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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만연한 부패와 포퓰리즘 정서로 비틀대는 21세기 대한민국!
구조적으로 임박한 해체와 붕괴의 징후들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의 위선과 허세에 “노!”를 외치는 조우석의 한국사회 대해부!
1. 대한민국 보수가 『나는 보수다』를 읽어야 하는 까닭
: 대한민국 건국 63주년, ‘동의 없는 지배’와 결별할 담대한 기획은 과연 있는가?
반反기업 심리와 부富에 대한 적대감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증폭되고 있지만, 한 번 램프 밖으로 튀어나온 지니(램프를 가진 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를 안에 도로 집어넣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걱정스러운 보수세력의 대응도 어설프고 비이성적이다. 중립적 입장의 지식인 역시 못내 안타깝다. 그들은 “삶의 조건과 방향을 설정해주는 민주공화국의 핵심 이상과 가치는 내면에서 파괴됐다. 이게 우리가 헌신해야 할 민주공화국과 인간공동체의 참 모습이란 말인가?”고 지적하지만, 여기에도 무언가 분노의 기미가 있고, 누굴 향해 삿대질하려는 심리가 없지 않다. …
… 실로 만만치 않은데, 그렇다면 이 기회에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 단순한 사회적 기부와 선행을 통해 ‘착한 기업 만들기’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 어떻게 기업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구축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란 안토니오 그람시가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놀라운 성공을 관찰하면서 했던 말인데,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은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반복되는 항구적 위기도 마찬가지로 넘지 못한다.
당장의 문제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이런 ‘인식의 내전’이 삼성 문제에서 다시 부딪친다는 데 있다. 그들이 가장 성공했고, 가장 앞서있기 때문에 더욱 질시와 견제의 대상으로 부각된 셈이다. 그 점에서 삼성 문제는 항상 덧나는 상처이자, 2000년대 초입 한국사회를 볼 수 있는 압축파일인 셈이다. 그들을 비판할 필요도 못 느끼지만, 굳이 두둔할 생각도 없다. 한때 미국에서 통했던 말대로, 왜 우리는 “GM에 좋은 것은 사회에도 좋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을까를 염두에 두고 삼성 문제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나는 보수다』, 10쪽, 196쪽에서
1987년 이후 지난 20여년 가까이, 한국사회에서 가랑비에 옷젖듯 퍼진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적정선을 넘어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인 이같은 흐름에 대한 전략적이고 기술적인 해법은 과연 마련되고 있는가? 이같은 흐름의 확산을 경계하고 막겠다는 이유를 앞세우고는 있지만, 삼성그룹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이른바 주류세력은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비판이나 성토에 대해서도 초보적 방어마저 서툴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저자는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적·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했던 구미권 국가들과 달리 불과 50년도 안 되는 시기에 근대적 산업화에 성공했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먼저 짚자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성장한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신뢰가 크게 높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의 축적과 사회적 기여라는 논의의 첫 장을 겨우 연” 것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그 해법이다. 저자는 한국의 큰 그림을 그리던 대기획자의 실종 문제를 제기한다. 거대자본과 재벌을 통제하며 미래를 짚어내는 정부, 상식을 뛰어넘은 투자를 통해 산업고도화를 이룩해냈던 통 큰 정부는 과연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는 벤처정신을 발휘했던 전략적 투자가의 위치에서 기껏 유한책임만을 지고 빠지는 재무적 투자가의 수준으로 행동반경을 스스로 위축시킨 지 오래다. 마르크시즘 등 평등주의 이념의 소리없는 확산·득세도 결국 이같은 역할의 커다란 공백으로 빚어진 결과다. 한국사회가 지식인사회 특유의 ‘리버럴 강박증’과 근본주의적 사고,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이념적 내출혈 등에 시달리게 된 것 역시 이런 공백을 메울 지적·문화적 헤게모니가 마련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호의 해체 징후와도 맞물린 이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처방은 그럼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편견과 독단을 앞세운 태도를 넘어 실사구시의 태도로 과거를 점검하고, 둘째, 희생양 찾기 게임으로부터 탈피하며, 셋째, 경제민주화 움직임이 자기파괴적인 평등주의의 늪이 되어 지난 세기 성취의 기초마저 허물지 않게 하는 일이다. “과연 기업은 민주주의 원리로 움직이는 조직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저자는 민주주의를 기업경영 원리로 대입하는 태도를 차제에 접자고 제안한다. 포퓰리즘적인 평등주의의 늪에 자꾸만 빠져드는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경제민주화를 등한시한 결과라기보다는 경제력 집중에서 오는 특유의 에너지를 글로벌 스탠다드란 이름 아래 내다버린 결과임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주목해야 ‘아비 없는 사회’에 기대 성장했던 보수독과점 편향으로부터도, 이에 대한 성마른 반편향으로 대한민국의 기초 자체를 허물고 있는 자해적인 리버럴독과점 상태로부터도 벗어나, 담대한 재도약에 필요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길을 트기 위한 지적·문화적 헤게모니 프로젝트에 우리가 나서지 않는 한, 문민정부 시절을 포함해 지난 민주정부 시절을 거치며 확산돼온 좌파정서, 달리 말해 분노 어린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도약에 필요한 사회적 동력으로 바꾸어낼 길은 없다.
저자가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21세기 초입 들어 ‘오래된 미래’의 귀환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크게 바뀌고 있는 한반도 지정학에 적극적으로 적응해야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친미연중, 혹은 친중연미의 능소능대한 적응과 활용, 전략적 마인드를 통한 새로운 한반도 지정학의 구축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란 질문 앞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한반도선진화 전략이나 로드맵, 혹은 진보세력의 재집권 프로젝트 등”은 “눈먼 구상에 그치거나, 거대변수를 놓친 작은 그림에 불과하다.” 여기서 분명한 건 한국사회에 고질적인 근본주의 사고를 낳으며 “조선의 대표 사대부 송시열이 우리 몸에 심어준 명분 지상주의 DNA, 소학동자 조광조가 뿌리내려준 도덕 제일주의 DNA는 장애가 될 뿐”(353쪽)이라는 점이다.
2. 대한민국 리버럴과 진보가 『나는 보수다』를 읽어야 하는 까닭
: 위선과 허세 속에서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놀라운 성취를 백안시하는 역사 허무주의로 담대한 통합과 치유의 실마리가 과연 생길 수 있을까?
… 문명사가들의 통찰을 따로 빌릴 것 없이 상식과 균형감각에 비춰보더라도, 2010년대 초입의 대한민국은 붕괴된 문명들이 보여줬던 몰락의 두 징후인 정체상태와 역류 현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정치와 경제는 정체 상태에 진입한 게 분명하며, 반복되는 다양한 위기 징후를 보면 역류 현상에 이미 발을 내딛었다는 판단이 들 정도다.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 역사 허무주의, 부에 대한 소모적 적대감, 과도한 이념분쟁, 이걸 키우는 큰 자궁으로서의 외곬과 자폐의 슈퍼밈, ‘우리 안의 근본주의 DNA’….
이걸 이제 다섯 가지 한국병이라고 부르자. 정확히 보고 합당한 처방을 해야 옳다. 문제는 치유다. 한국인의 체질로 굳어진 슈퍼밈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중세 이후 형성되고 현대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채 장기지속을 거듭하고 있는 그 한국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해방 이후 반공국가 건설, 경제발전, 민주화의 압축 달성 속에서 놓쳐온 우리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공적 시민의 덕성을 우리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얼굴을 차근히 되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인을 구성하는 슈퍼밈의 실체를 하나씩 확인하고, 손을 보는 작업 말이다.
-『나는 보수다』, 29쪽 중에서
저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고질병은 5가지다. 1) 진보에 대한 무턱댄 선호를 조장하는 ‘리버럴 강박증’, 2) 20세기 통틀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기적으로 평가받는 ‘신데렐라 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성공을 부정하는 자기모멸의 역사 허무주의, 3) 사회적 부패와 병폐를 넘어서 대한민국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 기반 자체를 허물고자 하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4) 담대한 타협의 여지를 아예 가로막으며 지적·문화적 내전까지 빚어내기에 이른 과도한 이념분쟁, 5) 앞서 말한 진보진영의 고질병들 이면에 장기지속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슈퍼밈’, 근본주의 DNA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부터 주요 이슈로 부상한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론. 이에 대해 저자가 내린 진단은 그간 이뤄져왔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에게, 어느 때부터인가 느닷없이 등장한 지식인사회의 위기 혹은 붕괴 징후는 ‘지식인은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리버럴 강박증’의 산물이다. 바로 이 강박증 탓에 급변하는 내외적인 현실, 그리고 시효를 상실한 옛 주의와 이상 양자를 분간 못하는 ‘인식적 지체’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불거지는 비판적 지식인 특유의 허위의식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7세기 이후부터 완고하게 장기지속해온 슈퍼밈, 즉 근본주의 DNA 탓에 그 정도는 자기파괴적이라 할 만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바람에 중상주의 노선의 막차를 타고 이 막차의 기관사이자 “대기획자” 노릇을 했던 이른바 개발연대의 테크노크라트들 또한 당대를 이끈 지식인 범주로는 이해되지 못한 채 종속매판 세력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폄훼에 시달리는 오류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맹목 속에서 진보·리버럴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20세기 현대사에 대해 거꾸로 그것이 마치 파행과 불의 일변도의 역사였던 양 공공연히 외눈박이 행세를 하며 ‘아카데믹한 거짓말’들의 목록과 조합을 차츰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무너지고 빈약해진 공적 권위와 공동체적 결속력과 신뢰는 반문화·무교양주의가 대중사회의 문화적 빈곤과 지적 공허, 끝없는 반목의 악순환만 부르는 ‘르상띠망’을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는 외곬스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대중화되고, 백범 김구 같이 한반도 지정학에 어두웠던 패배한 정치인이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하는 인물로 오래도록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균형잡힌 역사상의 부재와 빈곤을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이같은 난맥상이 비록 큰 그림 없이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의 부작용이라고는 해도,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통합의 틀은 아랑곳 않은 채로 한국 현대사가 암흑과 파행으로 점철된 양 주장해온 진보·리버럴 지식인들의 무책임 내지 직무유기는 실로 우려할 만한 지경이다.
특히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던 지난 10여년 간 진보·리버럴 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곳곳에 자리잡으며 대한민국 공동체에 대한 무턱댄 회의를 부추겨온 ‘좌파정서’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이상증폭해 가는 중이다. 이런 분위기는 새 세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대한민국 공동체의 기초 자체를 사실상 불모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져온 작금의 앙앙불락은 그래서 같이 살자는 요청이 아니라 실현불가능한 진보의 신기루를 내걸고서 “다함께 못 살자”고 외치는 대책없는 투정에 다름 아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역사의 헛바퀴에 갇힌 채 급진이념의 온상이 돼버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따지고 보면 그네들과 한국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진보진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성취를 재음미하고 삼성·LG·현대그룹과 같은 재벌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연착륙’ 전략을 아울러 모색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주주의도, 그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그 어떤 큰 그림도 사실상 나오기 불가능하다는 걸 진보진영은 과연 언제까지 애써 외면할 참인가? 19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를 휩쓴 이념 과잉의 해악과 자중지란을 넘어, 보수세력과 진보진영의 담대한 타협을 이끌어낼 ‘제3의 길’은 정녕 없는 걸까?
이같은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저자는 ‘성리학 신정국가’라 불려도 손색없을 조선조 때부터 장기지속해온 한국형 슈퍼밈의 정체를 처음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그 정체를 ‘근본주의 DNA’라고 명명하면서, 이 슈퍼밈의 장기지속이야말로 한국·한국인들이 외부 변화와 새로운 조류에 재빨리 적응하면서도 지독한 자폐적 속성을 버리지 못하게 제약해왔다고 말한다. 불교와 유교, 기독교부터 시작해 각종 급진적 사상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래 사상들이 맹신과 독선의 교조로 전락해버린 역사적인 경험치들 또한 이같은 슈퍼밈의 장지지속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간의 통념과 달리, 친일파로 비판받았던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야 하는 이유도 춘원의 문제의식 속에 저자가 말하는 근본주의 DNA의 장기지속 문제에 대한 고민의 일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질병과도 같이 고질화된 근본주의 습속에서 탈피해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가 책 곳곳에서 거듭 주장하는 까닭도 그래서다. 이 책 말미에 저자가 개혁과 이상의 이름으로 되려 광신주의의 생지옥을 연출하길 서슴지 않았던 ‘개혁주의 독재자’ 루터와 칼뱅에 의연히 맞서 싸우며 상대주의와 관용의 가치를 앞세웠던 에라스무스와 카스텔리오, 역시 프랑스혁명의 대의가 지닌 역설을 경계하며 ‘균형잡힌 인문주의’의 미덕을 살리고자 했던 알렉시스 토크빌과 에드먼드 버크에 관한 일화를 언급하는 것 역시 지금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변화와 전향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기 위함이다. 진보진영은 과연 이처럼 균형잡힌 인문주의의 가치를 되살릴 준비가 돼 있는가?
* * *
피겨선수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작품명 <오마주 투 코리아>를 언급하고 있다시피, 『나는 보수다』는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에 바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자타칭 보수와 진보가 애써 외면하거나 백안시했던 20세기 한국사의 곡절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는 열정적인 요청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다』는 한국사회에 구조적으로 임박해 있는 각종 해체와 붕괴 징후들 앞에서, 진보와 보수진영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뿌리내려 있는 암묵적 금기들을 깨고자 하는 지적 분투의 산물인 셈이다.
에드먼드 버크와 토크빌이 프랑스대혁명의 위험성을 경고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지만 반동적 왕정복고주의자라고 평가받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것처럼, 『나는 보수다』는 한반도와 대한민국을 둘러싼 세계와 역사를 더 크고 새롭게 바라보자는 겸허한 제안이자 본격적 논쟁에 대한 요청으로 읽힐 만하다. 지난 20세기 현대사에 대한 무턱댄 추종이나 섣부른 단절과 어떻게 철저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것인가. 『나는 보수다』는 이 질문을 통해 새로운 사회·정치·문화적 합의를 이뤄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3. 『나는 보수다』 저자와의 가상인터뷰: 내가 굳이 보수를 자처하는 이유
-책에선 이제는 터놓고 말할 때가 됐다고 하는데, 대체 무엇을 터놓고 말하고 싶다는 건가?
한국사회, 특히나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가히 허세를 방불케 할 정도다. 물론 그래야 했던 사회적·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마냥 이해하고만 있기에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 방향을 상실한 상태다. 가뜩이나 사회우울증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이 시점에서, 결코 강 건너 불구경 따위가 아니다. 이미 사회적 괴물로 거듭날 조짐을 보이는 좌파정서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되려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큰 그림’도 없이 출발했고, 이를 위한 사회적 동의 과정조차 생각됐거나 태부족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예삿일이 아니다. 묻지마 분노와 방향 없는 항변의 목소리들이 갈수록 거세질지 모르는데도, 이를 부추기거나 짐짓 외면하고 마는 그간의 상황에 단호히 “노!”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혹세무민의 피리소리들만 요란했지, 생산적 논의의 실마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과연 지난 세기 한국에서 일구어 낸 ‘대반전의 드라마’가 과연 장수할 수 있을까? 나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래서 이젠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냐, 아니면 보수냐’ 같은 질문은 제쳐두고서라도,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궁금하다. 이마저 편가르기에 길들여진 탓에 던지는 우문일까?
썩 내키진 않지만, 차라리 그런 질문이 필요하다. 구태의연한 도식으로 이런저런 딱지 붙이기나 하고 있는 것보단 말이다. 이제껏 얘길 했는데도, 내 정체가 아직도 파악 안 되나? 내가 선 자리는 명확하다. 진보가 낫네 보수가 좋네 하는 식의 이분법은 죽었고, 이 이분법에 갇혀 있다가는 다 죽겠다는 거다. 바로 이런 이분법이 조악한 선악사관과 온갖 조급주의를 양산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데 발목 잡힌 채 보수든 진보든 좋았던 옛시절이나 되뇌이며 허송세월하고 있을 때인가? 난 이 질문을 이 책을 통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던지고 싶었다. 어찌 보면 내 나름의 ‘역사 구부리기’ 작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달리 보면 당신의 주장은 어설픈 절충주의, 심한 경우에는 절충적 기회주의라는 지적도 피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바로 그렇게 충분히 예상가능한 판단과 평가가 횡행하는지 이 참에 한 번 제대로 짚어보자는 거다. 대체 어떤 잘못된 전제들, 혹은 책에서 말한 ‘아카데믹한 거짓말’들로부터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지 말이다.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5가지 고질병을 짚고, 이 병을 덧나게 하는 20세기 한국의 명암을 살핀 까닭이다. 나는 이 작업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조적 해체와 붕괴의 벼랑길이 아닌 통합과 치유, 도약의 탄탄대로로 이끌기 위해 절박하고도 시급하다고 봤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이런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 책이 자타칭 보수들한테는 그간의 게으름과 무사안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로, 자타칭 진보·리버럴들한테는 자해적 비판과 방향 잃은 분노의 미망을 깨우는 만파식적이 되길 바란다고 한 것도 그래서다.
-잘 알겠다. 당신의 집필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내용상의 호불호를 떠나 의미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모쪼록 건투를 빈다.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다. 나 또한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얘기들이 독자들에게 꼭꼭 씹히고 잘 저며져, 의미심장하고 생산적인 논쟁의 재료 혹은 불쏘시개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니 그리 될 수 있도록 당신도 이 책의 출간 소식 좀 널리 알려 주시라. 기존의 낡은 진보-보수 구도 속에서야 뭐 하나 마냥 반길 순 없겠지만 이에 관한 그 어떤 비판적 목소리들에 대해서도 댓거리할 준비가 돼 있다, 나는.
4. 조우석이 말하는 조우석, 그리고 『나는 보수다』
나는 누구인가 문화의 시선으로 한국사회 구조를 해석해온 저널리스트. 1981년 이후 《서울신문》과 《문화일보》, 《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며 음악·미술·사진·문학·학술 등 문화 전반을 다뤄왔다. 요즘은 우리 삶의 그루터기인 한국사회 전반에 관심이 쏠려 있다. 저서는 『굿바이 클래식』과 『박정희 한국의 탄생』 등 여러 권이 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조우석 칼럼」으로 서울언론인클럽에서 주는 2010년 신문칼럼상을 받았다.
왜 이 책을 썼나 한국사회 지식인 대부분은 자기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인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조우석의 판단이다. 그게 알게 모르게 먹물의 허위의식을 낳고 있지만, 젊은이들 가슴에 방향 모를 분노 즉 ‘좌파정서’를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고질병을 털어내고 책임 있고 건강한 주류사회를 복원할 수 있을까? 그것도 2012년, 2017년 대선이나 총선 시즌 때 반복될 표피적이고 소모적 논의보다 깊고 본격적으로 논의해볼까? 그런 담대한 제안의 목소리가 이 책이다.
무슨 내용을 담았나 이 책 가제가 본래 ‘디스토피아: 한국의 몰락’이었다. 한국사회 항구적 위기를 낳고 있는 다섯 가지 고질병을 도마 위에 올려 강력한 경고음을 내보자는 의도였다. 우리 역사는 실패했다고 믿는 역사 허무주의, 못 말리는 반기업 심리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이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편가름 따위와는 무관하지만, 혹시 누가 보수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보수다』이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뜨거운 동의와 합의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임박한 해체와 붕괴의 징후들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의 위선과 허세에 “노!”를 외치는 조우석의 한국사회 대해부!
1. 대한민국 보수가 『나는 보수다』를 읽어야 하는 까닭
: 대한민국 건국 63주년, ‘동의 없는 지배’와 결별할 담대한 기획은 과연 있는가?
반反기업 심리와 부富에 대한 적대감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증폭되고 있지만, 한 번 램프 밖으로 튀어나온 지니(램프를 가진 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를 안에 도로 집어넣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걱정스러운 보수세력의 대응도 어설프고 비이성적이다. 중립적 입장의 지식인 역시 못내 안타깝다. 그들은 “삶의 조건과 방향을 설정해주는 민주공화국의 핵심 이상과 가치는 내면에서 파괴됐다. 이게 우리가 헌신해야 할 민주공화국과 인간공동체의 참 모습이란 말인가?”고 지적하지만, 여기에도 무언가 분노의 기미가 있고, 누굴 향해 삿대질하려는 심리가 없지 않다. …
… 실로 만만치 않은데, 그렇다면 이 기회에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 단순한 사회적 기부와 선행을 통해 ‘착한 기업 만들기’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 어떻게 기업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구축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란 안토니오 그람시가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놀라운 성공을 관찰하면서 했던 말인데,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은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반복되는 항구적 위기도 마찬가지로 넘지 못한다.
당장의 문제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이런 ‘인식의 내전’이 삼성 문제에서 다시 부딪친다는 데 있다. 그들이 가장 성공했고, 가장 앞서있기 때문에 더욱 질시와 견제의 대상으로 부각된 셈이다. 그 점에서 삼성 문제는 항상 덧나는 상처이자, 2000년대 초입 한국사회를 볼 수 있는 압축파일인 셈이다. 그들을 비판할 필요도 못 느끼지만, 굳이 두둔할 생각도 없다. 한때 미국에서 통했던 말대로, 왜 우리는 “GM에 좋은 것은 사회에도 좋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을까를 염두에 두고 삼성 문제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나는 보수다』, 10쪽, 196쪽에서
1987년 이후 지난 20여년 가까이, 한국사회에서 가랑비에 옷젖듯 퍼진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적정선을 넘어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인 이같은 흐름에 대한 전략적이고 기술적인 해법은 과연 마련되고 있는가? 이같은 흐름의 확산을 경계하고 막겠다는 이유를 앞세우고는 있지만, 삼성그룹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이른바 주류세력은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비판이나 성토에 대해서도 초보적 방어마저 서툴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저자는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적·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했던 구미권 국가들과 달리 불과 50년도 안 되는 시기에 근대적 산업화에 성공했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먼저 짚자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성장한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신뢰가 크게 높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의 축적과 사회적 기여라는 논의의 첫 장을 겨우 연” 것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그 해법이다. 저자는 한국의 큰 그림을 그리던 대기획자의 실종 문제를 제기한다. 거대자본과 재벌을 통제하며 미래를 짚어내는 정부, 상식을 뛰어넘은 투자를 통해 산업고도화를 이룩해냈던 통 큰 정부는 과연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는 벤처정신을 발휘했던 전략적 투자가의 위치에서 기껏 유한책임만을 지고 빠지는 재무적 투자가의 수준으로 행동반경을 스스로 위축시킨 지 오래다. 마르크시즘 등 평등주의 이념의 소리없는 확산·득세도 결국 이같은 역할의 커다란 공백으로 빚어진 결과다. 한국사회가 지식인사회 특유의 ‘리버럴 강박증’과 근본주의적 사고,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이념적 내출혈 등에 시달리게 된 것 역시 이런 공백을 메울 지적·문화적 헤게모니가 마련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호의 해체 징후와도 맞물린 이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처방은 그럼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편견과 독단을 앞세운 태도를 넘어 실사구시의 태도로 과거를 점검하고, 둘째, 희생양 찾기 게임으로부터 탈피하며, 셋째, 경제민주화 움직임이 자기파괴적인 평등주의의 늪이 되어 지난 세기 성취의 기초마저 허물지 않게 하는 일이다. “과연 기업은 민주주의 원리로 움직이는 조직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저자는 민주주의를 기업경영 원리로 대입하는 태도를 차제에 접자고 제안한다. 포퓰리즘적인 평등주의의 늪에 자꾸만 빠져드는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경제민주화를 등한시한 결과라기보다는 경제력 집중에서 오는 특유의 에너지를 글로벌 스탠다드란 이름 아래 내다버린 결과임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주목해야 ‘아비 없는 사회’에 기대 성장했던 보수독과점 편향으로부터도, 이에 대한 성마른 반편향으로 대한민국의 기초 자체를 허물고 있는 자해적인 리버럴독과점 상태로부터도 벗어나, 담대한 재도약에 필요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길을 트기 위한 지적·문화적 헤게모니 프로젝트에 우리가 나서지 않는 한, 문민정부 시절을 포함해 지난 민주정부 시절을 거치며 확산돼온 좌파정서, 달리 말해 분노 어린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도약에 필요한 사회적 동력으로 바꾸어낼 길은 없다.
저자가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21세기 초입 들어 ‘오래된 미래’의 귀환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크게 바뀌고 있는 한반도 지정학에 적극적으로 적응해야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친미연중, 혹은 친중연미의 능소능대한 적응과 활용, 전략적 마인드를 통한 새로운 한반도 지정학의 구축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란 질문 앞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한반도선진화 전략이나 로드맵, 혹은 진보세력의 재집권 프로젝트 등”은 “눈먼 구상에 그치거나, 거대변수를 놓친 작은 그림에 불과하다.” 여기서 분명한 건 한국사회에 고질적인 근본주의 사고를 낳으며 “조선의 대표 사대부 송시열이 우리 몸에 심어준 명분 지상주의 DNA, 소학동자 조광조가 뿌리내려준 도덕 제일주의 DNA는 장애가 될 뿐”(353쪽)이라는 점이다.
2. 대한민국 리버럴과 진보가 『나는 보수다』를 읽어야 하는 까닭
: 위선과 허세 속에서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놀라운 성취를 백안시하는 역사 허무주의로 담대한 통합과 치유의 실마리가 과연 생길 수 있을까?
… 문명사가들의 통찰을 따로 빌릴 것 없이 상식과 균형감각에 비춰보더라도, 2010년대 초입의 대한민국은 붕괴된 문명들이 보여줬던 몰락의 두 징후인 정체상태와 역류 현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정치와 경제는 정체 상태에 진입한 게 분명하며, 반복되는 다양한 위기 징후를 보면 역류 현상에 이미 발을 내딛었다는 판단이 들 정도다.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 역사 허무주의, 부에 대한 소모적 적대감, 과도한 이념분쟁, 이걸 키우는 큰 자궁으로서의 외곬과 자폐의 슈퍼밈, ‘우리 안의 근본주의 DNA’….
이걸 이제 다섯 가지 한국병이라고 부르자. 정확히 보고 합당한 처방을 해야 옳다. 문제는 치유다. 한국인의 체질로 굳어진 슈퍼밈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중세 이후 형성되고 현대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채 장기지속을 거듭하고 있는 그 한국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해방 이후 반공국가 건설, 경제발전, 민주화의 압축 달성 속에서 놓쳐온 우리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공적 시민의 덕성을 우리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얼굴을 차근히 되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인을 구성하는 슈퍼밈의 실체를 하나씩 확인하고, 손을 보는 작업 말이다.
-『나는 보수다』, 29쪽 중에서
저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고질병은 5가지다. 1) 진보에 대한 무턱댄 선호를 조장하는 ‘리버럴 강박증’, 2) 20세기 통틀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기적으로 평가받는 ‘신데렐라 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성공을 부정하는 자기모멸의 역사 허무주의, 3) 사회적 부패와 병폐를 넘어서 대한민국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 기반 자체를 허물고자 하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4) 담대한 타협의 여지를 아예 가로막으며 지적·문화적 내전까지 빚어내기에 이른 과도한 이념분쟁, 5) 앞서 말한 진보진영의 고질병들 이면에 장기지속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슈퍼밈’, 근본주의 DNA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부터 주요 이슈로 부상한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론. 이에 대해 저자가 내린 진단은 그간 이뤄져왔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에게, 어느 때부터인가 느닷없이 등장한 지식인사회의 위기 혹은 붕괴 징후는 ‘지식인은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리버럴 강박증’의 산물이다. 바로 이 강박증 탓에 급변하는 내외적인 현실, 그리고 시효를 상실한 옛 주의와 이상 양자를 분간 못하는 ‘인식적 지체’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불거지는 비판적 지식인 특유의 허위의식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7세기 이후부터 완고하게 장기지속해온 슈퍼밈, 즉 근본주의 DNA 탓에 그 정도는 자기파괴적이라 할 만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바람에 중상주의 노선의 막차를 타고 이 막차의 기관사이자 “대기획자” 노릇을 했던 이른바 개발연대의 테크노크라트들 또한 당대를 이끈 지식인 범주로는 이해되지 못한 채 종속매판 세력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폄훼에 시달리는 오류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맹목 속에서 진보·리버럴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20세기 현대사에 대해 거꾸로 그것이 마치 파행과 불의 일변도의 역사였던 양 공공연히 외눈박이 행세를 하며 ‘아카데믹한 거짓말’들의 목록과 조합을 차츰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무너지고 빈약해진 공적 권위와 공동체적 결속력과 신뢰는 반문화·무교양주의가 대중사회의 문화적 빈곤과 지적 공허, 끝없는 반목의 악순환만 부르는 ‘르상띠망’을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는 외곬스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대중화되고, 백범 김구 같이 한반도 지정학에 어두웠던 패배한 정치인이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하는 인물로 오래도록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균형잡힌 역사상의 부재와 빈곤을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이같은 난맥상이 비록 큰 그림 없이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의 부작용이라고는 해도,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통합의 틀은 아랑곳 않은 채로 한국 현대사가 암흑과 파행으로 점철된 양 주장해온 진보·리버럴 지식인들의 무책임 내지 직무유기는 실로 우려할 만한 지경이다.
특히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던 지난 10여년 간 진보·리버럴 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곳곳에 자리잡으며 대한민국 공동체에 대한 무턱댄 회의를 부추겨온 ‘좌파정서’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이상증폭해 가는 중이다. 이런 분위기는 새 세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대한민국 공동체의 기초 자체를 사실상 불모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져온 작금의 앙앙불락은 그래서 같이 살자는 요청이 아니라 실현불가능한 진보의 신기루를 내걸고서 “다함께 못 살자”고 외치는 대책없는 투정에 다름 아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역사의 헛바퀴에 갇힌 채 급진이념의 온상이 돼버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따지고 보면 그네들과 한국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진보진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성취를 재음미하고 삼성·LG·현대그룹과 같은 재벌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연착륙’ 전략을 아울러 모색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주주의도, 그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그 어떤 큰 그림도 사실상 나오기 불가능하다는 걸 진보진영은 과연 언제까지 애써 외면할 참인가? 19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를 휩쓴 이념 과잉의 해악과 자중지란을 넘어, 보수세력과 진보진영의 담대한 타협을 이끌어낼 ‘제3의 길’은 정녕 없는 걸까?
이같은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저자는 ‘성리학 신정국가’라 불려도 손색없을 조선조 때부터 장기지속해온 한국형 슈퍼밈의 정체를 처음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그 정체를 ‘근본주의 DNA’라고 명명하면서, 이 슈퍼밈의 장기지속이야말로 한국·한국인들이 외부 변화와 새로운 조류에 재빨리 적응하면서도 지독한 자폐적 속성을 버리지 못하게 제약해왔다고 말한다. 불교와 유교, 기독교부터 시작해 각종 급진적 사상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래 사상들이 맹신과 독선의 교조로 전락해버린 역사적인 경험치들 또한 이같은 슈퍼밈의 장지지속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간의 통념과 달리, 친일파로 비판받았던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야 하는 이유도 춘원의 문제의식 속에 저자가 말하는 근본주의 DNA의 장기지속 문제에 대한 고민의 일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질병과도 같이 고질화된 근본주의 습속에서 탈피해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가 책 곳곳에서 거듭 주장하는 까닭도 그래서다. 이 책 말미에 저자가 개혁과 이상의 이름으로 되려 광신주의의 생지옥을 연출하길 서슴지 않았던 ‘개혁주의 독재자’ 루터와 칼뱅에 의연히 맞서 싸우며 상대주의와 관용의 가치를 앞세웠던 에라스무스와 카스텔리오, 역시 프랑스혁명의 대의가 지닌 역설을 경계하며 ‘균형잡힌 인문주의’의 미덕을 살리고자 했던 알렉시스 토크빌과 에드먼드 버크에 관한 일화를 언급하는 것 역시 지금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변화와 전향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기 위함이다. 진보진영은 과연 이처럼 균형잡힌 인문주의의 가치를 되살릴 준비가 돼 있는가?
* * *
피겨선수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작품명 <오마주 투 코리아>를 언급하고 있다시피, 『나는 보수다』는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에 바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자타칭 보수와 진보가 애써 외면하거나 백안시했던 20세기 한국사의 곡절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는 열정적인 요청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다』는 한국사회에 구조적으로 임박해 있는 각종 해체와 붕괴 징후들 앞에서, 진보와 보수진영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뿌리내려 있는 암묵적 금기들을 깨고자 하는 지적 분투의 산물인 셈이다.
에드먼드 버크와 토크빌이 프랑스대혁명의 위험성을 경고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지만 반동적 왕정복고주의자라고 평가받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것처럼, 『나는 보수다』는 한반도와 대한민국을 둘러싼 세계와 역사를 더 크고 새롭게 바라보자는 겸허한 제안이자 본격적 논쟁에 대한 요청으로 읽힐 만하다. 지난 20세기 현대사에 대한 무턱댄 추종이나 섣부른 단절과 어떻게 철저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것인가. 『나는 보수다』는 이 질문을 통해 새로운 사회·정치·문화적 합의를 이뤄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3. 『나는 보수다』 저자와의 가상인터뷰: 내가 굳이 보수를 자처하는 이유
-책에선 이제는 터놓고 말할 때가 됐다고 하는데, 대체 무엇을 터놓고 말하고 싶다는 건가?
한국사회, 특히나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가히 허세를 방불케 할 정도다. 물론 그래야 했던 사회적·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마냥 이해하고만 있기에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 방향을 상실한 상태다. 가뜩이나 사회우울증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이 시점에서, 결코 강 건너 불구경 따위가 아니다. 이미 사회적 괴물로 거듭날 조짐을 보이는 좌파정서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되려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큰 그림’도 없이 출발했고, 이를 위한 사회적 동의 과정조차 생각됐거나 태부족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예삿일이 아니다. 묻지마 분노와 방향 없는 항변의 목소리들이 갈수록 거세질지 모르는데도, 이를 부추기거나 짐짓 외면하고 마는 그간의 상황에 단호히 “노!”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혹세무민의 피리소리들만 요란했지, 생산적 논의의 실마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과연 지난 세기 한국에서 일구어 낸 ‘대반전의 드라마’가 과연 장수할 수 있을까? 나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래서 이젠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냐, 아니면 보수냐’ 같은 질문은 제쳐두고서라도,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궁금하다. 이마저 편가르기에 길들여진 탓에 던지는 우문일까?
썩 내키진 않지만, 차라리 그런 질문이 필요하다. 구태의연한 도식으로 이런저런 딱지 붙이기나 하고 있는 것보단 말이다. 이제껏 얘길 했는데도, 내 정체가 아직도 파악 안 되나? 내가 선 자리는 명확하다. 진보가 낫네 보수가 좋네 하는 식의 이분법은 죽었고, 이 이분법에 갇혀 있다가는 다 죽겠다는 거다. 바로 이런 이분법이 조악한 선악사관과 온갖 조급주의를 양산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데 발목 잡힌 채 보수든 진보든 좋았던 옛시절이나 되뇌이며 허송세월하고 있을 때인가? 난 이 질문을 이 책을 통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던지고 싶었다. 어찌 보면 내 나름의 ‘역사 구부리기’ 작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달리 보면 당신의 주장은 어설픈 절충주의, 심한 경우에는 절충적 기회주의라는 지적도 피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바로 그렇게 충분히 예상가능한 판단과 평가가 횡행하는지 이 참에 한 번 제대로 짚어보자는 거다. 대체 어떤 잘못된 전제들, 혹은 책에서 말한 ‘아카데믹한 거짓말’들로부터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지 말이다.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5가지 고질병을 짚고, 이 병을 덧나게 하는 20세기 한국의 명암을 살핀 까닭이다. 나는 이 작업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조적 해체와 붕괴의 벼랑길이 아닌 통합과 치유, 도약의 탄탄대로로 이끌기 위해 절박하고도 시급하다고 봤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이런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 책이 자타칭 보수들한테는 그간의 게으름과 무사안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로, 자타칭 진보·리버럴들한테는 자해적 비판과 방향 잃은 분노의 미망을 깨우는 만파식적이 되길 바란다고 한 것도 그래서다.
-잘 알겠다. 당신의 집필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내용상의 호불호를 떠나 의미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모쪼록 건투를 빈다.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다. 나 또한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얘기들이 독자들에게 꼭꼭 씹히고 잘 저며져, 의미심장하고 생산적인 논쟁의 재료 혹은 불쏘시개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니 그리 될 수 있도록 당신도 이 책의 출간 소식 좀 널리 알려 주시라. 기존의 낡은 진보-보수 구도 속에서야 뭐 하나 마냥 반길 순 없겠지만 이에 관한 그 어떤 비판적 목소리들에 대해서도 댓거리할 준비가 돼 있다, 나는.
4. 조우석이 말하는 조우석, 그리고 『나는 보수다』
나는 누구인가 문화의 시선으로 한국사회 구조를 해석해온 저널리스트. 1981년 이후 《서울신문》과 《문화일보》, 《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며 음악·미술·사진·문학·학술 등 문화 전반을 다뤄왔다. 요즘은 우리 삶의 그루터기인 한국사회 전반에 관심이 쏠려 있다. 저서는 『굿바이 클래식』과 『박정희 한국의 탄생』 등 여러 권이 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조우석 칼럼」으로 서울언론인클럽에서 주는 2010년 신문칼럼상을 받았다.
왜 이 책을 썼나 한국사회 지식인 대부분은 자기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인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조우석의 판단이다. 그게 알게 모르게 먹물의 허위의식을 낳고 있지만, 젊은이들 가슴에 방향 모를 분노 즉 ‘좌파정서’를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고질병을 털어내고 책임 있고 건강한 주류사회를 복원할 수 있을까? 그것도 2012년, 2017년 대선이나 총선 시즌 때 반복될 표피적이고 소모적 논의보다 깊고 본격적으로 논의해볼까? 그런 담대한 제안의 목소리가 이 책이다.
무슨 내용을 담았나 이 책 가제가 본래 ‘디스토피아: 한국의 몰락’이었다. 한국사회 항구적 위기를 낳고 있는 다섯 가지 고질병을 도마 위에 올려 강력한 경고음을 내보자는 의도였다. 우리 역사는 실패했다고 믿는 역사 허무주의, 못 말리는 반기업 심리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이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편가름 따위와는 무관하지만, 혹시 누가 보수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보수다』이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뜨거운 동의와 합의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힘, ‘슈퍼밈’
제1부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
1.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힌 그들
2. 동서양 구분 없는 지식인의 허위의식
3. 지식인의 옛 모델, 조선 사대부
4. 허위의식을 빼고 바라본 20세기 역사경험의 실체
5. 대중사회의 반문화주의와 무교양주의
제2부 역사 허무주의
1.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했다?
2. 해외의 과거사 청산, 모범답안은 없다
3. 백범 김구를 존경할 수 없는 이유
4. 현대 중국의 국부 쑨원과 마오, 그리고 장제스
5. 큰 그림 없이 세워진 건국의 부작용
제3부 반反 기업심리, 부에 대한 적대감
1. 우리의 반면교사, 라틴아메리카
2. 한국재벌, 그 출생의 비밀
3. 삼성 문제의 진정한 해법을 찾아서
4.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넘어 헤게모니로
5. 한국경제, 인식의 대타협을
제4부 이념 갈등의 내출혈
1.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공과
2. 문화계의 ‘민중문화운동’이라는 괴물
3. 1980년대 학생운동의 일탈
4. 좌파보다 훨씬 더 두려운 ‘좌파정서’라는 것
5. 레드 컴플렉스와 종북주의
제5부 오래된 질병, 근본주의 DNA
1. 한반도 지정학의 재해석
2. ‘성리학 신정국가’ 조선이 남긴 유산
3. 우리는 불교· 기독교·유교도 모두 근본주의
4.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말라
5. 독재자 칼뱅과 의인 카스텔리오
에필로그 : 이대로라면 앞날이 두렵다
감사의 말
참고문헌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