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 대등서명
- Tragedy of liberation
- 개인저자
- 프랑크 디쾨터 지음 ; 고기탁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열린책들, 2016
- 형태사항
- 522 p., 도판 [8] p. : 지도 ; 24 cm
- 총서사항
- 인민 3부작
- ISBN
- 9788932917733
- 청구기호
- 912.08 D575p
- 일반주기
- 원저자명: Frank Dikötter
- 서지주기
- 연대표와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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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8397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8397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넋을 빼놓는다. 오늘날의 중국 정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
앤 애플바움, 2004년 퓰리처상 수상자
중화 인민 공화국 선포, 대약진 운동, 그리고 문화 대혁명….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긴 여정, <인민 3부작>
그 첫 번째 이야기, <해방의 비극> 출간!
중국 현대사를 재정립하다
영국과 홍콩에서 중국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해 온 프랑크 디쾨터의 책이다. 현재까지 출간된 그의 10여 권 저서들은 현대 중국을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시각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중 <인민 3부작>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중심에 두고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와 사건 들을 되짚는 연작 기획이다. 디쾨터는 인민 3부작 중 <마오의 대기근>으로 이미 2011년 새뮤얼 존슨상을 수상했고, <해방의 비극>으로 2014년 오웰 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름으로써, 학자와 논픽션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이 책에서, 중국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그 작업을 위해 디쾨터가 의지하는 것은 최근에서야 공개된 비밀문서와 증언 등 수많은 기록 자료다. 비밀경찰의 보고서에서부터 수정되지 않은 지도부의 연설문, 사상 개조 운동에서 발췌된 자백서, 농촌 반란을 둘러싼 실태 조사서, 대공포 시대의 희생자들에 관한 통계 자료, 공장과 소규모 작업장의 근로 환경 조사서, 일반인들이 제출한 항의서 등, 지금까지 기밀로 다뤄졌던 수백 개의 문건들이 이 책을 위해 낱낱이 파헤쳐졌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현장감과 탄탄한 역사적 근거는 그동안 부당하게 묵살되어 왔던 <해방>의 실제 현장을 고스란히 재연해 낸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의 10여 년은, 국공 내전 이후 전개되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다. 이 책은 치밀한 기록 연구와 포괄적인 시각을 통해 21세기 가장 강력한 정권들 중 하나인 중국의 토대가 마련된 초기 중화 인민 공화국의 민낯을 파헤치는 역사적 프리퀄이다.
중국 인민은 해방되었는가
디쾨터의 주장은 명확하다. 공산당이 거둔 국공 내전에서의 승리는 중국 인민들의 해방과 무관했다. 애초에 당시 중국 인민들의 절대 다수는 새로운 정부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자도, 완강한 반대자도 아니었다. 대부분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없었고, 따라서 생활인으로서 각자의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다만 오랜 침략과 내전을 겪은 터라 안도와 희망,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전쟁의 종식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그들에게 이념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행태는 20세기 최악의 폭정일 뿐이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폭력 앞에 인민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공산당 집권 초기 10년 동안 최소 5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담한 현실을 지근거리에서 목도하거나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해방>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가? 종전 이후 중국 사회는 여러 계급 범주로 나뉘었다. 그중 지주, 부유한 농민, 자본가들은 철저하게 핍박받았다. 공산당 이념에 반한다는 것이 근거였고, 반혁명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지주로 몰린 사람들의 형편은 실상 이웃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처형에는 조잡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달렸고, 임의로 죄인을 선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중앙당에서 내려진 할당량이 있기에 가능했다. 지역 지도부는 할당량을 넘겨 중앙당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했고, 이웃 지역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51년 4월 부유했던 지역인 옌신 현에서는 중학생 100여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열 살 소년은 들보에 묶여 매달린 채 매질을 당했고, 여덟 살 소년은 십자가에 묶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섯 살의 아이가 첩보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목숨을 잃는 소년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고문 끝에 죽거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간혹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공산당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대공포 시대가 유지되고 더욱 악랄해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뿐이었다. 지주, 부유한 농민, 반동분자, 범죄자라는 낙인은 대대로 계승되었다. 자식들에게 박해와 차별이 대물림되었다. 그들은 학교 교사에게 지목되어 따돌림을 받았다. 청년단 단원들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성인들은 정치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중 일부는 최소 300회 이상 비판 대회에 참석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이들은 공산당의 편에 서지 않을 경우 평생을 계급 투쟁의 전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점점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다. 이웃과의 왕래를 끊고, 삶을 최대한 단조롭게 살았다. 죽의 장막이 쳐지고 외국인들의 대대적인 탈출이 시작되자 중국 인민들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5000만이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71만 명의 인민들이 이 시기에 처형되었다. 디쾨터는 반동분자들에 대한 보고 내용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숙청 등 모든 것을 감안하면 처형된 사람들의 수가 200만 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어림한다. 인구 1,000명 당 3.6명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 과연 인민의 해방이었을까?
다수의 지지를 얻고 소수를 반대하여 모든 적을 각개 격파하라
마오쩌둥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했다. 표면적으로나마 자유와 평등, 평화, 정의,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가치들을 내세웠다. 농민에게는 땅을, 지식인에게는 자유를, 사업가에게는 사유 재산의 보호를, 노동자에게는 보다 높은 생활 수준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후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실질적인 농노제에 종속되었고 공무원들은 쓰임이 다하는 순간 버림받았다. 재계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츠러들었고, 이윤과 회사를 국가에 복속시켰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로 인해 실업률이 급상승했다. 지식인들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디쾨터가 중국 공산주의의 역사를 약속과 약속의 파기로 점철된 역사라고 정리하는 이유다.
그래도 인민들은 웃었다. 중국은 일종의 거대한 극장이었다. 심지어 무대 밖에서도 억지 미소를 지었다. 농부들은 곡식을 더 많이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조차 팡파르를 울리며 열정적으로 웃어야 했다. 상점 주인들은 재산을 국가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환한 얼굴로 자발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무엇보다 괜히 꾸물거렸다가 비난을 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생계를 국가에 의존했다. 그리고 해방 이래로 무수히 많은 시간의 학습 모임을 통해 당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올바른 대답을 내놓고, 동조하는 척하는 방법을 배운 터였다. 인민들은 그들이 처음에 약속받은 대로 영웅이 될 수는 없었지만 상당수 훌륭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억눌린 울분을 참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공산 진영에 비스탈린화 움직임이 일었다. 마오쩌둥은 인류의 4분의 1을 공산주의 반열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야 했다. 그의 선택은 당파를 인정하고 지식인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민영 기업의 집산화로 인한 노동자들의 합작사 탈퇴가 잇따르던 상황이었다. 적절한 대우가 부족하다고 여긴 제대 군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공산당 관리들의 태도에서도 변화가 목격되고 있었다. <백화 제방> 운동을 통해 과거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심으로 보다 인간적인 형태의 사회주의를 제안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나은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주변의 다수를 규합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던 때였다. 정부의 거짓말과 약속 불이행, 사상 개조에 수반된 가혹한 억압에 대해 지식인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혁명의 적, 정권을 전복하려는 반동분자들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도록 한 교묘한 전략이 되었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라는 당의 요구에 순진하게 응한 것일 뿐이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반우파 투쟁의 중심에 내던진 꼴이 되었다. 또다시 할당량이 내려왔고, 애매하고 막연한 기준에 의해 50만이 넘는 사람들이 우경 세력으로 내몰렸다. 평생을 당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제 마오쩌둥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의 중국은 풍랑 속의 배와 같았다. 배를 침몰시키지 않고 지켜 낸 마오쩌둥은 인민의 영웅이 되었다. 거대한 대륙 국가를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했고, 한국 전쟁을 통해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성전을 지휘했다. 마오쩌둥은 <해방> 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 진영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섰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노동 운동가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이 어느 농민의 분노를 통해 품게 된 사명감이었다. 최초의 그 사명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농민과 노동자를 위했던 이념적 순수성은 어떻게 왜곡되었을까?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을 초래한 것은 무엇이었을가? <인민 3부작>은 이러한 질문들을 안고 떠나는 기나긴 역사적 여정이다. 후속 출간될 <마오의 대기근>과 <문화 대혁명>은 21세기 현재의 중국인들이 겪었고 이겨내야만 했던 가장 슬프고 참혹한 역사를 이야기할 것이다. 디쾨터는 이 책 <해방의 비극>을 통해 중국 혁명 이후 초기 10년에 주목함으로써 현대 중국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여정을 시작한다. 그 현장 속으로 계속 들어가 보자.
앤 애플바움, 2004년 퓰리처상 수상자
중화 인민 공화국 선포, 대약진 운동, 그리고 문화 대혁명….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긴 여정, <인민 3부작>
그 첫 번째 이야기, <해방의 비극> 출간!
중국 현대사를 재정립하다
영국과 홍콩에서 중국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해 온 프랑크 디쾨터의 책이다. 현재까지 출간된 그의 10여 권 저서들은 현대 중국을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시각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중 <인민 3부작>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중심에 두고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와 사건 들을 되짚는 연작 기획이다. 디쾨터는 인민 3부작 중 <마오의 대기근>으로 이미 2011년 새뮤얼 존슨상을 수상했고, <해방의 비극>으로 2014년 오웰 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름으로써, 학자와 논픽션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이 책에서, 중국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그 작업을 위해 디쾨터가 의지하는 것은 최근에서야 공개된 비밀문서와 증언 등 수많은 기록 자료다. 비밀경찰의 보고서에서부터 수정되지 않은 지도부의 연설문, 사상 개조 운동에서 발췌된 자백서, 농촌 반란을 둘러싼 실태 조사서, 대공포 시대의 희생자들에 관한 통계 자료, 공장과 소규모 작업장의 근로 환경 조사서, 일반인들이 제출한 항의서 등, 지금까지 기밀로 다뤄졌던 수백 개의 문건들이 이 책을 위해 낱낱이 파헤쳐졌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현장감과 탄탄한 역사적 근거는 그동안 부당하게 묵살되어 왔던 <해방>의 실제 현장을 고스란히 재연해 낸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의 10여 년은, 국공 내전 이후 전개되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다. 이 책은 치밀한 기록 연구와 포괄적인 시각을 통해 21세기 가장 강력한 정권들 중 하나인 중국의 토대가 마련된 초기 중화 인민 공화국의 민낯을 파헤치는 역사적 프리퀄이다.
중국 인민은 해방되었는가
디쾨터의 주장은 명확하다. 공산당이 거둔 국공 내전에서의 승리는 중국 인민들의 해방과 무관했다. 애초에 당시 중국 인민들의 절대 다수는 새로운 정부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자도, 완강한 반대자도 아니었다. 대부분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없었고, 따라서 생활인으로서 각자의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다만 오랜 침략과 내전을 겪은 터라 안도와 희망,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전쟁의 종식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그들에게 이념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행태는 20세기 최악의 폭정일 뿐이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폭력 앞에 인민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공산당 집권 초기 10년 동안 최소 5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담한 현실을 지근거리에서 목도하거나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해방>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가? 종전 이후 중국 사회는 여러 계급 범주로 나뉘었다. 그중 지주, 부유한 농민, 자본가들은 철저하게 핍박받았다. 공산당 이념에 반한다는 것이 근거였고, 반혁명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지주로 몰린 사람들의 형편은 실상 이웃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처형에는 조잡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달렸고, 임의로 죄인을 선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중앙당에서 내려진 할당량이 있기에 가능했다. 지역 지도부는 할당량을 넘겨 중앙당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했고, 이웃 지역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51년 4월 부유했던 지역인 옌신 현에서는 중학생 100여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열 살 소년은 들보에 묶여 매달린 채 매질을 당했고, 여덟 살 소년은 십자가에 묶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섯 살의 아이가 첩보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목숨을 잃는 소년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고문 끝에 죽거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간혹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공산당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대공포 시대가 유지되고 더욱 악랄해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뿐이었다. 지주, 부유한 농민, 반동분자, 범죄자라는 낙인은 대대로 계승되었다. 자식들에게 박해와 차별이 대물림되었다. 그들은 학교 교사에게 지목되어 따돌림을 받았다. 청년단 단원들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성인들은 정치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중 일부는 최소 300회 이상 비판 대회에 참석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이들은 공산당의 편에 서지 않을 경우 평생을 계급 투쟁의 전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점점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다. 이웃과의 왕래를 끊고, 삶을 최대한 단조롭게 살았다. 죽의 장막이 쳐지고 외국인들의 대대적인 탈출이 시작되자 중국 인민들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5000만이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71만 명의 인민들이 이 시기에 처형되었다. 디쾨터는 반동분자들에 대한 보고 내용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숙청 등 모든 것을 감안하면 처형된 사람들의 수가 200만 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어림한다. 인구 1,000명 당 3.6명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 과연 인민의 해방이었을까?
다수의 지지를 얻고 소수를 반대하여 모든 적을 각개 격파하라
마오쩌둥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했다. 표면적으로나마 자유와 평등, 평화, 정의,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가치들을 내세웠다. 농민에게는 땅을, 지식인에게는 자유를, 사업가에게는 사유 재산의 보호를, 노동자에게는 보다 높은 생활 수준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후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실질적인 농노제에 종속되었고 공무원들은 쓰임이 다하는 순간 버림받았다. 재계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츠러들었고, 이윤과 회사를 국가에 복속시켰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로 인해 실업률이 급상승했다. 지식인들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디쾨터가 중국 공산주의의 역사를 약속과 약속의 파기로 점철된 역사라고 정리하는 이유다.
그래도 인민들은 웃었다. 중국은 일종의 거대한 극장이었다. 심지어 무대 밖에서도 억지 미소를 지었다. 농부들은 곡식을 더 많이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조차 팡파르를 울리며 열정적으로 웃어야 했다. 상점 주인들은 재산을 국가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환한 얼굴로 자발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무엇보다 괜히 꾸물거렸다가 비난을 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생계를 국가에 의존했다. 그리고 해방 이래로 무수히 많은 시간의 학습 모임을 통해 당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올바른 대답을 내놓고, 동조하는 척하는 방법을 배운 터였다. 인민들은 그들이 처음에 약속받은 대로 영웅이 될 수는 없었지만 상당수 훌륭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억눌린 울분을 참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공산 진영에 비스탈린화 움직임이 일었다. 마오쩌둥은 인류의 4분의 1을 공산주의 반열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야 했다. 그의 선택은 당파를 인정하고 지식인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민영 기업의 집산화로 인한 노동자들의 합작사 탈퇴가 잇따르던 상황이었다. 적절한 대우가 부족하다고 여긴 제대 군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공산당 관리들의 태도에서도 변화가 목격되고 있었다. <백화 제방> 운동을 통해 과거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심으로 보다 인간적인 형태의 사회주의를 제안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나은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주변의 다수를 규합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던 때였다. 정부의 거짓말과 약속 불이행, 사상 개조에 수반된 가혹한 억압에 대해 지식인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혁명의 적, 정권을 전복하려는 반동분자들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도록 한 교묘한 전략이 되었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라는 당의 요구에 순진하게 응한 것일 뿐이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반우파 투쟁의 중심에 내던진 꼴이 되었다. 또다시 할당량이 내려왔고, 애매하고 막연한 기준에 의해 50만이 넘는 사람들이 우경 세력으로 내몰렸다. 평생을 당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제 마오쩌둥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의 중국은 풍랑 속의 배와 같았다. 배를 침몰시키지 않고 지켜 낸 마오쩌둥은 인민의 영웅이 되었다. 거대한 대륙 국가를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했고, 한국 전쟁을 통해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성전을 지휘했다. 마오쩌둥은 <해방> 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 진영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섰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노동 운동가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이 어느 농민의 분노를 통해 품게 된 사명감이었다. 최초의 그 사명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농민과 노동자를 위했던 이념적 순수성은 어떻게 왜곡되었을까?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을 초래한 것은 무엇이었을가? <인민 3부작>은 이러한 질문들을 안고 떠나는 기나긴 역사적 여정이다. 후속 출간될 <마오의 대기근>과 <문화 대혁명>은 21세기 현재의 중국인들이 겪었고 이겨내야만 했던 가장 슬프고 참혹한 역사를 이야기할 것이다. 디쾨터는 이 책 <해방의 비극>을 통해 중국 혁명 이후 초기 10년에 주목함으로써 현대 중국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여정을 시작한다. 그 현장 속으로 계속 들어가 보자.
목차
머리말
연대표
지도
1부 정복(1945~1949)
1장 포위
2장 전쟁
2부 장악(1949~1952)
3장 해방
4장 폭풍우
5장 대공포 시대
6장 죽의 장막
7장 또 다른 전쟁
3부 통제(1952~1956)
8장 숙청
9장 사상 개조
10장 농노제로 가는 길
11장 고조
12장 노동 수용소
4부 반발(1956~1957)
13장 사회주의의 그늘
14장 독초
주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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