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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발간물

단행본한국어 글쓰기 강좌 2

고종석의 문장: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개인저자
고종석
발행사항
서울 : 알마, 2014
형태사항
471 p. ; 23 cm
ISBN
9791185430324
청구기호
802 고75ㄱ 2
주제
글쓰기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5178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5178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기획 의도

완간, 한국어 글쓰기의 정본!

《고종석의 문장》(이하 《문장》)이 전 2권으로 완결되었다. 이로써 한국 사회는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한국어 글쓰기의 정본을 얻게 되었다. 이태준의 《문장 강화》가 20세기의 글쓰기 교육을 감당했다면, 이 책 《문장》은 21세기의 그것을 감당해내길 기대한다. 《문장》은 작가 고종석의 글쓰기 강의를 녹취 정리한 것으로, 강연은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모두 열두 차례에 걸쳐 숭실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둘째 권은 후반부 여섯 강을 정리한 것이며, 전반부 여섯 강을 묶은 첫째 권은 2014년 상반기에 출간된 바 있다.
그런데 왜 새삼 ‘글쓰기’일까? 흔히 SNS가 보편화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고종석도 이런 인식을 공유한다. 이른바 “글쓰기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저자가 되는 세상이 열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종석은 ‘글쓰기 교육’의 필요성을 발견한다.

사실 글로 얽힌 논쟁의 많은 부분이 글을 잘 못썼다거나 오독을 해서 벌어지거든요. 만약 글쓰기나 읽기 훈련이 안 되어 있다면 불필요하고 소모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일 수 있는 입씨름들이 인터넷 시대엔 더 많아질 거예요. 대중적 글쓰기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_456쪽

그는 논객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오독으로 빚어진 소모적인 말싸움을 숱하게 경험했다. 그리고 절필한 이후에도 트위터의 타임라인에서 가장 보통의 사람들과 설왕설래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경험은 그에게 말이 곧 글이 되고, 모두가 필자인 시대에 글쓰기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했을 것이다.
이 책은 SNS시대의 글쓰기 민주화 현상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정의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의 글쓰기 교육’을 제안한다. 숱한 글쓰기 책들처럼 테크닉에 함몰된 교육은 되레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글로 다른 사람을 상처 주”거나 “글을 사람 잡는 흉기로 쓰”는 사람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고종석이 《문장》 1권의 기조를 2권에서도 이어, 글쓰기 테크닉의 비중만큼이나 인문 교양 강의에 무게를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명한 비평가의 글을 한줄 한줄 강독하며 세밀한 읽기의 모범을 보여주는가 하면(1강), 언어에 나타나는 구별짓기의 여러 양상을 관찰하며 글의 이면에 있는 인간의 욕망에 주목한다(2강). 또 정치와 광고 분야의 전략적 언술에 분석적으로 접근해, 비판적 읽기와 효과적 글쓰기를 동시에 도모한다(3강). 이러한 교양 강의는 근현대 역사와 정치?시사 상식, 언어학적 교양을 활달하게 넘나들며 이루어진다. 글쓰기 교육과 인문 교양 강의의 이 절묘한 만남은 “글 쓰는 삶이란 곧 생각하는 삶이다”라는 잊기 쉬운 기본 명제를 가만히 상기시킨다.

도약을 머뭇거리는 이들을 위한 글쓰기 직설

2권에는 글을 쓰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특히 6강 ‘글쓰기를 묻다’와 특별 부록 ‘글쓰기 직문직답直問直答’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문답들이 특기할 만하다. 첫 문장을 쓰는 방법부터, 글의 주제를 잡는 법, 구성과 전개 방법, 독창적 발상법, 그리고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준다. 수강생 혹은 청중들과 직접 소통하며 강의한 것이라, 피부에 와닿는 실전 밀착형 조언이 두드러진다. 6강에서 글쓰기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문답이 오간다면, ‘글쓰기 직문직답’에서는 글쓰기를 할 때의 보다 구체적인 어려움에 대한 문답이 이루어진다. 자신의 일생을 글쓰기로 건축한 이 문장가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모두 아울러, 현실적이고 공감을 자아내는 어드바이스를 제공한다.

메모는 기록 이상이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길바닥에 떨어진 비둘기 깃털, 아니면 생쥐의 시체…. 세상 도처에 있는 것이 글감이다. 그게 곧 글의 주제가 된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걸 다 스쳐 보내고 곧 잊어버린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메모해놓아야 한다. 메모는 구성을 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하다.

표현 ‘훔치기’ ‘이건 굉장히 중요한 정보다’라는 것에만 줄을 치는 게 아니라, ‘이런 내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고 표현이 새롭게 느껴질 때에도 밑줄을 치고 메모도 하라. 말하자면 표현을 ‘훔쳐’ 오라. 그렇게 몇 번을 훔치다보면 또 그 훔쳐온 것들끼리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자기만의 새로운 표현이 생긴다.

창의성의 샘, 의심 남들이 하는 말을 똑같이 한다면 그건 답습이지 창의성이 아니다. 항상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라. 회의주의자가 되라. 의심하는 것, 회의하는 것이 곧 독창성과 창의성을 연습하는 것이다. ‘이건 혹시 틀린 말 아닐까? 틀린 생각 아닐까?’ 이렇게 되물으며 생각을 가다듬다보면 ‘새로움’이 생긴다.

쓰면, 된다 글을 쓸 때에는 이론에 따라서 쓰는 게 아니다. 글의 밑그림이나 시놉시스조차 안 그려질 때, 몇 개의 단어라도 나열해보라. 그러고 말이 되든 안 되든 하여간 써라. 쓰다보면 한 단어가 또다른 단어를 불러내 문장을 만들어내고,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다시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그렇게 해서 얼개가 짜인다.


한국어에 대한 치밀한 이해
고종석은 한국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장가로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왔다. 저서 《국어의 풍경들》《말들의 풍경》은 물론이고, 《감염된 언어》와 《자유의 무늬》의 몇몇 글들 역시 언어, 그리고 한국어에 대한 교양과 통찰의 일대 장관을 보여준다(알마 출판사는 이들 글을 묶어 2014년 말에 ‘고종석 선집: 언어 편’을 발간할 예정이다). 《문장 2》에서는 크게 4강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과 5강 ‘은유와 환유’에서 그 면모가 화려하게 드러난다. 가령 그는 한글을 로마문자로 표기하는 것을 주제로 하여 매큔-라이샤워식과 문화부식과 예일식 등의 세 가지 방법을 설명하면서, 음성-음소-형태음소와 관련한 이론 지식의 자세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또 엔도님과 엑소님이라는 다소 생경한 개념을 강의의 한복판으로 끌고 와서는,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와 관련한 이론적 정리를 시도한다. 사실 이들 강의의 내용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일견 글쓰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가 한 단어 한 단어 써내려갈 때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고려했는지 알 수 있고, 이는 다시 우리에게 좋은 글쓰기의 조건, 좋은 글쟁이의 자세에 대해 성찰해볼 여지를 행간에 자욱하게 남겨놓는다.

책 속으로

1강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수사를 사용해 글을 쓰면, 흔히 ‘예쁜 글을 쓴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수사가 들어간 글은 화장한 글이고 올곧지 못한 글이다, 이런 뉘앙스죠. 그런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좋죠._12쪽

물론 저는 아름다움과 명료함 둘 가운데 딱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머뭇거릴 것도 없이 명료함을 선택할 겁니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이 좋은 글의 요건이라는 사실 또한 엄연합니다._12쪽

저는 아름다운 글을 읽을 때 섹스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글이라면 웬만한 섹스보다 더 큰 쾌감을 줍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_13쪽

일신교의 신은 일단 전지전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지선이라는 특징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교리로서는 치명적이죠. 지선과 전지전능, 둘 모두를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신학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_22쪽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고 지선하다면,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비극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벌어질 비참을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이라면 세상을 이렇게 놔두지는 않겠지요._22쪽

글쓰기 비결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시를 읽으라는 것입니다. 시를 읽는 것은 산문을 섬세하게 쓰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시인이 산문가보다 언어감각이 한결 예민하고 섬세합니다. 그러니까 시를 자주 읽다보면 산문을 더 섬세하게 쓸 수 있습니다._54쪽

미학자 진중권 씨나 영화평론가 허지웅 씨 같은 이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자기들은 글을 쓴 다음에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본대요. 원고를 언론사나 출판사로 보내기 전에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럴 시간 있으면 술이나 마시든지 잠이나 자라”그랬습니다.(웃음)_55쪽

글 쓸 때는 항상 사전을 옆에 비치하세요.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반드시 확인한다, 확인이 되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우고 지키십시오. 틀린 말을 쓰느니 아예 안 쓰는 게 좋아요._56쪽

한국 좌파가 과격하다고들 하는데, 제가 보기에 세계에서 제일 온순한 좌파가 한국 좌파입니다.(웃음) 일본만 해도 적군파를 보세요. 야마다 산장이란 데서 자기들끼리 서로 숙청해서 죽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었죠._63쪽

접속부사를 빼도 말이 된다 싶으면 빼세요. 글에 긴장감을 줄 수 있습니다. 접속부사를 문장 앞에 자꾸 붙이면 글이 늘어져 보여요. 이를테면 앞문장과 반대되는 내용을 말해야 하니까 ‘그러나’를 꼭 넣어야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다 일종의 쓸데없는 강박입니다._68쪽

물론 글을 쓸 땐 되도록 쉬운 말을 쓰려고 애써야 하지만, 늘 쉬운 말만 쓰다보면 어휘는 영원히 늘지 않을 거예요. 글을 잘 쓰려면 어휘를 늘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전 구석 어디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말을 막 가져다 쓰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이라야 하죠._73쪽

독자들에게 구체적 정보를 줄 수 있는데도 얼버무리는 건 글 쓰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죠._76쪽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권리입니다. 저도 그걸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하지만 그것의 추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_95쪽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인 제1당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없앨 수도 있었고 고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안 고쳤어요. 그 당시 여당 내에서 뭐라고 그랬냐면 “국가보안법은 거의 사문화된 법이야. 이제 이 법조항으로 처벌도 안 하잖아” 이런 식이었습니다. 웬걸, 그때나 그랬지, 정권 바뀌니까 얄짤없어요._96쪽

표현의 자유를 넓혀야죠. 거의 무한대로 넓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넓혀야 합니다. 자유가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셀렙, 그러니까 유명인들만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장삼이사는 그런 자유를 못 누린다, 이건 공정성을 떠나서 법치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합니다._97쪽

2강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단지 생활수준이 높아서 습관적으로 삼다수를 마실 수도 있겠지만, 삼다수는 국산 생수 중에선 아마 가장 비싸죠? 전시효과는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삼다수를 마시다가 그것이 대중화하면 에비앙이나 볼빅을 마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기 위해서요. 물론 우월적으로 달라지기 위해서입니다._103쪽

전라도나 경상도 사람이 억양도 서울말투를 흉내 내서 “나도 너하고 술 마시고 싶어” 이렇게 또박또박 말하면 원래의 표준어 사용자는 위기를 느낍니다. ‘어? 이 사람들도 표준어를 쓰네. 그럼 내가 잘난 걸 드러낼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젠 “나두 너하구 술 마시구 싶어” 이렇게 얘기합니다.(웃음)_107쪽

영남방언에선 앞에 의문사가 있는 의문문에는 반드시 ‘-노’를 쓰고, 의문사가 없는 의문문에는‘-나’를 씁니다. 그래서 “어디 가노?” “어디 가나?”는 뜻이 전혀 다릅니다._109쪽

서울말에는 억양이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밋밋한 억양이죠. 그래서 아주 지루해요. 영남방언은 굉장히 음악적입니다, 억양이 롤러코스터죠._110쪽

제1계급이 거의 다 영남방언을 쓰기 때문에 평범한 영남 사람들이 영남방언을 쓴다고 해서 정치?경제적으로 손해 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외려 “나, 대한민국 주류야” 이런 것까지 은근히 내비칠 수 있어요. 그래서 영남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방언을 고치지 않습니다. 서울말과 차이를 지우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아요._112쪽

솔직히 말해 전혜린의 문장은 형편없습니다. 이국적 취향의 단어들을 점점이 박았을 뿐 문법적으로 단정하고 깔끔한 문장, 기다란 울림을 주는 성찰적 문장이 거의 없어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뮌헨, 독일 같은 특권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구별짓기의 흔적들뿐이죠. 그런데 사실 그 구별은 이미 다 지워져버렸습니다._121쪽

저는 양주동 선생의 산문을 좋아합니다. 제 문체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제가 흉내도 낼 수 없는 문체지만, ‘이런 게 바로 문체구나, 스타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정말 양주동만의 문체죠. 이렇게 자신만의 문체를 확립한 사람을 스타일리스트라고 합니다._123쪽

피천득 선생은 잘 알려진 스타일리스트입니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타일에서 일가를 이뤘다 해도 그 내용이 천박하면 좋은 글이라 할 수 없습니다. 꼬마 때 읽으면 “와, 이분 글 잘 쓰네” 하겠지만 조금만 크면 바로 알게 되죠. “그 메마른 시대, 1920년대에서 1940년대를 이 사람은 저런 헐벗은 내면을 지니고 살았구나” 하고요._127쪽

스타일만 가지고는 마음의 천박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올바르고 기품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제일 좋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 천박함을 절대 글에서는 드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격언은 틀린 말이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 글로 사람을 판단합니다._127쪽

전체주의는 전형적으로 20세기적 현상입니다. 20세기 이전에는 아무리 삼엄한 전제왕조라고 하더라도, 개인들이 연애를 하거나 이사를 가거나 여행을 하거나 이런 데까지 국가가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체주의 국가는 사생활에까지 개입하는 전혀 새로운 정치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21세기 북한은 그 전체주의의 끝까지 가보려는 것 같습니다._153쪽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 환경 같은 것들을 사람들은 흔히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봅시다. 자유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세상은 완전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될 거예요. 힘없는 사람들은 그냥 찌그러져 죽어야죠. 또 평등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사회 자체가 너무 억압적이 됩니다. 집단주의 사회가 되는 거예요._159쪽

나이가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열등해진다는 뜻입니다. 늙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한테 당연히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버르장머리 없다는 둥, 말세가 왔다는 둥하며 자꾸 젊은이들에게 트집을 잡죠. 이게 다 겁이 나서 그런 거예요. ‘나는 이미 갔고, 이제 쟤네들이 세상의 주인이구나.’_163쪽

이승만 정권 때 집권 정당이 자유당이었습니다. 실제 그 시절의 한국 현실은 별로 자유롭지 않았죠. 박정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권정당이 민주공화당이었는데 그때 한국은 민주주의도 아니었고 공화주의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전두환 때의 집권정당은 민주정의당이었으니 말 다했죠.(웃음)_167쪽

강조를 하기 위한 부사들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습니다. 정말 꼭 써야 할 자리에만 쓰기를 권합니다. 그래야 읽는 사람이 ‘이 사람은 냉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흥분된 상태에서가 아니라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글을 쓰고 있구나’, 이렇게 느낍니다._170쪽

사실 교사라고 해서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히 윤리적이지 않아요. 현대 사회에서 교원을 뽑을 때 덕성을 보고 뽑는 게 아니잖아요. 괜히 교사들에게 “넌 스승이니까 보통 사람과 달라야 돼” 하고 요구할 게 아니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 정도만이라도 실제로 지키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_177쪽

3강 전략적 글쓰기
으르렁말, 가르랑말은 가치중립적 말이 아니라, 즉 객관적 말이 아니라 감정이 팍팍 들어간 말입니다. 그 감정이 부정적 방향이면 으르렁말이라고 하고, 긍정적 방향이면 가르랑말이라고 합니다. 사실 잘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는 일상에서 엄격하게 중립적인 말을 그리 많이 쓰지 않습니다._189쪽

동일한 사람한테 “저 사람은 신앙인이야”하는 것과“저 사람은 예수쟁이야” 하는 것은 개념적 뜻은 같지만 정서적 뉘앙스가 많이 다릅니다. 신앙인은 가르랑말에 가깝고, 꼭 가르랑말이 아니더라도 하여간 중립적 말에 가깝고, 예수쟁이라는 말은 으르렁말입니다.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할 기독교 신자는 없겠죠._190쪽

인류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근친상간이 금기가 된 이후로 어떤 문화권에서든 자기 어머니와 섹스하는 것이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죄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욕에는 섹스와 관련된 욕이 많고 특히 어머니와의 섹스, 그러니까 아주 직접적인 근친상간과 관련된 욕이 많습니다._191쪽

한국사회에서는 ‘민족주의자’ 하면 대체로 가르랑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요새는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칭송입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그 사람, 내셔널리스트야”하면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히틀러 비슷한 사람인가보다, 베냐민 네타냐후 비슷한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인식합니다._195쪽

글이나 말에서는 중립적 어휘가 드물고 가르랑말과 으르렁말이 판을 칩니다. 저는 그것이 글쓰기의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들을 만들어낸 하야카와 교수도 그랬듯이요. 그렇지만 그런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의 적절한 사용이 글쓰기 전략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_199쪽

자기편에 대해선 항상 좀더 좋은 이미지를 가진 단어를 사용하고, 상대편에 대해선 되도록 나쁜 이미지를 가진 단어를 사용하는 게 이런 전략적 글쓰기에선 중요합니다. 가르랑말과 으르렁말의 빈번한 사용은 전략적 글쓰기의 핵심입니다._200쪽

북한의 경우는 소위 ‘기념비적 대작’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있어요. 아주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의 폐해입니다. 사실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함께 있는 것만 해도 좀 어색한데, 그 거리에 한 열 사람쯤의 동상이 서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도 등신대等身大가 아니라 실제보다 훨씬 큰 형태로요. 숨이 콱 막힐 겁니다. 제 생각엔 평양 상황이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평양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뽀뽀도 마음 놓고 못할 것 같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그럴 것 같지만 여기저기서 김일성 장군님이 들여다보고 있잖아요.(웃음)_232쪽

물론 담배꽁초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는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이게 좋은 사회의 징표일까요? 이 청결함에 어떤 불길한 징후는 없는 걸까요?_241쪽

사람들은 깨끗한 것, 순수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런 것을 집요하게 추구하다보면 공동체의 분위기가 억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장애인들이 거리에 안 보이면 ‘사람들이 모두들 건강하고 사지 멀쩡하고 참 좋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것은 그 사회의 억압성을 드러낼 뿐입니다._242쪽

국어순화운동도 지나치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말을 궁핍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완전한 순수함이나 완전한 청결함을 추구하는 건 위험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위생 처리된 사회는 결국 전체주의 사회죠. 그런 사회가 바로 정말 무서운 사회입니다._244쪽

4강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화자가 제3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매개어는 영어이기 십상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났다고 하더라도 영어로 소통하는 일이 많잖습니까? 이건 프랑스 사람과 독일 사람이 만났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만큼 자연언어의 세계에서 영어의 힘이 셉니다. 가까운 미래에 영어에 도전할 만한 국제언어가 나타날 것 같진 않습니다._251쪽

로마문자는 인류가 발명한 문자들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한국어처럼 로마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도, 예컨대 거리의 간판을 보면 꼭 한글 간판만 있는 게 아니죠? 로마문자 간판이 한글 간판보다 더 많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많아요. 어쩌면 어떤 동네에선 로마문자 간판이 한글 간판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부자 동네에서는요.(웃음)_253쪽

사실 문화부식 즉 국립국어원의 로마자표기법이 엄격한 언어학 원리에 크게 미달하는 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뭔가 표준을 세워야 한다면 한국 정부의 공식표기법을 따라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마다 잘났다고 제 목소리를 내다보면 표준을 정할 수가 없잖아요?(웃음) 걷다보면 길이 되듯, 이 어색한 표기도 자꾸 쓰다보면 익숙하게 되겠죠._270쪽

외래어 표기들을 살피면 국제음성문자를 한글에 고스란히 대응시키지 않는 예외가 적잖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단순한 원칙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정부안을 따라주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원음주의를 따르기 시작하면, 절대 도달 불가능하고 허망한 작업을 끝도 없이 해야 할 겁니다._277쪽

고유어처럼 들리는 말 가운데 한자어가 변해서 된 말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서랍은 설합舌盒에서 왔고, 봉숭아는 봉선화鳳仙花에서 왔죠. 멱 감다, 미역 감다 할 때 멱이나 미역은 목욕沐浴에서 온 말이고요. 철쭉도 척촉??이라는 말에서 나왔고, 도둑도 도적盜賊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많습니다. 벼락과 벽력霹靂, 대추와 대조大棗도 그렇지요._285쪽

사냥이란 말은 산행山行에서 왔는데, 사냥은 hunting의 뜻이고 산행은 말 그대로 산길을 걷는 것, hiking을 의미합니다. 형태가 일그러지면서 의미가 좀 변한 겁니다. 엄두도 염두念頭의 형태가 일그러져 생긴 말입니다. 이 두 단어가 같은 뜻은 아니죠. 짐승과 중생衆生, 귀양과 귀향歸鄕도 그렇습니다. 가난과 간난艱難도 그런 예입니다._285쪽

현대 한국어는 지금 모음체계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단모음 ㅚ의 경우 지금 거의 사라졌어요. 물론 충청도나 전라도 지방의 아주 나이 많은 어르신들 중에는 이 단모음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 ㅚ는 사실상 ㅞ로 발음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서울방언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독일 시인 괴테도 ‘궤테’로 발음합니다._287쪽

한국어의 모음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저는 좀 슬퍼요. 흔들리면서 모음이 다양해지는 게 아니라, 다양했던 모음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거니까요. 말하자면 한국어 모음이 지금 서로 합쳐지고 있는 겁니다. 중화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요._288쪽

사회가 평등할 때 분명히 사회 구성원 전체가 누리는 효용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항상 원칙대로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힘이 센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힘이 센 사람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더 중시하지요. 물론 힘이 약한 사람들도 흔히 그렇지만요.(웃음) 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죠. 사람은 공적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탐욕, 질투, 심통 같은 여러 심리적 요인에 따라 자주 불합리적으로 경제적 선택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평등한 세상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겁니다._296쪽

우리가 한 남자를 또는 한 여자를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또는 아이패드를 사랑할 수 있고, 디스플러스 담배를 사랑할 수도 있고, 레드와인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 나라를 사랑한다?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해요? 코스모스를 사랑할 수도 있고 채송화를 사랑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사랑한다는 건 사실 좀 어려운 겁니다. 아니, 사랑할 수야 있겠죠. 그렇지만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조금 의미가 다른 사랑이에요._310쪽

괜히 ‘나는 노동자 계급을 사랑한다’ 이렇게 공허한 소리를 외치는 것보다, 길에서 전단지 나눠주는 할머니를 발견하면 조용히 하나라도 받아주는 것이 차라리 선행입니다. 그러면 최소한 그 할머니가 일하는 시간이 좀 줄어들 테니까요._316쪽

몇 달 전에 누가 트위터에 그런 말을 인용해 올렸더라고요. 잘 알려진 무신론자인데 이름이 안 떠오르네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너는 모를 테니까. 오직 주위 사람들만 안다. 네가 바보라는 사실처럼.”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웃음)_318쪽

5강 은유와 환유
시인은 신선한 표현을 갈구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때로 자신도 모르게 환유보다는 은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좋은 시적 비유는 은유일 수밖에 없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은유보다 환유를 더 많이 쓰고 있다고 아까 제가 말씀드렸는데, 그것도 당연합니다. 일상어들은 대체로 관용적 표현, 닳고 닳은 상투어가 많습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환유입니다. 우리가 시를 쓰지 않는 한, 은유보다 환유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나 시인처럼 말할 수는 없잖아요(웃음)_338쪽

한국 이름도 흔한 이름은 많이 겹치지만, 흔하지 않은 이름도 많잖아요. 서양에선 그렇지가 않아요. 거의 존이니, 폴이니, 피터니, 메리니…. 뭐, 제가 일일이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퍼스트 네임으로 쓰이는 이름이 한 나라에 백 수십 개 정도나 될 겁니다. 아무리 많아 봐야 200이나 300을 넘을 것 같진 않군요. 한국인의 이름 다양성이 태평양 크기라면 서양 사람들의 이름 다양성은 서울 잠실의 석촌호수보다도 작습니다. 다만 성姓의 가짓수는 한국보다 많지요._340쪽

보통 한국은 영어책 번역을 많이 하잖아요? 유럽 역사를 서술한 영어책에는 이 Charles V라는 사람이 흔히 나옵니다. 그러면 번역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뜸 찰스 5세라고 옮깁니다. 그건 완전히 잘못된 거죠. 이 사람은 사실 영국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거든요.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스페인어로 카를로스 1세라고 하거나 독일어로 카를 5세라고 해야 합니다. 스페인에서도 보편화한 카를로스 5세라고 해도 좋고요. 이 카를로스 5세는 유럽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데, 이 사람을 찰스 5세라고 부르면 갑자기 ‘듣보잡’ 영국인으로 변해버립니다.(웃음)_343쪽

독일 철학자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K?nigsberg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칸트가 살던 시대에 이곳은 독일 프로이센 영토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가 러시아 영토가 되어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아마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영국 사람이든, 칸트가 살았던 도시를 칼리닌그라드라고 부르진 않을 거예요. 칸트라는 사람과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 이름이 워낙 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_349쪽

역사책에 흔히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적힌 도시는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입니다. 엔도님 우선 원칙에 따르면 어느 나라 사람이건 이곳을 이스탄불이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의 경우 그렇게 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들에게는 콘스탄티누폴리라는 그리스식 명칭이 자신들 고대사의 헌걸찬 인물이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워낙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_349쪽

저는 일단 국어사전을 찾아봅니다.‘건축’항목을 보면 그 말의 정의가 나올 겁니다. 그 정의를 읽다보면 또다른 연관개념이 나오고, 다시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그러다보면 첫 문장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사실 첫 문장 찾아내기가 힘들지, 첫 문장을 일단 딱 써놓고 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쭉쭉 나아갈 수 있습니다._360쪽

글에서 표준어를 쓰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표현을 너무 비속하거나 무람없이 하면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독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중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때로는 속류적 표현이 글에 생동감을 주기도 하죠. 말을 할 때도 너무 바른말만 하면 지루하잖아요?_373쪽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사실 확인을 해야 합니다. 글은 공적으로 일단 발표되면 말처럼 날아가버리는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하긴 요즘은 말도 남아 있는 세상이 돼버렸지만요.(웃음)_374쪽

노트르담성당은 세계에 아마 수백 군데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냥 노트르담성당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어디 지역의 노트르담성당이라고 해야 뜻이 통합니다. 파리 노트르담성당, 하는 식으로요. 노트르담은 Notre-Dame이라고 표기하는데,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우리 아줌마’ 정도의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의 어머니, 즉 마리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주교 성당에는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이 흔하게 붙습니다._377쪽

요사이 보면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도 시들이 적혀 있더군요. 아, 그런데 정말 초등학교 학예회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시들이 추려지는 과정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굉장히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 공공장소에 시를 적어놓으려면 한국어의 정수를 박아놔야 마땅할 텐데, 어이가 없습니다._380쪽

6강 글쓰기를 묻다
처음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막막한 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막막한 감정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힘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 같아요._388쪽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글쓰기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글을 안 써도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생각을 좀 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생각하는 과정이죠._388쪽

저는 라이터스 하이wirter’s high라는 말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좀 힘들고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쓰다보면 즐거워지거든요. 그렇게 글을 쓰는 데 쾌감까지 느끼게 되면 결국 직업적 작가가 됩니다._389쪽

완전히 옳은 글이라는 건 없고, 또 완전히 틀린 말만 들어간 글도 없습니다. 모든 글에는 옳은 부분과 그른 부분이 있는데, 옳은 부분이 많은 글이 좋은 글이겠죠. 만약 완벽하게 옳은 관점만 고스란히 담아낸 글이 있다면, 또다른 글을 새로 쓸 필요도 없고 또 다른 글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_399쪽

생각하는 힘이라는 게 일종의 머리의 근력이거든요. 쓰면 쓸수록 좋아집니다. 물건하고 달라서 닳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읽는 것, 생각하는 것은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좋아요. 돌아가신 미당 서정주 선생은 만년에 러시아에 있는 산 이름을 다 외웠다고 합니다. 억지로 다 외웠다고 해요. 기억력이 저하되는 걸 막기 위해서요._404쪽

한국어 단어를 3,000개 정도밖에 알고 있지 않은 사람과 3만 개 정도를 알고 있는 사람의 글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도대체 한국어 단어를 몇 개나 알고 있는지 좀 궁금해요. 하도 말을 안 하고, 하더라도 짧게만 얘기하잖아요. 한국어 단어는 솔직히 1,000개도 모르시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웃음)_406쪽

메시지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성급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지는 마세요. 질문만으로도 충분히 글이 됩니다. 그냥 수수께끼로 남겨둔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글이 돼요. 소설에서도 그렇고 일반 산문에서도 그렇습니다. 꼭 정답이나 결론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_410쪽

싱커thinker라는 건 생각이 특별한 사람입니다. 만약 글을 쓴다면 굳이 남들이 했음직한 말은 쓰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한번 써보세요. 되도록 ‘다른 사람은 이런 생각을 안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의식하며 글을 쓸 때 정말 글쟁이가 된 느낌이 듭니다._413쪽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를 판단해서 중요하지 않은 문장을 버려야 합니다. 아까워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한 문장에서도 꼭 들어가야 할 성분이나 단어가 아니라면 과감히 잘라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_420쪽

저는 오히려 한국어가 장기적으로 소멸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만약 다음 세기에 어떤 한국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저는 그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쓸 거 같진 않습니다. 아마 영어로 쓸 거 같아요. 참,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뼈아픈 일입니다._434쪽
목차

1강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2강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3강 전략적 글쓰기
4강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
5강 은유와 환유
6강 글쓰기를 묻다