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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복무하다: 리영희 평전

개인저자
권태선 지음
발행사항
서울 : 창비, 2020
형태사항
476 p. : 삽화 ; 24 cm
ISBN
9788936478315
청구기호
340.99 권832ㅈ
서지주기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8550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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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8550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진실이야”
자신의 앎을 삶 속에서 실천해낸 인간 리영희를 만난다


‘사상의 은사’로 불리며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히는 고 리영희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을 조명한 『진실에 복무하다: 리영희 평전』이 출간되었다. 한겨레신문 편집인을 역임한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고인의 일생과 작업, 관계자들의 증언을 폭넓고 충실하게 탐구한 결실을 이 책에 담았다. 여러차례 구속과 해직, 연행을 당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눈을 가리는 거짓의 빗장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써내려간 리영희 선생의 지적‧실천적 여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안긴 선생의 주요 작업뿐 아니라 인간적인 일화와 개인적 성정에 대한 평가도 다각도로 조명해 더욱 온전한 ‘평전’이 되고자 했다. 가짜뉴스가 득세하고 언론의 신뢰도가 최악으로 추락한 요즈음, 실천하는 언론인이자 진실을 추구한 경계인이었던 리영희의 삶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의 살아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변방의 경계인, 세상에 눈을 뜨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담금질한 한국전쟁


리영희가 평생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진실에 복무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로 저자는 ‘변방’에 대한 의식을 꼽는다. 한반도 최북단 변방인 평안북도 운산에서 출생하고 삭주에서 성장한 리영희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학업을 위해 상경한 뒤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진학한 공업고등학교와,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장학금을 따라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해양대학 졸업이 정규학위의 전부인 학력도 기자와 학자로 활동한 그에게는 내세울 만한 경력은 아니었다. 그후의 삶 역시 글로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언론사에서도 비주류에 속했고, 가난한 생활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이 오히려 리영희로 하여금 권력의 시혜를 바라는 기회주의자로 살지 않고 시대를 깨우는 언론인이자 작가의 본분에 충실한 길을 걷게 했다.
한국전쟁과 군복무 경험은 리영희가 세상에 눈을 뜨고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아가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 전쟁통에 의도치 않게 입대하게 된 그는 대학 시절 충실하게 공부한 영어 덕분에 통역장교로 근무하며 한국군과 미군을 동시에 경험했다. 전쟁 과정에서 양민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만행과 한국군의 무능과 부패를 절실히 경험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을 구하러 왔다는 미군이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행태를 보이는 모습 또한 목격했다.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 이후 주로 외신 보도와 국제 문제를 다루며 이름을 알린 그의 시야가 바로 이 시절의 경험을 통해 확대되었다. 저자는 이때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이후 기자로서 또는 학자로서 베트남전쟁이나 한미관계·남북관계를 제도 안의 학자들과 다르게 살펴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공부하는 기자 리영희,
‘벌거벗은 임금님’을 폭로하다


군생활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결정한 합동통신 입사지만, 리영희는 통역장교를 거치며 더욱 향상된 영어 실력 덕에 뛰어난 외신기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외신기자는 국내 언론사에서 주류는 아니었지만 당시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하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언론 환경에서 그나마 진실을 추구하기 좋은 위치였다. 또한 리영희가 『뉴욕타임즈』 등 해외 주요 매체에 기고함으로써 4‧19혁명 등 국내 소식을 해외에 알리게 된 것도 외신과 국제 문제를 다룬 덕에 가능했다. 바야흐로 ‘외신기자 리영희’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리영희는 해외 기사를 적당히 추려 내보내지 않고 추가적인 자료 조사와 취재를 통해 국제 문제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고 했다. 박정희의 미국 순방에 동행해 현지 조사를 통해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미국이 냉담한 입장임을 특종으로 알려 큰 파장을 부른 보도나 박정희 군부의 민정이양에 대한 미국 입장, 한일청구권 협상의 내막을 알린 기사들이 그 사례다. 이 보도들은 모두 ‘특종’으로 크게 주목받았고, 리영희는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거치며 대표적인 외신 기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권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발탁돼 자리를 옮긴 뒤 얼마 안 되어 겪은 첫 필화 사건은 긴 고난의 시작이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라는 기사의 제목이 북한을 인정한 것이라는 중앙정보부의 자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판단으로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 징역을 면했지만 4년 후 정권의 압력을 받은 언론사에 의해 해직되었다. 궁여지책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가던 중 다시 합동통신의 호출로 외신부장 자리를 잡았지만 1971년 다시 해직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과 유신으로 이어지는 독재 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는데, 리영희는 이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던 탓이다. 뒤에 교수직에서 한차례 해직된 것을 추가하면 리영희는 총 3번의 해직과 5번의 구속을 겪었다.
계속되는 협박, 압력, 회유와 결과적인 처벌에도 불구하고 리영희가 여전히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으로 남은 이유에 대해 저자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들어 설명한다. 리영희는 스스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이 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나 볼 수 있거나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말하지 않고 제대로 보려 하지 않기에 자신이 이야기 속 ‘소년’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는 언론의 기회주의적이고 자발적인 굴종의 행태에 큰 절망감을 드러냈다. 언론이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미래를 바라보는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건전한 주관’이 담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지 않는 한국 언론은 ‘조건반사적 토끼’라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거짓의 우상을 파괴하라
금기에 도전하는 지식인의 실천


베트남전쟁과 중국 문화대혁명은 리영희가 외신기자와 학자로서 한국사회 담론의 중심에 서게 된 두가지 주제다. 특히 냉전시대 반공 이데올로기의 시각에서 베트남전쟁은 자유 진영의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투쟁이자 침공만 받던 우리 민족이 드디어 해외로 뻗어나가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리영희는 베트남의 역사와 이 전쟁의 성격을 철저히 공부하면서 베트남 민중의 시각에서 미국과 남베트남의 전쟁은 정당하지 않으므로 패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한국군 파병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자고 제안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역시 혁명을 빙자한 모택동의 폭력적인 권력투쟁쯤으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였지만, 리영희는 정신문화 위주의 동양 전통에 걸맞은 사회주의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1970년대 들어서 미국과 중국이 화해 무드를 연출하고 일본 역시 중국과 수교하는 등 전세계적인 해빙 분위기에도 당시 국내에서 베트남과 중국 문제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언론은 물론, 언론사 해직 이후 몸담은 학계에서도 드물었기에 그런 주장을 담은 그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격렬한 반응을 불러왔다. 주로 젊은 학생‧청년 세대에게는 반공주의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일깨워준 ‘사상의 은사’라는 찬사가, 정권과 주류 반공 진영에서는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경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듬해 편집하고 집필한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이 출간되자 공안당국은 리영희를 그냥 두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구명운동이 이어졌지만 결국 반공법 위반으로 2년여의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이 사건의 2심 판결을 받고 작성한 「상고이유서」는 반공주의에 맞서는 리영희 자신의 신념을 응축한 글로 평가받는다.
리영희의 시선은 세계와 한반도 주변을 거쳐 분단의 문제로 이어진다. 1980년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미국은 다시 냉전적인 대결구도를 강화하고 있었고, 일본도 여기에 동조하는 상황에서 한미일 군사동맹과 공동 방위체제는 한반도에 인접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긴장 고조를 의미했다. 특히 일본은 냉전체제 강화를 통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다시금 명실상부 군사적 행동력을 갖춘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우경화하는 중이었다. 한편으로 공산권은 자본주의적 경제 노선을 내세우거나(중국)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었다(소련). 그럼에도 당사자인 한국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미국의 시각에서만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남한뿐 아니라 북한의 실상도 연구하는 동시에 동맹국들의 행동도 비판적으로 다루어야 했다. 베트남이나 중국을 연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금기’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남북한 군사능력 비교나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문제, 북방한계선 문제를 연구하고 발언하면서 역시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막 창간한 한겨레신문에 참여해 냉전 해체 분위기에 발맞춰 방북취재를 기획했다가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성찰의 자리에서
‘탈진실의 시대’야말로 진실이 필요한 시간


마지막 구속 이후로 환갑을 맞은 리영희의 이후 삶을 저자는 ‘성찰의 시대’라고 부른다. 길고 치열했던 실천의 시대 뒤에 그도 나이를 먹고 우리 사회도 어느정도 민주화되었지만, 무엇보다 그가 다른 시선으로 보고자 했던 사회주의권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한때 철저한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던 그는 점차 협소한 민족주의를 넘어 개인과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현 단계에서는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기존에 발언한 사회주의권 평가에 대해선 긴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감상적으로 접근했고 후학들이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해 일정하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 책은 리영희의 여성관이나 가부장적인 인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고인에 대한 평가에 의미있는 기준을 추가한다. 저자는 고인의 저술과 가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리영희를 곳곳에서 발견한다. 또한 한계가 있었지만 반려자와 가족의 희생과 성차별의 문제점을 서서히 인식하고 발전해가는 그의 모습에서 마지막까지 성찰하는 인간 리영희를 만난다.
성찰의 시대에도 그의 사회적 실천은 계속되었다. 북한 핵무기 개발 위기를 맞아 한반도 비핵화지대를 제안했고, 햇볕정책에 힘입어 북한에 방문해 교류하면서도 북한 체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지팡이를 짚고 이라크전쟁 반대 시위에 앞장섰고,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더이상 불가능할 때까지 집필 활동도 이어나갔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나 애국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이야”라고 한 인터뷰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당대의 문제를 진실하게 밝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행동하리라는 신념이 평생 그를 구속한 유일한 가치였다. 그가 권력이나 자리, 안온한 생활이라는 정박지에 닻을 내리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진실과 성찰을 향한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이지만, 역설적으로 진실을 찾는 갈급함은 더하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최근 공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40개국 중 최하위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4년 연속 최하위다. 여기엔 우리 언론이 여러 문제로 신뢰를 주지 못한 탓이 크겠지만, 한편으론 우리 사회가 그만큼 진실을 더 많이 요청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언론의,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 리영희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그 답은 리영희의 삶 속에 있다.

리영희(李泳禧)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외신부장,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역임했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을 연수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고, 같은 해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복직되었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 강좌를 맡아 강의했다. 1995년 한양대 교수직 정년퇴임 후 1999년까지 같은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로 재임했다. 2010년 12월 5일 지병 악화로 타계했다.
글쓰기와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상과 언론 자유 확대에 크게 기여하고 비판적 지식인 운동의 상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언론자유상, 단재상, 늦봄통일상, 만해상, 기자의 혼 상, 심산상, 한겨레통일문화상, 후광 김대중 학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지은 책으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전쟁』 『역설의 변증』 『역정』 『自由人, 자유인』 『인간만사 새옹지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반세기의 신화』 『대화』 등이, 옮기고 엮은 책으로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 『10억인의 나라』 등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벌거벗은 임금님’을 폭로한 소년

제1장 수업시대
평등과 민족을 일깨운 변방 / 해방정국의 생존수업 / 역사 현장 수업

제2장 연마시대: 비판적 지식인으로 담금질한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격랑 속으로 / 한국군의 민낯을 보다 / 전방의 인간수업 / 모든 것을 회의하고 의심하다

제3장 실천시대I: 진실에 복무한 기자
외신기자로 첫발을 내딛다 / 현장에서 미국을 배우다 / 4·19 현장에서 / 5·16쿠데타: 비판과 지지 사이에서 / 박정희와의 악연 / 연구로 특종 낚다 / 첫 필화, 첫 구속: 조선일보 시절 / 베트남과 중국을 만나다 / 동백림 사건을 촉발한 이기양의 월북 / 정명(正名)을 일깨운 푸에블로호 사건 / 조선일보 해직 / 합동통신 복귀 / 합동통신 해직

제4장 실천시대II: ‘사상의 은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
대학 강단에서 맞은 10월유신 / 백주의 암흑에 도전한 『전환시대의 논리』 / 민주화운동 속으로 / ‘이성’을 가둔 ‘우상’ / 인식정지증을 기소한 「상고이유서」 / 감옥, 또 하나의 수업의 장 / 유신체제의 종말과 석방

제5장 실천시대III: 한반도 문제로 눈 돌리다
‘서울의 봄’과 3차 투옥 / 운동권의 ‘생각의 스승’ / 중국 연구를 접다 / 네번째 구속과 대학 복직 / 본격화한 한반도 연구 / 새로운 대안, 사회민주주의 / 다시 베트남전을 묻다 / 전두환 정권의 종말과 세계사의 격변 / 버클리대학에서 한국 민중투쟁사 강의 / 한겨레신문 창간 / 광주학살, 미국의 책임을 묻다 /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 / 다섯번째 구속: 한겨레 방북취재 사건

제6장 성찰의 시대
조광조의 길에서 퇴계의 길로 /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 / 북한 핵위기에 맞서 / ‘제2의 인생’ 아닌 ‘제1.5의 인생’ / 첫 북한 방문과 북한에 대한 비판 / ‘북방한계선, 알고나 주장하자’ / 체제수렴 과정으로서의 통일 / 지팡이를 짚고 반전운동 전면에 / 조선인 유골 송환운동에 힘 보태다 / 마지막까지 분투한 지성인

에필로그: 아직 잠들 수 없는 리영희
주 / 리영희 연보 / 참고문헌 /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