) 러스크 서한(1951. 8. 10)과 한미협의의 귀결 (4) 한국측 협상전략의 검토

5. 한국의 비공식 자격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참가

9장 보이지 않는 전투 : '독도분쟁'의 서막과 한.미.일의 대응
1. 한국의 대응: 평화선과 파랑도·독도 조사
(1) 평화선 속에 포함된 독도 (2) 파랑도조사의 실패 (3) 1952년 한국산악회의 독도조사와 폭격사건 (4) 1953년 한국산악회의 독도조사와 영토표석 설치

2. 본의 대응: 선전과 책략
(1) 1951년 일본의 선전: 독도영유권 주장
(2) 1952~1953년 일본의 책략: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과 해제
(3) 1953년 중반: 독도 침범·일본령 표식 설치

3. 미국의 대응: 적극 개입에서 중립으로의 선회
(1) 1952년 부산·동경·워싱턴의 시작 차이 (2) 1953년 독도 폭격연습장 해제와 한국·일본의 대응 (3) 동경대사관의 개입 주장과 덜레스의 중립 선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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