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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독재자가 되는 법: 히틀러부터 김일성까지, 20세기의 개인숭배

대등서명
How to be dictator
발행사항
서울: 열린책들, 2021
형태사항
487 p. : 22 cm
ISBN
9788932920894
청구기호
341.7 D554h
서지주기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8706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8706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독재에도 연출이 필요하다!
2019년 『뉴 스테이츠먼』 올해의 책
2019년 『이브닝 스탠더드』 휴가철에 들고 가야 할 책
오싹하고 영리한 독재의 기술


중국 현대사의 권위자이자 새뮤얼 존슨상 수상자 프랑크 디쾨터가 20세기 대표적인 독재자들의 흥망성쇠를 개인숭배의 관점에서 조명했다. 디쾨터에 따르면, 어떤 독재자도 공포와 폭력만으로 통치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권좌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독재에도 기술과 연출이 필요하다. 국민으로 하여금 숭배를 이끌어 낸 독재자들, 곧 전제 정치가 합의된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던 영리한 독재자들은 효과적으로 정적(政敵)을 약화시키고 장기 집권의 길을 닦을 수 있었다.
『독재자가 되는 법』에서 프랑크 디쾨터는 20세기 들어 오싹할 정도로 효과적인 개인숭배를 강요한 8인을 돌아본다. 세심하게 연출된 행진, 치밀하게 구축한 신비주의 장막, 지도자를 찬양하는 노래와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이들 독재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안간힘을 썼고 전 국민이 자신을 찬미하도록 부추겼다. 히틀러는 신비주의적인 유사 종교에 기초한 유대를 강조하면서 자신을 대중과 하나로 연결된 메시아처럼 포장했고, 아이티의 독재자 뒤발리에는 부두교 사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자신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졌다는 소문을 부추겼다. 디쾨터는 개인숭배가 독재 정치의 부수물이 아니라, 독재 정치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라고 강조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 중 누군가는 그들과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개인숭배가 총보다 탁월한 이유

디쾨터에 따르면, 독재자는 원래 나약한 존재였다. 애초부터 대중의 지지가 있었다면, 굳이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취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짜 두려워한 것은 국민들이 아니라, 언제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정적이었다. 실제로 무솔리니는 여러 파시스트 지도자 중 확실하게 자리 잡은 한 명의 지도자에 불과했고(1922년에는 군 지도부 내에서 반란에 직면했다), 스탈린은 레닌 사망 2년 전에 운 좋게 서기장에 올랐지만, 당의 실권자 트로츠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1945년 당시 서른세 살의 김일성은 소련이 내세운 지도자였고, 그는 지하 운동에서 자신보다 훨씬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겨우 잡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독재자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 <교묘한 속임수>, <각개 격파>로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지만, 결국에는 개인숭배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숭배는 측근과 반대파 모두를 똑같이 약화시켰다. 개인숭배의 목적은 설득이 아니었다. 혼란을 주고, 상식을 파괴하고, 개인을 고립시키고,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기 위함이었다. 특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독재자를 칭송하게 강요함으로써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모두가 거짓을 말하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모자를 찾아서 쿠데타를 일으키기가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개인숭배의 성공 공식

개인숭배는 대개 비슷한 경로를 따른다. 첫째, 독재자는 권력을 얻은 뒤 언론을 장악했다. 로마 진군 직후 무솔리니는 최우선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신문사들의 인쇄기부터 파괴했다. 그는 호의적인 언론에게는 자금을 대주고, 검열과 보도 통제를 강화해서 반정부적인 언론을 무력화했다. 이 과정은 히틀러나 다른 공산권 전체주의 국가도 비슷하게 진행됐다. 정권의 나팔수가 된 언론은 영웅의 등장을 알리고, 미화하고, 점점 뻔뻔한 찬양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둘째,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영웅 신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를테면, 하인리히 호프만은 히틀러의 출소(비어홀 폭동 사건으로 복역했다)부터 그의 전속 사진사 역할을 부여받는데, 그는 1932년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의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을 출간했고, 총통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 그해 나치당은 37.3퍼센트의 득표율로 1932년 7월에 가장 유력한 정당이 되었다. 한편 북한의 시인 조기천은 1947년에 『백두산』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발표했는데, 김일성의 운명을 바꾼 보천보 전적지(백두산에서 불과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가 백두산의 혁명가의 땅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얻었다. 시인은 이곳을 <전사들이 자신들의 땅을 해방시킬 날을 기다리며 잠을 자고 있다거나 혁명 지도자들이 단번에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뛰어다닌다>는 등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넘쳐나는 신비로운 장소로 묘사했다.
셋째, 더 확실한 방법은 외국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저명한 외국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하거나, 유력 인사들과의 만남을 기획한다. 스탈린이 대표적이다. 다른 독재자들에 비해 은둔형에 가까웠던 그는 1930년 미국의 합동 통신사 특파원 유진 라이온스를 초대해 집무실에서 만났다. 스탈린은 수줍은 미소로 기자를 무장 해제시켰다. 그렇게 스탈린 본인의 감수까지 거친 라이온스의 글 「스탈린 웃다!」는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1년 뒤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버나드 쇼가 잘 훈련된 소련 농민들과 함께 모범학교와 농장을 방문 한 뒤, 스탈린을 <유머가 넘치는 사람>, <어떠한 악의도 없는> 사람으로 공표했다.
마오쩌둥도 비슷했다. 대장정 뒤 옌안에 둥지를 튼 마오쩌둥은 이상주의적인 기자 에드거 스노를 초대해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혁명가로서의 이력까지 각색된 삶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출간된 『중국의 붉은 별』(1937)은 마오쩌둥을 <완성된 한문학자이며 독서광인 동시에 천재에 가까운 군사적, 정치적 전략가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마오쩌둥을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크는 국제 사회의 인정을 정권의 정당성으로 활용했다. 그는 1977년까지 약 쉰 개에 달하는 국제 훈장을 수집했고, 백악관에 초대받아 카터 대통령과 만찬도 즐겼다. 절정은 1978년 버킹엄 궁전 방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왕실 마차에 올라 환호하는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고, 궁전에서의 모든 공식 행사가 텔레비전을 통해 루마니아에 24시간 방송되었다.

개인숭배의 절정

개인숭배가 절정에 달하면 이제 나라는 온통 독재자의 이미지로 채워진다. 문화 대혁명 당시 중국은 천지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표어와 목소리로 진동했다. <빈 벽은 모두 세심하게 인용된 마오쩌둥의 어록이나 그에 대한 헌사>로 채워졌고, <우리의 위대한 스승,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사령관, 위대한 조타수>와 <마오 주석 만세!>와 같은 표어들이 상점, 공장, 학교에 도배되었다. 어디를 가도 주석을 찬양하는 목소리였다. 홍위병들이 파출소 안에서 주석의 어록을 읽으면 파출소와 연결된 확성기를 통해 거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혁명 청년들은 떼 지어 도시를 행진하면서 주석의 사상을 찬양하며 혁명가를 불렀다. 심지어 국내선 여객기의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주기적으로 주석의 어록을 읽어 주었다. 개인숭배의 절정기에 북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주석이 한 말은 모든 신문에서 다루어졌다. 토목 공학부터 분자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출판물은 의무적으로 그의 치적을 언급해야 했다. 그의 연설은 편집을 거쳐 김일성 전집으로 출간되었고, 전국의 사무실과 교실에서는 그의 자애로운 시선 아래 인민들이 그의 어록을 공부했다.
아이티의 독재자 뒤발리에도 종신 대통령에 오르면서 개인숭배를 본격화했다. 혁명 10주년 기념일에 맞춰 대규모 행사를 기획했고, 대통령 얼굴을 새긴 각기 다른 액면가의 금화 4종이 주조되었다. 가두 행진도 벌였고, 그의 이름을 딴 온갖 시설들이 생겨났다. <프랑수아 뒤발리에 다리>가 생겼고, <프랑수아 뒤발리에 도서관>, <프랑수아 뒤발리에 국제공항 터미널>이 문을 열었다.
한편 1929년 무솔리니의 개인숭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초상화와 메달은 물론 동판화와 심지어 비누에도 그가 있었다. 프랑스 기자 앙리 베로는 이렇게 논평했다. <어디를 보고 어디를 가든지 당신은 계속해서 무솔리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솔리니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마치 신과 같다. 그는 사방에서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도 도처에서 그를 발견한다.>

독재자의 퇴장

개인숭배가 독재자의 수명을 잠시 연장해 줬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들의 몰락은 예고되어 있었다. 독재자들은 추종자가 만들어 낸 환상을 굳게 믿으면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나라의 대소사가 거의 그들의 판단에 좌우되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계산 착오도 치명적이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했고, 군사 전문가를 무시하고 직접 작전을 주도하다 패전을 불렀다.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공산권 지도자들도 농촌 집산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수많은 민중을 기아와 빈곤에 빠뜨렸다.
그러나 독재자의 몰락이 곧바로 개인숭배의 끝은 아니었다. 개인숭배는 독재자의 공연일 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쇼이기도 했다. 독재자의 몰락이 확실시된 나라, 반대파 세력이 정권을 잡은 나라의 민중들은 곧바로 연기를 멈추고 그들을 기억에서 삭제해 버렸다. 1945년 반파시스트 유격대원들에게 체포된 무솔리니는 곧바로 처형되었고, 이후 수개월 동안 이탈리아 국민들은 전국의 건물과 산에서 지난 독재의 상징물을 도려내고, 동상을 박살냈다.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는 생방송으로 열린 집회 연설 도중 한 번의 야유와 함께 순식간에 몰락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정부 건물을 공격하고 차우셰스쿠의 공식 초상화를 찢고 그의 선전용 책들을 불태웠다. 수십 년간 모든 소련 언론의 숭배 대상이었던 스탈린도 초라하게 퇴장했다. <그의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나자 신문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당 지도부를 공범으로 만든 마오쩌둥이나, 후계 세습을 완성한 김일성의 경우에는 달랐다. 아직 개인숭배 쇼의 2부와 3부가 준비된 나라에서는 민중들이 다음 쇼를 위해 새롭게 연기를 펼쳐야 했다. 마오쩌둥 사망 직후, 한 여성의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를 초대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있던 유일한 포도주를 개봉했다>고 회상했다. 전날까지 행복해했던 아버지와 친구는 이튿날 <공공 추도식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슬프게 통곡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진 만수대로 모여든 북한 주민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각자의 비통함을 쏟아 냈다. 자신의 머리를 때리거나, 졸도하듯이 쓰러지거나, 입고 있는 옷을 찢거나,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상심한 국민들의 모습을 끝없이 내보낸 텔레비전 방송도 그들을 더욱 부추겼다. <비행기 조종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조종사들이 방송을 탔고 돛대에 자신의 머리를 찧는 선원들도 전파를 탔다.> 비밀경찰은 주민들을 감시했고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관찰하면서 그들의 진정성을 판단하려 했다.

주요 수상 목록

2019년 『뉴 스테이츠먼』 올해의 책
2019년 『이브닝 스탠더드』 휴가철에 들고 가야 할 책
목차

서문

1 무솔리니
2 히틀러
3 스탈린
4 마오쩌둥
5 김일성
6 뒤발리에
7 차우셰스쿠
8 멩기스투

후기

선별된 참고문헌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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