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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비스마르크 평전: 비스마르크, 또다시 살아나다

개인저자
강미현 지음
발행사항
서울: 에코리브르: 현대문화센타, 2010
형태사항
768 p.: 삽화; 23 cm
ISBN
9788962630411
청구기호
340.99 강39ㅂ
일반주기
피전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
서지주기
참고문헌: p. 759-768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4796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4796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이 책에 대하여

1. 이 책은 저자가 석사논문에서 출발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거쳐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헌신, 연구해온 비스마르크 연구의 결정판이다. 이러한 점들은 책을 읽다보면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2. 전문 역사가가 집필한 비스마르크 연구의 집대성이다. 광범위한 사료 섭렵과 깊은 역사 지식, 그리고 전문 연구자의 치밀함 등이 책 곳곳에 스며 있다.
3.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19세기 유럽사와 독일 근대사 등도 자세히 아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스마르크 평전의 전범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즉 평전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필자가 이만 한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내용

1989년 11월 9일,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맞이한 독일인들은 그 이듬해 통일을 맞이한 조국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한 일환으로 과거 청산과 함께 ‘완전한 역사 새로 쓰기’의 작업에 돌입했다. 말하자면, 두 개로 분단된 국가에서 살아온 그들이 각각의 과거사와 그 이전 ‘대과거’의 공동 역사는 물론 통일된 국가의 완성된 모습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시대적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그런 역사 작업 속에서 첫 통일독일의 지도자인 비스마르크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의 제2제국이 1990년 독일 통일의 출발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체 역사’에서 제2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의 제1제국과 히틀러의 제3제국 사이의 ‘중간기’로서, 특히 나치 출현과 그로 인한 분단국가의 역사와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가 탄생한 지 175년이 되는 해이자 정치무대에서 물러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1990년과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1998년의 기념행사들을 기점으로 통일독일의 현장 속에서 그는 쉼없이 ‘부활’했다.

비스마르크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문 대대로 융커나 장교 출신의 보수주의 성향을 띤 귀족가문의 친가와 17세기부터 시작되는 지식인 중심의 자유주의 시민계급 출신의 외가를 배경으로 태어났다. 비록 신분의 차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이긴 했으나, 그의 조상들이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위해 몸 바친 위정자들인 동시에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프로이센을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축을 대변했음은 분명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오가면서 경험을 쌓고 이를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기회와 가능성을 부여받았으나, 비스마르크 스스로는 그런 환경적 이점을 거부했다. 어머니의 냉정한 교육방식과 어긋난 사랑으로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강제로 가족의 품을 떠나 도시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는 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거부하기까지 했다. 평민 출신의 어머니로 인한 자신의 이중적인 신분을 외면하는가 하면 자신의 자질이나 성품조차 어머니의 섬세한 문학적 소양과 예민한 정신적 기질을 그대로 닮았음을 부정할 만큼 융커 출신의 보수적 귀족가문의 아버지에 일방적으로 집착했고, 아버지의 뿌리에서 정체성과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그는 스스로 찾아낸 그런 방식을 고수할 뿐 포기하는 데 익숙지 않았고, 심지어 극단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변해갔다. 그런 외골수의 모습은 이른바 고질적인 ‘비스마르크 병’이라는 성격 결함으로 곧잘 표출되곤 했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고 유럽의 정치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로서 위치를 생각해볼 때 간과할 수 없는 그런 증세는 어린 시절의 상흔과 부정적인 기억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어머니의 강요에 따라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비스마르크는 불성실한 대학시절에 이어 방탕한 공직생활과 영국의 상류층 여성들과 염문설로 청년시절의 값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일자리도 놓치고 외교관의 꿈마저 접은 채 빚더미에 앉아 낙향한 이후로 지루하고 한적한 전원생활의 도피처로서 원치도 않던 군복무를 자청하는가 하면 농업경영인의 삶에도 뛰어들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농경생활에 묻혀 조용히 지내는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병적인 나태함에 빠져들어 인생의 ‘낙오자’나 다름없었다.
자신 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중 비스마르크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진정한 첫사랑이자 절친한 친구 브랑켄부르크의 약혼녀인 마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허함과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그에게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까지 불어넣어준 마리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녀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비스마르크는 비로소 생의 반려자인 아내 요한나와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마리의 친구로서 누구보다 마리의 의미를 잘 알던 요한나로서는 마리의 존재가 그의 아내인 자신을 평생 동안 가려버리게 되리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러나 요한나는 청춘시절 비스마르크의 오랜 방황과 좌절을 모두 끝낼 수 있도록 이끌어준 길잡이이자 오로지 공직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헌신과 내조를 아끼지 않은 희생양으로서 비스마르크의 일등공신이었다.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순간에 “요한나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한마디의 기도만을 남길 만큼 비스마르크에게 요한나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1847년 4월 통합의회 보결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비스마르크는 1849년 프로이센 하원과 1850년 에어푸르트 연합의회의 의원직을 수행해나갔다. 1848년 3월 혁명 당시 모든 자유·민주주의적인 행동과 거리를 두고, 소독일주의적 통일 주장이나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연합 계획안 등을 모두 반대할 만큼 친오스트리아적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1851년부터 8년 동안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를 역임하면서 그는 프로이센의 동등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지되어온 빈 체제 하의 독일연방에 역행하는 이원주의를 당당하게 외쳤다.
마침내 1862년 비스마르크는 철도부설에 이어 군제개혁으로 인한 예산안 갈등이 헌법 분쟁으로 악화된 상황에서 빌헬름 1세의 부름으로 프로이센의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국왕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전달하는 취지에서 내뱉은 철과 피에 의한 ‘힘의 정치’ 발언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직접적인 투쟁선언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그의 정치적 노정은 험난한 길로 들어섰다.
때마침 독일 북부에 위치한 슐레스비히-홀슈인 두 공국을 둘러싸고 덴마크와 전쟁이 가시화되자, 그는 내부의 위기상황을 외부로 돌리는 다선의 정책을 이용했다.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민족 간의 협조체제로써 덴마크와 전쟁에서 승리함은 물론 헌법분쟁으로 인한 반대의 분위기를 일소하는 동시에 그동안 서로 적대적인 노선을 펼친 오스트리아와 상호 연합전선을 구축해놓았다.
그러나 승전 이후 두 공국에 대한 두 강대국 간의 소유권 장악이 향후 독일의 정치상황을 곤란한 지경으로 내몰아갔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충분히 예상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동등한 이원주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덴마크 문제는 독일 북부 주변의 부차적인 문제만은 아닌, 오히려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정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지름길인 동시에 향후 독일 정치의 물꼬를 터주는 배수로이기도 했다.

1866년 ‘이류 국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아류국가, 프로이센’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비스마르크는 주변국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원주의를 거부한 오스트리아와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건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형제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장차 프랑스나 러시아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비하여 대패한 오스트리아를 영원한 적으로 만들지 않고 미래의 동지로 남겨두기 위해 전후 협상을 서둘러 매끄럽게 처리하는 외교적 역량을 펼쳤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보다 큰 후유증을 안게 된 프랑스는 ‘사도바를 위한 보복전’을 기도한 나머지 1870/71년의 전쟁을 감행했고, 그때 오스트리아는 정작 프로이센의 든든한 동맹국이 되어 비스마르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866년은 더 이상 독일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이원주의의 획득이 아닌,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채 프로이센이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한 결정적인 해로서 50여 년 만에 도래한 ‘일탈의 해’인 동시에 독일은 물론 유럽에 ‘운명적인 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프로이센이 승리한 그 해가 독일 통일을 향한 출발점인 동시에 유럽 내 힘의 구조에 프로이센이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시점인 것이다. 물론 전쟁책임론과 전쟁계획설을 주장하는 대독일주의의 반비스마르크 세력들의 노골적인 비판까지 감안하고 보면, 오스트리아와의 이원주의는 곧 프로이센의 헤게모니 정책으로서 그의 첫 번째 정치적 목표인 동시에 비난의 진원지가 되었고, 향후 독일 정치의 시금석이었으되 비난의 촉매로까지 작용하면서 비스마르크 정치 전반의 일대 전환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정치의 승리 이후 비스마르크는 먼저 내치를 위한 ‘울타리 만들기’라는 제2의 혁명을 주도했다.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을 시작으로 남부국가들과 차례로 보호방어동맹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북독일연방의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고는 유럽 강대국들이 프로이센의 행보를 주시하는 만큼 그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주력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당사자들 사이에 이미 끝나버린 독일 전쟁의 보상 문제를 빌미로 또다시 나폴레옹 3세가 일방적으로 보상을 요구함에 따라 전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듯했다. 특히 독일연방에 속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북독일연방에서 제외된 상황을 이용하려는 나폴레옹 3세가 룩셈부르크 영토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비스마르크는 영토 요구에 대한 확답을 외면한 채 그 영토의 점령이 마치 실현될 듯 기대감에 젖도록 부추기는 한편, 룩셈부르크를 ‘얻겠다’는 프랑스 황제와 ‘팔겠다’는 네덜란드 국왕을 이중으로 조종할 뿐이었다. 그리고 런던 국제회의가 강대국들의 보호 아래 룩셈부르크를 중립국으로 독립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비스마르크로서는 당장의 불편한 상황을 잠재우긴 했으나, 갖은 술책을 동원했던 만큼 나폴레옹 3세가 정치적 보복전을 꾀하도록 자극하는 크나큰 우를 범하고 말았다.

살얼음판을 걷듯 지속된 프랑스와의 긴장관계는 비어 있던 스페인 왕위의 선출에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출신이 거론됨에 따라 자국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나폴레옹 3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역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프로이센 국왕에까지 거부의사를 밝히도록 압력 아닌 압력을 행사한 나폴레옹 3세에 맞서 소위 ‘엠스 전보’ 사건을 터뜨렸다. 이른바 독일 국왕의 뺨이라도 갈기는 듯 재구성된 프랑스 측의 전문이 각 언론에 발표되자, 독일 국민들이 격분했고,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도 공감해마지 않았다.
그동안 북독일연방의 마인 경계선과 헌법문제로 자유주의자들과 남부국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비스마르크로서는 외교적 갈등을 끌어들여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평화체제를 지켜낼 수 있게 되었으니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국민 전쟁이라는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70/71년 프랑스와의 대접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특히 세당에서 거둔 압도적인 승리와 함께 감동의 물결이 ‘2등 제국’의 시대를 막 끝내려는 듯 ‘제2독일제국’을 향한 통일의 바람이 곳곳에서 일었다. 독일제국의 통일이라는 업적으로 향후 비스마르크는 시대의 영웅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전쟁과 피에 의존한 독재자이자 독일의 역사 발전에 모순을 안겨준 파괴범으로 혹평되는 흑백논리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제국 창건의 영광이 ‘순간’에 지나지 않은 듯, 1871년 ‘위로부터의 혁명’의 결과가 안정을 보장해준다고 보기에는 안팎의 상황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선 대외적으로 유럽의 새로운 패권국가의 우호국으로 당당히 나서는 국가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변국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예상을 넘어섰고, 그들의 태도도 프랑스인들의 적대감과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국내외 문제를 아우르는 통치체제의 전반적인 특징인 다선구조의 전략을 또다시 내세웠다. 먼저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정부에 대한 반감을 동정으로 바꾼 주변국들을 향해 “더 이상의 영토 팽창은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현상유지 정책을 강력하게 내비침으로써 그들의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잠재우고자 했다.
그리고 안으로 새로운 제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위 ‘제국의 적’인 정치적 가톨릭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내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일련의 법과 규정에 따라 가톨릭교회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는 중앙당의 위세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동향까지 심상찮았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문화투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노동자들에 대한 철저한 규제와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그들을 회유했으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사회민주당 역시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할 뿐이었다. 오히려 비밀리에 군사조직을 결성하고 거세게 저항하면서 심리적·정치적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힘까지 강화해나갔다.
결과적으로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민족국가로 통일한 이후 독일제국의 안전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국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전형적인 독재 통치의 면모를 보였다. 국가주의를 외치는 그는 정적들을 제국의 적으로 삼고, 그들의 저항을 비민족적·반국가적 행위로 간주한 이기적인 당파주의자이며 극단주의자이기도 했다.

안팎의 정치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부상한 신생 독일제국은 유럽의 강대국들에게 충격 그 자체이고, 위압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상유지에 평화유지의 정책 표명 등으로 유럽 강대국들에게 바짝 다가선 비스마르크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베를린 회의를 통해 발칸지역의 영토분쟁을 잠재우고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의지를 관철시킴으로써 유럽 정치무대의 중재자로서 평화의 대변자로서 지도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독일의 안정과 유럽 내 새로운 힘의 균형을 지속적으로 지켜내기 위한 좀더 항구적인 처방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프랑스를 계속 고립시키고, 나머지 강대국들과 결속을 다짐으로써 독일의 정치적 난관을 이겨내고 헤게모니를 지속시켜야만 했다.
마침내 그는 삼제협정을 비롯하여 이국동맹, 삼국동맹, 지중해협정에 이어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 등 동맹의 중독자인 양 일련의 동맹체제를 적극 구축해나갔다. 그러나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3세에 이어 집권한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와 불화설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친러시아적 동맹관계를 굽히지 않는 등 매번 틀어지는 정책노선으로 비스마르크의 사퇴설이 임박했고, 1890년 3월 눈엣가시 같은 ‘늙은이’의 해임이 공식화되었다. 그동안 비스마르크에 의해 양국 간의 마찰이 간신히 가라앉긴 했지만, 이후 그 조약의 갱신을 철저하게 외면해버린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염려한 대로 실제로 러시아와 프랑스가 서로 손을 맞잡고 더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맞서도록 한 크나큰 실책에 대한 질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제국주의적 세계화정책을 표방한 빌헬름 2세에 대한 환상이 깨질수록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인물로 비스마르크를 추대하려는 독일인들의 욕구와 의지는 커져만 갔고, 비스마르크 회고록 《상념과 회상》의 출간에 이어 전기들이 속속 발표되었다. 각계각층의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그를 찾아주는 가운데 1895년 4월 l일 그의 여든 번째 생일은 비스마르크 인생에서 최후의 절정기였다.

통일의 역사 20년! 독일의 전체 역사와 함께 비스마르크 인물과 정치에 대한 재조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19세기의 그는 그 어디에서도 본래의 완전한, 전체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의 정치문화에 부합될 수는 없는 한계를 지닌, 그러나 철저하게 19세기를 살다간 정치 지도자이자 또한 근대적 신화의 장본인인 비스마르크! 철저한 이분법적인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그런 현실 속에서 불구나 반쪽이 아닌, ‘제대로’ 된 전체적인 歷史像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제 그가 우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목차

머리말
서문

01 가문의 후손으로서, 프로이센의 후예로서
그는 누구인가|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다|가문 세습지의 상속자가 되다
02 혼란스런 두 세계를 오가며
격동 속의 ‘약체’ 독일|어머니에게서 영영 멀어지다|방탕과 허상의 한가운데에서
03 오랜 방황의 끝에서
좌절의 늪에서 헤매다|일생의 운명을 만나다
04 험난한 정치세계에 뛰어들다
국제정세 속의 ‘주변국’|혁명의 불길을 거스르다|보수주의의 정치적 소신을 지켜내다
05 주사위는 던져지다
이원주의를 고집하다|패러다임을 전환하다
06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열리다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수상?|이원주의를 던져버리다
07 프로이센의 헤게모니를 향하여
오스트리아를 제압하다|안팎으로 ‘혁명’을 일으키다
08 시대적 흐름의 ‘조정자’
독일 북부를 평정하다|나폴레옹 3세를 주저앉히다
09 제국의 창건이 바로 눈앞에
또다시 전쟁터로|제국의 길로 들어서다
10 ‘내전’을 치러내다
좌절의 덫, 문화투쟁|‘채찍과 당근’, 사회주의자 탄압법
11 권력자의 빛과 그림자
유럽의 중재자, 그칠 것이 없어라|동맹의 중독자, 고전을 자처한 격
12 해임만이 기다리다
젊은 황제의 눈엣가시|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다
13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끝나다
권력의 뒤안길에서|별이 지다
14 비스마르크-역사상(歷史像)
역사 편찬과 비스마르크 상(像)|신화적 영웅과 정치적 지도자

비스마르크 연대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